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일차적 분석은 나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즉 타인은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내가 메꾸어야 할 공허가 아니다.

나는 타인에게서 나에 대한 그 어떤 정당화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나의 행위 하나하나는 세계 속에 떨어지면서 타인에게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준다. 이 행위들을 나는 책임져야 한다.

우리가 세계 속에 출현시키는 이 새로운 충만성은 곧 인간의 자유이다. 그 충만성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유이다.

모든 부름, 모든 요구는 타인의 자유에서 나온다. 내가 만들어 낸 대상이 유익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타인이 그것을 유익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어떤 형상形狀이 주어지기 전에 타인의 눈目 속에서 나를 찾는다면, 그러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다. 내가 하나의 형태, 하나의 존재를 취하는 것은 사랑 또는 행동을 통해 우선 나 자신을 세계 속에 던졌을 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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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의 행복이다.

타인 앞에 있는 나의 상황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다. 단지 여기서부터만 우리는 우리 행위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타인과 분리되어 있고, 타인을 초월하며, 타인이 내 앞에서 한갓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용히 긍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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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임무와 가능성은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을 새로운 형식의 담화로 드러내는 것이다.

주일 오전의 교회는, 자신만의 색다른 담화에 빠져 있을 때조차도, 상상력 넘치는 담화로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들여보내 기쁨 넘치는 생활과 순종하는 생활에 참여하게 하는 곳, 즉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심하게 축소된 진리를 쟁점으로 거론하려면 산문의 세계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비할 데 없이 유용한 최선의 것으로서 ‘소설’이 내게 주어진다. 그것은 내가 의지해야 하는 소설, 내가 목숨을 거는 소설이며, 하나님이 저술하신 은혜로운 ‘소설’이다. 하나님은 성경 본문과 이야기를 저술하시는 분이다.

말씀이 다시 한번 다가오면 우리는 우리 생의 따분하고 지겨운 나날을 거쳐 다시 부활절로 돌아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의혹에 빠지고, 그런 다음 의혹을 넘어 우리의 생에 놀라며 두려움과 전율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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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간 곳은 러시아 북극해에 뚫은 12.23킬로미터짜리 콜라Kola 시추공인데, 그래봐야 지구 중심부까지 거리의 0.5퍼센트도 안 된다. 땅 아래 세상은 분명 우리 발밑에 펼쳐져 있지만,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유령 같은 풍경이다.

우리가 발밑에 있는 공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저 아래 펼쳐진 세상을 몸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지하세계에 있는 터널과 동굴 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현실을 이루고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힘에 우리의 파장을 맞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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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한 관대성이 우리의 행위를 안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새로운 출발점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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