교리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칭의 교리 말고도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심오하고 다채로우며 풍성한 내용이 그에 걸맞은 관심과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은 아쉽다.

?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neednot"는 주장과 "할례받으면 절대 안 된다mustnot"는 주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 바울이 이방인 남성 신자의 할례와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신칭의 가르침이 어떤 상황과 문맥에서 등장하는가?

? ‘의롭게 됨(혹은 의롭다고 여겨짐)’, ‘믿음’, ‘율법의 행위들’ 등 갈라디아서의 키워드는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 ‘그리스도와 연합’ 또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은 정확히 어떤 현상을 말하는가?

?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의 권면은 1-4장의 신학적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을 때 "이 부분은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독자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내용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독자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모두 좋은 질문이다. 이 책이 날 선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었기를 바란다.

또한 바울이 어느 부분에서 억지를 부리는지, 그의 주장 중에 어떤 것이 설득력이 부족한지 독자 스스로 정직하게 느끼며 판단하면 좋겠다.

갈라디아서가 특정 시대에 특정한 교회의 특정한 문제를 다룬 상황적 편지라는 사실, 고대인의 의사소통 방법, 고대인의 세계관, 이 세 가지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가 저술될 당시의 맥락에서 파악한 뒤에 교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점이 몇 가지 있다.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당시의 편지 쓰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편지들은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한 정보(예: 바울이 디모데에게)에 뒤이어 감사의 표현이나 건강 기원 등을 담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행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감사 표현 대신 저주를 써넣었다. 그것도 두 번(1:8-9)이나! 갈라디아서가 회중 앞에서 처음 낭독될 때 갈라디아 회중은 자기들의 관습적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대목에서 무척 놀랐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전복적 의미가 곳곳에 박힌 구약해석, 독특한 은혜 이해, 복음 설명, 일반적이지 않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는 바울의 계산된 수사법이 있다.(수사법은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사학에서 도출된 기술이다.) 편지 도입부의 저주문구는 그가 사용한 수사법의 한 예이다.

1장을 채우는 주제는 바울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권위, 회심 전과 후 바울 삶의 극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미묘한 관계이다. 이러한 굵은 씨줄에, 본론에서 자세히 다룰 은혜의 본질, 복음의 규범성(복음은 순종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이해, 갈라디아 교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이 희미한 날줄의 형태로 엮여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된 것이며,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한다(1:7-9, 11 참고). 이 주제는 1장을 지배한다

바울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면 바울의 복음은 ‘절대적 권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의 죽음을 우리 죄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행위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표현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유사 단어(‘넘겨 주심’)로 다시 등장하며, 이어지는 21절에서 이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사건’이 지닌 선물의 측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넘겨) 주신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 이 신학적 사실과 당위성으로부터 바울은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기-주심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은혜와 칭의의 관계를 스케치 정도로만 남겨 둔다. 그리고 나중에 편지 본론에서 자세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 관계들이 규명된다.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집어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현시대의 악한 손아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악한 시대와 분리된 채 살아가도록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바울은 편지의 초두부터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기반으로 신학(구원론)과 윤리(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어 말한다.

5-6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논하는 것은 결코 이 중요한 신학적 편지의 부록이 아니다.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5: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사건’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4).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점이 몇 가지 있다.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당시의 편지 쓰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편지들은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한 정보(예: 바울이 디모데에게)에 뒤이어 감사의 표현이나 건강 기원 등을 담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행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감사 표현 대신 저주를 써넣었다. 그것도 두 번(1:8-9)이나! 갈라디아서가 회중 앞에서 처음 낭독될 때 갈라디아 회중은 자기들의 관습적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대목에서 무척 놀랐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전복적 의미가 곳곳에 박힌 구약해석, 독특한 은혜 이해, 복음 설명, 일반적이지 않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는 바울의 계산된 수사법이 있다.(수사법은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사학에서 도출된 기술이다.) 편지 도입부의 저주문구는 그가 사용한 수사법의 한 예이다.

1장을 채우는 주제는 바울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권위, 회심 전과 후 바울 삶의 극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미묘한 관계이다. 이러한 굵은 씨줄에, 본론에서 자세히 다룰 은혜의 본질, 복음의 규범성(복음은 순종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이해, 갈라디아 교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이 희미한 날줄의 형태로 엮여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된 것이며,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한다(1:7-9, 11 참고). 이 주제는 1장을 지배한다

바울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면 바울의 복음은 ‘절대적 권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의 죽음을 우리 죄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행위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표현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유사 단어(‘넘겨 주심’)로 다시 등장하며, 이어지는 21절에서 이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사건’이 지닌 선물의 측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넘겨) 주신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 이 신학적 사실과 당위성으로부터 바울은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기-주심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은혜와 칭의의 관계를 스케치 정도로만 남겨 둔다. 그리고 나중에 편지 본론에서 자세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 관계들이 규명된다.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집어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현시대의 악한 손아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악한 시대와 분리된 채 살아가도록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바울은 편지의 초두부터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기반으로 신학(구원론)과 윤리(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어 말한다.

