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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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배우는 곳 대부분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글의 생명력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는 어떠해야할까?

자신의 글쓰기와 글쓰기 모임을 통해 경험한
글을 통한 치유와 회복.

새해에 그럴듯하고 근사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건 어떨까?

이 책이 그런 분들에게 용기와 힘을 선물로 줄 것 같다.

#당신이글을쓰면좋겠습니다
#홍승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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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쓰다[동사]
1. 부지런하게 나를 개방하는 일
2. 용기의 도미노에 참여하는 일
3. 우연, 타자,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
4. 한계에서부터 다시 무엇인가 되어가는 일 - P226

경험을 해석한다는 말은 모든 경험에 이름표를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 P231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뚜렷하게 정해진 답이나 결말은 없다. - P231

우리는 다만 시간과 사건의 끝없는 연속성 안에 존재하고, 순간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품을 수 있을 뿐이다. - P231

그러니까 글도 서둘러 끝낼 필요 없다. 유독 마무리하기 힘든 글 앞에서는 잠깐 멈추는 게 좋다. - P231

급하면 익숙한 길로 빠지니까. 한 가지 이정표만 기억하면 된다. 익숙한 방법으로 쉽게 닫지 말고, 차라리 마침표를 열어두자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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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후반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육과 영의 대조는 5-6장이 단순한 도덕교훈 모음집이 아니라 3-4장에 기술된 신학적 논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영이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율법은 살리는 힘이 없다는 바울의 언명(3:21)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새로운 생명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 정체성은 단순히 참 생명뿐만 아니라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의 새로운 삶에서 구현된다.

생명은 죽음의 극복만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다

구체적 모습을 가지지 못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은 반드시 새 창조로 이어진다(6:15).

새롭게, 영에 따라, 영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이 새 창조이다.

구원의 확신만으로는 새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체현되지 않는 ‘믿음’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삶(6:14)으로 연결될 수 없다.

삶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으로 실현되지 않는 믿음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영 안에서 영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갖추어 살아나갈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은 율법을 통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5:1)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5:6)이, 그리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5:13)와 "이웃 사랑과 율법의 성취"(5:14)가 더 구체적인 공동체 안의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를 6장에서 보게 된다.

‘영적인 사람들’은 "온유의 영"(영의 열매 중 하나)을 가지고 범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수해야 한다.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같은 잘못을 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 따르미들은 영의 열매인 온유한 태도로 공동체 일원의 잘못을 교정하고 보수하며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사건’은 언약과 동일한 기능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사소한 불순종이라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제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법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극한 긴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이해되었는데, ‘예수의 가르침’, ‘이웃 사랑의 계명’,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되고 성취된 율법’,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새롭게 제정된 규범적 삶의 패턴’이 그것이다

믿음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며,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사건’ 자체가 일종의 규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1:4),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는 사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현해 내는 것이 당연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이러한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분별력을 발휘하여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받은 호의에 최선을 다해 감사로 보답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경제 윤리이다.

바울은 자발성과 호혜성互惠性을 강조한다.

구약은 물론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과 신약성서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공평과 정의의 신이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틀 아래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는 자비가 자리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이 세계가 나에 관한 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나도 세상에 관한 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세상과 ‘나’ 사이에 서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세상과 ‘내 자아’가 단절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합체는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작업은 당연히 ‘온 세상을 다시 만듦’,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짐’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온 세상에 대한 당신 주권의 재천명의 빛에서 볼 때 사실 이 편지 대부분을 채운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태생을 고려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신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바울은 이름 짓는다.

복음은 우리 삶의 규범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영에 맞추어 살면서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걷고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바울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올바른 잣대, 즉 그리스도 안의 규범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고, 1장 8-9절에서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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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1-4장의 신학적 논증과 분명히 구분되는 윤리적 권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갈라디아서 연구자들은 이 두 부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1-4장의 농도 짙은 신학적 서술이 5-6장의 윤리 지침에 토대를 제공하고, 이 윤리 지침은 신학적 사실을 실제적인 삶 가운데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은 바로 전 단락의 결론이자 새로운 권면을 시작하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 두 절(5:1-2)은 할례와 노예를 연결한 이전의 논증을 더 강화한다.

5:2은 갈라디아의 예수 따르미들에게 심사숙고하고 유용한 선택을 하라는 권면의 효과를 가진다

유익, 그것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유익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행동은 어리석다.

이어지는 3-4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점층법을 사용한다.

먼저 바울은 할례받는 사람은 율법을 전체적으로 준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한껏 부담감을 준 다음, 4절에서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여 청자를 극도로 두렵고 부담스럽게 만든다.

