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정치는 우울증을 말하는 데 있어서 과학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가 우울증을 연구하고, 우울증과 관련하여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고, 누가 치료를 받고, 누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누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누가 보살핌을 받고, 무엇이 보상의 대상이 되고, 무엇이 무시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권력이다.
우울증은 계층을 초월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무슨 뜻인가 하면, 대부분의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계속해서 가난한 우울증 환자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우울증과 가난은 오래 방치될수록 그만큼 더 심각해진다.
우울증을 다루는 최신 과학은,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을 메아리처럼 따라하고 있다. 21세기의 과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보다는 훨씬 발전된 치료법들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근본 인식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철학자들 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우울증의 포스터 모델감이라고 할만하다. 절망에 저항하려고 애썼던 헤겔과는 달리 키에르케고르는 타협을 거부하고 모든 진실을 부조리한 최종점까지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서 묘한 위안을 얻었는데 그것은 고통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건강하지 못한 정신은 건강하지 못한 육체를 반영하며 모든 마음의 병은 육체의 기능 장애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