5-6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논하는 것은 결코 이 중요한 신학적 편지의 부록이 아니다.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5: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사건’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4).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에게서 연원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복음"(1:7)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은 이들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켰다."

감정, 권위, 세간의 인정, 청자와의 관계 등 여러 요소가 화학 작용을 이루어야 설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갈라디아 회중과 가까이에서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은 확실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바울이 선택한 설득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학, 더 정확히는 청중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논법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한다.

광의의 맥락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절대 침해될 수 없는 바울 복음의 규범성normativity은 바울이 선언한 저주를 통해 보전된다.

갈라디아서는 편지이고 그 안에 이중으로 저주 문구가 적혀 있기 때문에 이를 읽는 자 중에 혹 바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바울 복음에 걸맞지 않게 사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

복음이 은혜를 통해 가져다준 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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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레이는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이 1-4장의 신학적 논증의 필연적 결론이라고 정확하게 말한다. 이 윤리 권면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에 목말라하며 불안해하다가 "율법의 행위들"이 제시해주는 구체적 행동 사항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바울이 "영의 이끄심"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설명한다.
- 김선용 해제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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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무한 - 필립 네모와의 대화 에라스무스 총서 4
에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동규 옮김 / 도서출판100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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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에 대한 명징한 정의(定義)라 생각한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앎'은 텍스트 안의 여러 개념들이 나의 언어로 소화되어 해석되고 적용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의도한 본질에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특히 철학은 고유한 개념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것이 전체 텍스트 이해에 필수적 과정이다. 


철학자의 사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의 책은 어려운 개념과 난해한 문장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여타의 책에 비해 쉽다.


이 책은 프랑스 공영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문화를 통해 송출된 방송 대담을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또한 필립 네모(Philippe Nemo, 1949~)는 레비나스의 전반적인 사상과 저서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맛보기 원한다면, 그의 사상을 조금 더 간명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먼저 읽어 보아야 할 귀한 책이다. 


#에마뉘엘레비나스

#윤리와무한

#도서출판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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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임을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나의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으로, 혹은 심지어 나와 무관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정확히 나를 주시하는 이는 나에게 얼굴로 다가옵니다. - P108

정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 이념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사이에서- 벗어남의 정신을 간직하는 경우에만 유의미합니다. - P114

원리상 나는 ‘일인칭‘으로부터 나 자신을 빼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계를 떠받칩니다. - P114

주체성은 타인에 대해 책임짐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바로 그런 움직임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면서, 타인을 대신(대속)하는 데까지 갑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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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울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게 인간 된 도리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거짓말하지 않는 게 인간 된 도리라고 말이다.

이 잘못된 풍토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이제 우리는 이 둘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해!"라고 할 때도 어디까지나 부정확한 표현을 삼가라는 뜻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진실을 말할 것, 전체적인 상황을 공정하게 이야기할 것, 정보를 잘못 전달하지 말 것, 얼버무리지 말 것, 정보를 숨기지 말 것,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 ‘그럴듯한 주장’을 입에 담지 말 것,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 뻔뻔하게 정보를 취사선택하지 말 것, 진짜로 열불이 났으면서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인 척하지 말 것, 그저 제 잇속을 따져 움직이면서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척 속이지 말 것.

우리가 아이들에게 절대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코 우연히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건의 실상이 존재한다는 점, 실상을 알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 행복해진다는 점이다.

신앙을 제일로 여기던 옛 종교인들은
도덕적 진리를 위해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고문했다.
실익을 중시하는 요즘 현실주의자들은
육체적 진리를 위해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고문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어느 편에서 싸웠는지다.

개혁한다는 건
형태가 찌그러진 무언가를 보고
모양을 잡으려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모양이 어떤 건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진화나 진보라는 단어를 붙들고 말씨름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개혁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reform’이라는 단어에는 ‘form’이 들어 있다.

알아서 전개되는 게 진화고, 대개 잘못된 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게 진보라면, 개혁은 이성적이고 단호한 인간을 상징한다.

미신과 사회 여건에 영향받지 않도록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외딴 섬에서
홀로 아이를 키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섬과 호수와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종교를 선택하지 않아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

종교를 배제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곧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독히도 음침하고 기괴한 환경.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구나 자유롭게
종교에 관해 논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도 종교를
입에 올릴 수 없다는 뜻이다.

