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니느웨처럼 크고 유명한 도시라면, 그곳의 영광과 화려한 신들의 광채가 시민들에게까지 미친다.

요나는 종교적인 니느웨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그들의 종교를 개선하거나 종교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전복’하고 그 종교의 유효성을 의심케 한 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면하도록 믿음으로 돕기 위해서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요나는 그들을 악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와 사악함을 고발하지 않았다. 요나는 그들의 미래를 문제시했다. 요나는 그들의 현재 지향적인 종교와 안전에 집착하는 현재에 종말론을 소개했다.

40일은 개인의 삶의 실재성을 시험하는, 진실성과 진정성을 검토하는 기간이다.

서른아홉 날의 하루하루는 40일째 되는 날의 실재에 적합해야 한다는 종말론적 압력을 받는다.

종말론적 피드백의 압력을 받으면서 그날들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한 자궁이 된다.

그날들은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의 훈련 장소가 된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대한 순종을 감지하는 분별력을 분명하게 갖추도록 해준다.

40이 제대로 작동하면 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그 40을 무시하면 인생은 파괴된다.

종말론이 없는 목회는 소비자적 만족과 종교적 만족에 성수를 뿌리며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을 위해 사제직을 수행할 뿐이다.

종말론이 없으면 끈은 느슨해지고,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거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고귀한 부름심의 상으로 당겨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니느웨에서 목회 소명을 지키기 위해 성경의 종말론을 보충 학습해야 하는 목사들에게 계시록은 필수이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세기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용하려면(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본다) 요한이 자신의 회중에게 했던 것처럼 종말론적으로 사는 목사들이 우리 회중에게 필요하다

계시록이 특별히 탁월한 이유는 목사의 위치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분별력 있고 진실하게 신앙을 살아내도록 도울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사람들을(종교적 대의에 따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존엄하게 대하고, 이 시대를(고통을 부인하거나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고, 복음을(하루를 헤쳐나가기 위한 ‘해결책’으로 축소시키지 않고) 대단한 상상력을 가지고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하는 상상력을 요한에게 맡겨, 예배하고 믿는 회중 안에서 개혁이 일어나게 하고,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시련과 평범화라는 전 지구적인 상황을 늘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목사들은 회중이라는 현장에서 정확하게 그 메시지를 살아내기 위해서 적절한 소명적 종말론을 시급하게 습득해야 한다

기독교적 ‘삶’이 속속들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잔인한 시련을 당하고 형편없이 하찮아진 세계 상황이 1세기 말의 교회 현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강할수록 우리가 종말론적 목사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리가 없는 종말론은 종교 과학 소설로 전락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충격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소망과 믿음은 무시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해서 이윤과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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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거룩한 땅인 회중 앞에 경의에 찬 외경심을 가지고 서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회중의 종교를 잘 분별하여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비판적 분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명석한 눈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회중은 다시 금송아지 숭배에 빠져버린다.

종말론은 우리가 굳은 흙을 부드럽게 하고 잡초를 뽑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목사에게 종말론은 농부의 쟁기와 써레, 괭이와 삽과 같다.(그러나 개발자의 불도저나 땅 고르는 기계는 아니다.)

우리는 이 표토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유지해야 한다. 비와 바람을 맞히고, 심고, 고르고, 가꾸고, 돌보고, 추수 때 일을 마친다. 완성telei?son이다.

목회는 종말론적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갔고 현장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것에 자신을 담갔다. 그러나 설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요나는 그 풍경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흥미롭게도 종말론적인 내용을 외쳤다.

진실하고 진정한 목회는 그 핵심까지 종말론적이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은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회 선언이다.

종말론은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영역이다. 미래는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졌느냐이다.

우리 언어에서 ‘끝end’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끝, 즉 종결이라는 뜻이 있고 목표, 즉 목적이라는 뜻이 있다. 이 두 의미는 깔끔하게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성경과 목회에 지배적인 것은 후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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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대한 이해는 또한 종교적 암을 영적 성장으로 오인하는 것을 막아준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경제 속에서 우리는 생각 없이 숫자의 관점에서 진보를 평가한다

우리는 성장이 산술적 은유가 아니라 생물학적 은유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생물학에서 성장은 시기, 수동성, 기다림, 비율, 성숙과 연관이 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크기가 있다. 비율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성장이라는 과정은 매우 복합적이고 신비롭다

모든 회중은 자신에게 알맞은 비율과 균형, 크기가 있다. 장소와 조건이 다른 회중은 비율과 크기도 다르다. 그 크기를 바깥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할 수 없지만, 지혜로운 목사라면 그 한계를 생각하고 존중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적절한 크기가 있다. … 넘어서는 안 되는 단위가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는데, 유명한 그리스어 ‘메덴 아간meden agan’은 도를 넘지 말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단위에 대한 감각, 말을 조심하고 자신의 경계를 아는 것에 대한 감각을 우리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의식할 때에만 강하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의 독수리에게 간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지금은 하늘의 독수리도 없고, 프로메테우스도 없다. 대신에 우리는 암에 걸린다. 암은 선진 문명의 주요 질병이다.

말을 조심하는 것, 즉 한계에 대한 건강한 존중은 목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대한 열정은 인간의 한계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강렬하게 활동하실 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해야 하고 말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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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를 미워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먼저 그의 존재 자체를 존경하지 않으면 결코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사람이 될 때까지 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성급함은 그를 아예 죽여버릴 것이다."

게다가 회중은 목사의 계몽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멍청이가 아니다. 잘난 체하는 태도는 적대적인 태도보다 더 나쁘다.

회중은 표토이다. 죽음을 흡수하고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에너지와 유기물로 부글거리는 표토이다.

그것을 대하는 유일하게 성경적인 자세는 외경심밖에 없다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때 목사들은 회중의 쉐키나 앞에서 신을 벗는다.

모든 교구가 다르다. 각 영혼이 다른 것보다 더 다르다. 교구는 영혼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효과가 있는 것을 이쪽에서 쓸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야심은 가득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불경하기 때문에 회중에 대해 불경하다.

삶이 더 지역적일수록 더 강력하고 다채롭고 풍성하다는 통찰로 이끈다. 거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는 경계이고 장소를 규정해준다. 어떤 것이 내 것인지를 알면 내 것이 아닌 것도 알고 그래서 이웃으로 살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우리의 임무가 된다.

우리가 교구에만, 우리 회중에만 머물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면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목사는 ‘행동’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도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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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를 미워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먼저 그의 존재 자체를 존경하지 않으면 결코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사람이 될 때까지 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성급함은 그를 아예 죽여버릴 것이다."

게다가 회중은 목사의 계몽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멍청이가 아니다. 잘난 체하는 태도는 적대적인 태도보다 더 나쁘다.

회중은 표토이다. 죽음을 흡수하고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에너지와 유기물로 부글거리는 표토이다.

그것을 대하는 유일하게 성경적인 자세는 외경심밖에 없다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때 목사들은 회중의 쉐키나 앞에서 신을 벗는다.

모든 교구가 다르다. 각 영혼이 다른 것보다 더 다르다. 교구는 영혼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효과가 있는 것을 이쪽에서 쓸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야심은 가득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불경하기 때문에 회중에 대해 불경하다.

삶이 더 지역적일수록 더 강력하고 다채롭고 풍성하다는 통찰로 이끈다. 거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는 경계이고 장소를 규정해준다. 어떤 것이 내 것인지를 알면 내 것이 아닌 것도 알고 그래서 이웃으로 살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우리의 임무가 된다.

우리가 교구에만, 우리 회중에만 머물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면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목사는 ‘행동’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도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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