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목회자의 영성 - 바쁘지 않으면서 전복적이고 묵시적인 유진 피터슨의 목회 멘토링 3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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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여러 면에서 애매한 존재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성경을 연구하고 세상을 이해해야 하기에 폭넓고 깊은 학문적 역량이 있어야 하는 반면, 

사람과 부대끼며 그들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그들을 세워야 하는 섬세하고 따뜻한 감성도 필요하다. 


어떤 점을 더욱 중요시하는가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품, 성향 등이 반영된다. 

하지만 환경과 상태와 무관하게 목회자에게 균형은 필수적 요소다.  


유진 H. 피터슨 (Eugene H. Peterson, 1932~ 2018)은 그런 점에서 매우 탁월한 교사다. 

그는 그의 학문적인 능력을 목회 환경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저서를 탐독하면서도, 

애니 딜러드(Annie Dillard, 1945~)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목회자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혹은 목회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옆에 두고 묵상해야 할 책이다.


유진 피터슨의 자서전인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과 

포이에마에서 기획한 '유진 피터슨 목회멘토링' 시리즈의 다른 책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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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회복의 방법입니다. 농부의 밭이 소진되면 그 밭은 안식년에 들어갔습니다.

‘사막’의 시간, 침묵과 고독과 기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목사로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피로나 게으름 때문에 일하는 시늉만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하면서 개인적으로 성령의 삶을 위해 분투하는 대신에 숙련된 매끄러움을 내세우는 것이지요.

주의 말씀과 주의 현존과 접하고, 제가 무슨 일을 하든―여러분을 예배로 인도하든, 성경을 가르치든, 여러분과 개인적으로 대화하고 기도하든,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집단으로 여러분과 만나든, 시와 기고문과 책을 쓰든―그 말씀과 현존으로부터 말하고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밋밋한 일과가 되어버리지 않으려면 긍휼과 창의성의 샘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모든 글은, 함께 예배하고 성경에 집중하고 우리 삶에서 성령의 현존을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이 믿음의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나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안식년을 목사와 회중 모두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공동 사업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챙길 줄 알았고, 나도 알아서 나를 챙길 거라 생각했다. 성숙이다.

목사와 시인이 공통으로 하는 일이 많다. 경외감으로 말을 사용하고,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에 잠기고, 흔한 것들에서 영광을 간파하고, 착각을 경고하고, 리듬과 의미와 정신의 미묘한 상호 연결에 주의한다.

목사도 말의 업계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말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한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기회에 특히 집중한다. 우리에게는 말을 정확하게, 잘 사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말이 더러는 부주의하게, 더러는 교활하게 사용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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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이미지 부분,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해야 하는 부분을 위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목사가 아닌데 목사 행세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공동체 안에서는 적당히 넘어갈 수 있고 종종 칭찬도 받지만, 자기 자신은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러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불만을 느낀다. 기분이 매우 안 좋다.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그 연기가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한 번씩 불쑥 올라오는 고뇌가 있다.

회중을 만족시키는 목사가 되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이다. 회중을 만족시키는 것에 우리가 만족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믿음의 모험에 삶을 걸기로 했다. 거룩한 삶에 헌신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깨달았고, 우리의 팔과 다리, 떡과 포도주, 뇌와 도구, 산과 강에 접속해서 그것들에 의미와 운명과 가치와 기쁨과 아름다움과 구원을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것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 실재를 말씀과 성례전으로 전하라는 부름에 응답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과 놀이에서 하는 일을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로 하시는 일과 연결시키고 조화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바쳤다.

전문직과 전문 기술은 직업과는 다르다.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는 의무가 있다

전문직과 전문 기술은 실재의 성질을 추구하거나 형성하는 일이며, 우리가 헌신한 대로 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히 우리에게 요구한 것을 할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유익을 얻으리라는 확신으로 하는 일이다.

목사에게는(불안을 해소해주거나 위로하거나 종교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목사들이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안수 받을 때 주어진 목회의 정의는, 그것이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 믿는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책임을 당신이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속해서 이 세상의 악과 우리 죄의 혼돈 위를 운행하시며 새로운 창조 세계와 새로운 피조물을 빚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계사의 잔해를 보고 신기해하고 놀라는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건, 우리가 관찰하기로 택하는 어떤 사건에서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 특히 잔해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찬양의 삶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재료임을 믿습니다.

믿음의 삶에 이것이 유일한 임무는 아니지만, 이것이 당신의 임무입니다. 다른 중요하고 본질적인 임무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말씀과 성례전만큼은 당신 것입니다.

이것은 한시적인 직업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서 살아낼 필요가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근본적 실재―하나님, 그 나라, 복음―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헛되고 공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임무는 계속해서 기본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령의 존재를 대변하고, 하나님이 우선순위임을 주장하고, 명령과 약속과 초대라는 성경적 언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기쁨의 우물을 팠고, 이제는 그 기쁨이 흘러넘쳐서 대화와 웃음의 자분정을 통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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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불타는 세상의 화염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그 불꽃을 키우는 기름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 P59

돌이켜 보니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 P59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 혼자만의 법정에서 유죄, 무죄를 따졌던 것이다. - P59

그렇다고 이제 나는 편안해졌다,고 감히 말하진 못한다. 다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분에 약하고 어떤 부분에 강한지, 무엇에 가슴 뛰고 무엇에 좌절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 P59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옳아서, 나만 억울한 것 같아서 소화장애를 겪던 시절에 아는 분이 적어 준 네 글자가 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 P59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이 네 글자에는 들끓는 감정을 한 단계 아래로 끌어내려 급냉장시키는 탁월한 기운이 담겨 있다. - P59

마음을 열자 바람을 탓하지 않는 나무처럼, 태양을 원망하지 않는 사막처럼 나는 둥굴어진다. 둥글게 나를 껴안고, 당신을 껴안는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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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도록 사람들을 강요한다면, 우리의 의제에 그들이 반응하도록 조작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주께서 그들 인생의 뒷마당에서 자라게 하시는 자그마한 은혜의 푸른 싹들을 인식하기도 힘들다.