박해의 본질은 스미스필드에서 자행된 고문이나 화형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물로든 벼슬로든 그 나라에서 권력을 쥔 자가 시민들이 믿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나 철학으로 시민들을 지배하는 것, 이것이 박해의 본질이다.

새해의 목적은 새해를 맞이하는 데 있지 않다. 영혼과 코, 발과 척추, 귀와 눈을 새롭게 하는 것, 바로 여기에 새해의 목적이 있다.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결심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이후의 삶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효율’이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행동이 이루어진 뒤에라야 그 행동이 효율적이었는지 비효율적이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 일에 대한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효율에는 선택권이 없다. 행동이 완료된 뒤에라야 성공인지 실패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을 시작하려면 개략적으로라도 옳고 그름이 있어야 한다.

승자를 응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응원받는 그 순간에 그는 승자가 아니었으므로. 이긴 편에서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싸움이란 본래 어느 쪽이 이길지 알아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나른한 감상주의자일 것이다. 늘 뒤를 돌아보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저 승리만을 좋아한다면, 항상 전투에 늦으면 된다.

용기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용기는 죽을 각오로 살기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적에게 에워싸인 군인이 무사히 탈출하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와 살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함께 필요하다.

삶에 대한 집착만으로는 안 된다. 삶에 집착하면 겁쟁이가 될 테고, 그러면 탈출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는 지독하게 무심한 태도로 살고자 해야 한다. 물을 갈구하듯 삶을 갈망하고, 포도주를 마시듯 죽음을 들이켜야 한다.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눈길을, 빗길을 조심조심 걷게나
길은 아주 단순하지만,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아이처럼 논다는 말은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고 중요한 일인 양 논다는 뜻이다. 해야만 하는 허드렛일이나 작은 걱정거리라도 생기면, 그렇게 거대하고 야심 찬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어른들에게는 정치와 상업, 예술과 철학에 쏟을 힘은 있어도 놀 힘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직시하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는 도저히 잊을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사실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직시하는 이들은 우리보다 현명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들이 분명하다.

우리 주위에 위인이 없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늘 위인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떠받들 위인을 찾느라 손과 무릎이 바쁜 사람은 절대 위대해질 수 없다.

디오게네스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의 잘못은 너무도 명백하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인간이 정직한 동시에 부정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위선자는 몹시 불행한 사람이다.

가장 정교하고 고된 지적 예술에 온 힘을 쏟은 끝에 아무도 모르게 걸작을 완성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여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머쥐어도 칭찬 한마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천재요,
무인도에 사는 나폴레옹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
말들이 있는데,
살다 보면 그런 말을 꽤 자주 듣게 된다.

멀쩡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신중하게 내릴 수 있는 정의는 하나뿐이다.

멀쩡한 사람이란 가슴에는 비극을,
머리에는 희극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술가적 기질은
아마추어들을 괴롭히는 병이다.

톨스토이식 해석을 지지하는 자들은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누우면 어린양처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이 주도한 악랄한 합병이자 제국주의다. 사자가 양을 먹어 치우는 대신 양이 사자를 흡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자는 과연 어린양과 함께 누워서도 당당하고 흉포한 성질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교회가 풀려고 했던 문제이자 교회가 이루어 낸 기적이다.

겸손은 자신을 점으로 줄이는
화려한 기술이다.
작은 점 혹은 큰 점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아예 없는 점.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복잡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우주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갖가지 특성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자기에게 살짝 짐승 같은 면도 있고, 악마 같은 면도 있고, 성자 같은 면도 있고, 시민 같은 면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말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자기에게 약간의 광기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가 자기는 멀쩡하다고 굳게 확신하듯이, 유물론자의 세계는 몹시 단순하고 견고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을게"라고 말하면서 도덕이 시작된 게 아니다. 이런 거래가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 거룩한 곳에서는 우리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말자. 그래선 안 된다"라고 말한 흔적은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성을 얻었다.
그들은 담력을 기르지 않았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 싸웠더니 자기도 모르게 용감해졌다.
그들은 깨끗해지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단에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칠면조의 삶과 죽음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나, 스크루지의 영혼과 크래칫의 몸은 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관념적 지식을 위해 인간의 가정을 불행하게 하지도, 축제를 망치지도, 선물과 선행을 모욕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본래 다 위험한 법이라네.
나도 한때는 그랬었지."

겸손은 주로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에게는 늘 새로운 욕구가 생겼고, 새로운 욕구가 자비심을 웃돌기 일쑤였다. 향락의 위력이 기쁨의 반을 망가뜨렸다. 인간은 즐거움을 쫓아다니다가 가장 큰 즐거움을 잃었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키우고 싶으면 스스로 작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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