바울은 유익과 의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쉬운 선택지를 갈라디아인 앞에 제시하고 있다. 두 단어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이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분의 부르심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복음 안에서 받은 복이 모두 취소된 것이다.

칭의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고, 따라서 그러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5:6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 담고 있다.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미 했기 때문에 할례받는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결론은 쉽게 가능하다. 이 구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할례받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효력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곤경에 빠진다.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반대한 이유를 유대민족 중심주의 혹은 유대인 언약 우월의식에서 찾기 때문이다. 할례받지 않는 것도 의미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유대민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도출될 수 없다.

할례나 무할례 모두 ‘새 관점 학파’처럼 민족적 가치로 환원해서 해석하기보다는 인간이 구축한 가치 체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기존 가치 체계의 철저한 부정은,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도 볼 수 있듯, 지고至高의 가치가 뚜렷할 때 가능하다

최고의 가치는 그 외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한다

바울은 이 지고의 가치를 "사랑을 통해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라고 말한다

신앙과 행위는 일치해야 한다.

믿음에 부응하는 행동만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바울은 선한 행위 일반을 가리키지 않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특정해 부각한다.

‘그리스도-사건’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1:4, 2:20), 이 사랑을 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 따르미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모습인데(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복음의 진리를 향해 바르게 걷지 않았다고 바울이 책망한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인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핵심을 방해했으니 이 적대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5:8-10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다.

5:1이 4장의 끝마무리를 다시 명확하게 했다면, 5:13은 ‘부르심’과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앞의 논증 전체와 이 단락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엮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토록 빨리 저버린"(1:6) 갈라디아인들의 결정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을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는 점을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3:24-25, 4:9, 22-31).

5:13의 내용 중 현대 독자들의 피부에 확 와닿지 않는 것이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명예의 획득과 유지가 오늘날 21세기 사회의 돈에 맞먹는, 가치 추구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명예라는 당시 최고의 가치에 도전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다.

모두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최고의 가치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노예는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신분, 즉 명예와 대척점에 있는 것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아브라함의(진정한) 후손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획득한 갈라디아인에게 노예 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나 거북하고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전복적 삶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충격량을 잃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4장에서 주로 복음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신자의 정체성을 다루었고, 이제부터는 그 정체성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이자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자연스레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치 빛이 그 본성상 외부로 발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자의 믿음은 그 사람의 행동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방식을 바울이 ‘사랑’으로 압축해 표현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5:6).

사랑이 무엇일까? 15절 이하를 보면, ‘육신에서 기인하는 일체의 행동’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으로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5:6)는 타인에게 종노릇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5:13), 자신을 아끼는 만큼 타인을 아끼며(5:14),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5:19-20).

부족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을까? 바로 ‘영의 일들’을 해야 한다

5장의 많은 문장이 명령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5:5을 해설할 때 ‘영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5:16부터 바울은 ‘영으로(πνε?ματι)’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영으로 걸어가는(살아가는)" 삶이 참 인간이 영위해야 할 삶이다.

바울에게 욕망의 제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욕망은 5:13의 ‘육신의 기회’라는 표현을 연상시킨다.

"영에 이끌린다면"(5:18) 영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 영의 열매들 안에 "자기 통제"가 있으므로(5:23) 육신이 "욕망하는" 것(5:17)을 제어할 수 있다.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현주소이기 때문에 바울은 13절과 16절에서 명령법을 사용한다. 5:24-25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주제는 2:19과 3:12에 이미 나온 적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신자는(2:19)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2:20),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만들어진 인간은 욕망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신앙과 행동은 하나다. 그러나 신자가 손 놓고 있으면 이러한 욕망의 제어를 실현할 수 없다.

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기술事實記述이다.

복음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정체성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지만, 너무 급작스럽고 세상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신자 자신도 충분히 깨닫고 체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평서문과 명령문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령이 더 많이 활동할수록 사람의 의지는 더 고무되어 모든 일을 충분하게 생각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며, 고된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생활 습관을 개발하고, 반대로 나쁜 습관, 때로는 강요된 것이 명백한 죽음의 습관을 제거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선물이며 … 여기서 자유란, 노예 상태에서 책임의 상태로 해방되는 것으로, 마침내 스스로 도덕적인 근육을 선택하여 훈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며 성령도 그 안에서 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내가 하는 그 일을 하나님 자신이 하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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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세요. 내 몸이 머물렀던 공간, 시간, 대화, 움직임을 따라가며 써주세요. 그러면 글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어요. - P116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 글을 쓰는 나의 자리로 옮겨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써보는 거예요. - P116

상황을 뭉뚱그리지 않아야 나도 글을 쓰면서 그때의 나와 타자를 이해하거나, 위로하거나, 정확한 대상을 향해 분노할 수 있어요. - P116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P117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 P174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 P174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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