잡담을 피하는 것은 우리가 일하라고 배정받은 현장 자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위기 상황이 아니며, 늘 중대한 문제에만 매달려 살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과에 매여 있으며, 잡담이 그들의 자연스런 언어이다

목사가 그것을 사소하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에 하는 일을 사소하게 보는 것이며, 복음을 잘못 대변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소박한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존재의 풍성한 현실 대부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도도한 교만을 경고했다.

목사들은 큰 진리와 자주 관계하기 때문에, 거대한 신비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특히나 대화의 겸손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겸손은 땅(‘후무스humus’)에, 사람에, 일상생활에, 실제적인 일들에 가까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중대한 문제만큼이나 평범한 것들을 존중하면서 대화에 집중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통찰들은 웃을 때에만 접할 수 있다. 또 어떤 것들은 간접적으로밖에 얻지 못한다.

여기에는 기술이 필요한데, 잘난 체하지 않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창의적으로 그 만남과 기회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우리가 맡은 직위의 존엄성이 거기에 달려 있는 양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한 기술은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회의와 대화에 ‘선행’하신다고 확신할 때에 더 잘 개발된다.

우리는 매주 시내 산 강단에 올라 "기교 있는 천둥"(에머슨의 표현이다)의 권위로 사람들을 설득하리라는 희망으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평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올 때에는 다른 기교가 필요하다. 바로 잡담의 기술이다.

신학적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것은 그를 위선적이거나 역겹거나 악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태도나 도덕성에 대한 일격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용서와 은혜가 가장 중요하다는 신학적 믿음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분개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그가 그들을 "자기 안에는 가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으로 보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과 힘과 연민과 기쁨이라는 신의 속성을 은밀히 부과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자기와 같은 죄인으로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슬픔과 결점, 고통과 실패를 그들과 나누려 할 것이고,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표시를 지켜볼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열렬히 찬양할 것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이해하면 분노 없이 목회할 수 있다.

(목사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분노 축적은 비실제적인, 즉 비신학적인 전제를 버려야 해결된다.

사람들이 죄인이라면, 목사들은 앉아서 사람들이 나쁘다며 슬퍼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왔다. 목회의 대화와 설교의 주요 주제는 은혜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생활이 양육되기를 바란다. 은혜는 지나쳐버리고,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은 목사에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내적 자원과 가능성을 믿으라고 고상하고 진지하게 말한다.

목사는 거기에 굴복하면 안 된다. 그 길을 막아야 한다. 사람을 죄인으로 이해하지 않는 순간, 목회 사역이 헌신한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진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신학적 이해의 행복한 결과는 그들이 사실상 죄인이라는 사실에 목사가 계속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죄인은 정죄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기대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것,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 표적을 벗어난 사람, 길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큰 기쁨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는 목회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 하신 위대한 행위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면, 그 다음에는 죄가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재빨리 얻어야 한다.

죄는 특정한 인간적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특정한 목사의 반응을 요구한다. 죄를 너무 추상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목사는 죄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목사는 구체적 자리와 구체적 사람의 세계로 들어간다.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개인의 인생이라는 시간의 경계와 그 사람의 주소라는 지리적 위치 내에서 가능하다는 기본 사실을 일상의 언어와 이미지로 확립하고자 한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신학적 이해를 갖추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죄가 개인의 역사에서 취하는 특정 형태를 목사가 찾기 전에는 사역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죄의 형태를 구분하고 구별하며,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기도하고, 증언하고, 대화하고, 각 교인의 얼굴에 적합하게 은혜를 설교할 때 목회 효과도 커진다.

목사는 모든 연령대의 교인에게서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좀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과거 교회에서는 적절한 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목사를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전문가의 역할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못한 것으로 돌아서서 종교적 체험을 만들어내고 그분은 회피한다. 그들은 진짜를 직면하기에는 자신들이 ‘부적절하다’고 변명한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미덕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며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우상숭배의 냄새가 나는 일이다.

목사가 부절적함을 불쾌한 감정으로 본다면 그는 심리적, 도덕적 수단을 사용해서 그것을 없애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죄의 징후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엄청난 임무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 계신지를 지적하며 친절하고 부드럽게 그 하나님을 제시할 것이다.

어떤 사람 안에 작용하는 은혜를 알아보는 목회적 분별력은 그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계속 접촉하게 해준다.

어떤 사람 안에 작용하는 은혜를 알아보는 목회적 분별력은 그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계속 접촉하게 해준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이웃 간의 상호의존을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아를 신처럼 취급해달라고 맞서서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언약적 삶에 기초가 확립되었고, 고대 중동(과 현대 서구!)의 문화적ㆍ경제적 개념과는 달리 그 기초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있는 신적 가치를 보호해주었다.

백성은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생명과 미래를 보장해줌으로써 여러 세대에 걸친 죄책감의 사슬을 풀어주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충성하는 인격적 관계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를 가진 공동체 안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유배 때문에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몸부림으로, 유산으로 받은 과거의 영적 소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들에서 성령께서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해결책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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