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5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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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는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2008)의 대표작이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공산 정권 체제의 허상과 폭력성, 비합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은 굴라그 노동수용소의 참상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더불어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악함을 보여준다. 


반대로 최악의 환경과 상황에서도,

웃으며 만족하며 즐길 수 있는 인간의 존엄함도 보인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저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는 자신의 이야기이며, 동료의 이야기다.

억압받는 모두의 이야기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재 정권 하에 자행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가슴이 아프다. 심장이 뜨거워진다.


매우 간단히 언급되긴 하지만,

극동지방의 한국인들도 추방당했던 장면들이 나온다. 


6권의 책 중 1권이다. 

대서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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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목회자의 소명 유진 피터슨의 목회 멘토링 1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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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이야기꾼 유진 피터슨은 (Eugene H. Peterson, 1932 ~ 2018).  

를 통해 성경의 서사는 생동감 있게 변한다. 


평면적이었던 이야기는 입체적으로 바뀌고,

죽어있던 언어가 살아난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준다. 


이 이야기를 통해, 

목회자에게 필수적인 요소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적 지도자로서 목회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나?


조용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살아있는 이야기는 우리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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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알려주면서 우리는 교수가 되고 그들은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부지런히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예배하고 사랑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미 내 안과 내 주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실재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 뿐이다.

왜 내게는 선생과 돕는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내가 되어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저 함께 동료가 되어줄 겸손하고 지혜로운 친구는 그토록 적은 것일까?

자리를 정돈하고 방해물을 치우고 참 현존을 확인하고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

나를 중요하게 여겨주고 내게 여지를 주어서 자유와 은혜를 느끼며 크고 자비로운 무엇을 찾게 해주는 것. 그것이 영적 지도이다.

목회에서 영적 지도는 이야기에 대한 인식을 키워준다. 이야기는 그 사람 속에 파묻혀 있는 많은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언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워야 하고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교제를 진전시키는 말의 사용법이 있다.

우리의 최우선 임무, 목사의 최우선 임무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교제이다.

말이 선물로 주어진 것은 교제를 위해서이다.

교제란 내 자아의 일부가 상대방 자아의 일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숨은 것을 드러내는 위험이 요구되고 개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제의 핵심에는 희생이 있다

중심에서 일하는 우리는 어떤 것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교제는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보다 신비를 더 깊어지게 하고 모호함을 수용하고, 알기 때문에 안전한 곳을 지나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찬은 ‘이것은 내 살, 이것은 내 피’라고 하는 가장 간단한 말을 사용해서 우리를 깊은 사랑 한가운데에 던져 넣고 구속되지 않은 것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모험을 나서게 한다. 이 말은 설명하지 않는다. 드러내고 가리키고 다가간다.

진정한 영적 지도는 예배 행위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듣는 자와 믿는 자로서, 노래하는 자와 기도하는 자로서, 받는 자와 따르는 자로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질서 있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행위인 예배는 일상생활에서도 지속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성은 방해받기가 쉽다.

마가는 ‘가르’를 마지막 단어로 택했다. ‘가르’는 우리가 걸어가는 도중에 놔버림으로써 균형을 잃게 만든다. 다른 한쪽 발이 어딘가에는 내려와야 한다.

실재를 완전히 재배치시키는 새 생명의 침입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생명으로 우리 앞에 맞닥뜨려 우리가 영위하는 최소한의 생명을 의문시하게 만드는 새 생명의 침입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두려움에 차 숨을 곳을 찾아 허둥거리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경외에 찬 두려움으로 모험을 무릅쓰고 예배로 들어가게 할 것인가?

마가의 ‘가르’는 기술적인 침묵이다.

마가는 독자나 청자가 개인적 결론을 자유롭게 ‘쓰도록’ 스스로를 억제한다.

마가 이야기가 극적인 탄력을 얻은 이 시점은 결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요나의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둘 다 독자와 청자 외에는 그 누구도 마지막 단어를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너무 깊고 개인적이다.

요나의 마지막 말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 자신의 마지막 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뀐다. 무엇인가를 추측하는 의미에서의 궁금증이 아니라, 우리의 결말은 어떨까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흠모하는 의미에서의 궁금증이다.

이제 요나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이 바뀌어 소명을 거룩함의 불길로 정화시키고 단련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거대한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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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심장이 살아가는 동안 이 선(線)은 때로는 열광적인 악으로 짓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둠을 제거하는 선(善)에 공간을 내주면서 심장 위에서 이동을 계속한다. - P257

동일한 인간이라도 나이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어떨 때는 악마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성인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름만은 변하지 않고,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이름의 소행으로 돌리고 만다. - P257

인간은 악과 선 사이에서 일생 동안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동요한다. 그러나 악의 한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선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곳에 아직도 머물러 있을 수가 있다. - P258

그러나 악행의 밀도, 혹은 그 정도, 혹은 권력의 절대성에 의해서 일단 한계를 넘어서기만 하면 그는 이미 인류에게서 떠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쩌면 인류로의 복귀도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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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적으로 사는 삶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명은 잃을 수도 있고 왜곡되거나 연기될 수도 있다.

물고기 뱃속을 지난다고 해서 정체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요나는 소명적으로 살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탈락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일은 유서 깊고 성경적인 관습이다.

우리가 그 관습을 많이 행하는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건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가 논쟁하는 이유는 은혜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은혜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실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화는 가장 유용한 진단 도구이다. 우리 안에서 화가 터져 나올 때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이다.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악이나 무능함이나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화는 이웃의 잘못을 냄새 맡는 우리의 육감이다

진단 차원에서 화는 거의 오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믿는다. 확신을 수반하는 도덕적, 영적 강렬함이 화를 불러일으킨다

화가 날 때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걸 안다.

화는 잘못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 것인지 말해주지 못한다.

보통 우리는 잘못이 우리 밖에 있다고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요나가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다.

요나가 실망해서 뿌루퉁해진 것은 상상력의 실패, 마음의 실패 때문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구원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요나는 자신의 소명을 자기가 수행하는 일, 즉 제자리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으로 축소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대답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온다. 그런데 답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 답이 정확하다는 것을 안다. 일주일 걸려서 생각한 답보다 더 진실하다.

창조성은 깔끔하지 않다.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 창조적일 때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창조적일 때 우리가 하는 상당히 많은 일은 잘못된 것이다. 창조적일 때 우리는 효율적이지 않다.

모든 창조적인 일에는 위험, 실수, 부정 출발, 실패, 좌절, 난처함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엉망진창으로부터(우리가 거기에 충분히 오래 머물고 충분히 깊이 들어가면) 서서히 사랑이나 아름다움이나 평화가 부상한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다. 모든 회중에는(‘모든’을 강조하고 싶다) 창조가 일어난다.

진정한 창조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이고 감당치 못할 것이다.

목회는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일이다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성령의 교리가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제 삶에서 계속해서 만드시고 주신다.

창조성의 가마솥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회중을 질서정연하게 그리고 도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가난, 고통,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육 프로그램과 개혁 정책을 만든 톨스토이와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고난 속으로, 믿음과 의심의 신비로운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서 기적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찾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나 하나님을 희생시켜서 사람들을 선하고 편하게 만드는 미래와는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하늘과 땅,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가장 큰 것을 투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상력은 필수이다

상상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우리는 실재를 온전히, 그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실재에 작용하고 우리는 그 실재에 따라 산다."

잘 거론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주요 악은 상상력에 대한 조직적인 비하이다.

상상력은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 중 하나이다.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상상력은 우리를 예배와 경이로, 하나님의 신비로 몰아넣는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기독교 사역이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일 중 하나는 상상력을 회복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복음의 물질성(보고 듣고 만져진 예수님)은 복음의 영성(믿음, 소망, 사랑)만큼이나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정신적 도구이다.

영적 지도자로서 목사는 예수님의 성경적 사고방식(예배 지향, 종의 삶, 희생)의 영향을 받는다.

패러다임 전환은 더 많은 실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미 거기에 있던 훨씬 더 많은 실재에 우리가 부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패러다임 전환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더 이상 통제력를 행사하는 위치가 아니라 예배의 자리, 우리가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리는 흠모와 신비의 신성한 장소이다.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 메시아와 관리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영적 지도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람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그 전제조건은 뒤로 물러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조용히 흠모하는 눈이 열린다.

목사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흐릿해지고 잊힌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생각에서 빠져나갈 때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공동체 안에 배정된 사람이다.

목사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흐릿해지고 잊힌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생각에서 빠져나갈 때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공동체 안에 배정된 사람이다.

먼저, 알지 못할 것. 영적 지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경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기회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신앙 공동체의 핵심 사역이다.

부지런히 교리를 교수하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신비 앞에 여유롭게 멈추는 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돌보지 말 것. 영적 지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며 도울 기회가 아니다.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 거리 두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상대방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크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쓰는 방법은 우리가 참여하는 포괄적이고도 통합적인 하나님의 일과 연관해서이다. 분리되고 부분적인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면 오해가 생긴다.

목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복음의 응답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라는 중심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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