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써야 한다. 들으면 전해야 한다. 공부도, 학습도, 지성도 최종심급은 글쓰기다. 다른 무엇일 수 없다.

읽기가 타자의 언어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그 접속에서 창조적 변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접속과 변용은 연결이면서 또 도약이다. 남이 걷는 길이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워도 내가 걷는 단 한 걸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등등. 이것은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질문과 호기심과 앎의 욕구는 결국 언어의 회로, 문자의 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주친다는 게 거창한 문제의식이나 목표설정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정말 느닷없이, 우연히, 주어진 시공간적인 조건 안에서 자기의 의식, 무의식을 포함한 어떤 내적인 힘이 한 권의 책과 마주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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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특징을 놓고 보자면, 중세인은 몽상가도 방랑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직가, 편찬가,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영원eternity운 영속성이나 시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과 분명히 구분됩니다. 영속성perpetuity은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끝없이 구현되고 곧장 상실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영원은 무한의 삶이 시간을 초월하여 실제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시간은 설령 끝없이 이어진다 해도 영원히 간직한 풍요로움의 이미지이자 패러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근대 과학의 근본 개념은 지금도 또는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자연 ‘법칙‘개념이엇고, 모든 사건은 그에 ‘순종‘하여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중세 과학의 근본 개념은 물질 그 자체에 내재하는 특정한 공감, 반감, 추구의 개념이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장소, 고향, 맞는 지역이 있고, 강제로 붙잡아두지 않는 한 모종의 귀소본능에 의해 그리로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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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생각해서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말투 하나만으로 단번에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에 가벼운 대화여도 주위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주는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반격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뿐, 자신의 ‘이득’은 전혀 없다.

이야기의 포인트를 전부 상대방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해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말하여 듣는 사람을 순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결국 대다수가 내 부탁이나 주장에 따르게 된다.

대화의 비결은 어쨌거나 짧게,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아주 짧게, 딱 부러지듯 단정을 짓는 것이다. 말을 조금 길게 하고 싶을 때도 앞에 먼저 결론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뒤에 자기 발언의 근거나 보충의 말을 덧붙이면 된다.

상대방을 긴장시켜서 심리적으로 유리한 포지션에 서려면 "내 앞에서는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일부러 말을 건넨다.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다 혹은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노력하는 데 그치지 말고 눈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과장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연령이 있다면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것이 좋다. 모르는 이야기가 나와도 알고 있지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질문한다는 뉘앙스를 풍겨야 한다.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 딱딱한 이야기를 해봤자 당연히 무시당하게 된다. 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내용에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나 체험담을 포함하는 편이 좋다.

사전에 준비만 하면 어떠한 말을 듣더라도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듯 순순히 받아넘길 수 있다. 면접 등을 순발력으로 대처하겠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태도다.

"나는 말하는 게 서툴다"고 공언할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려 한층 더 노력할 것이고, 그 결과 대화와 소통에서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알고 있으면 그에 적응하며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적다.

비유를 사용하면 이해가 쏙쏙 되고 기억에도 잘 남는다. 더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려면 비유 중에서도 은유를 사용하면 좋다.

가치 있는 정보란,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가리키는 것이다. 관계의 우위에 서려면 상대방이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한두 개쯤 꼭 보유해두자.

한 분야에 ‘강한 한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이 있으면, 다른 분야에 관해서 전혀 무지하더라도 주위로부터 만만한 평가를 받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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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이 온전한 의미를 채우며 만들어내는 독학의 영역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모든 형태의 ‘배움’이 제도교육으로 빨려드는 시대의 이상 열기 속에서 그가 ‘배움’ 자체의 의미 영역을 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이 명실상부한 독학자인 것은 그가 지칠 줄 모르는 탐독가여서가 아니다. 독서가 배움을 둘러싼 ‘왜 무엇’의 답안을 곧바로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활자에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읽기의 대상과 배움의 영역을 삶의 한 복판에 선 사람들로 재설정해갔다. 그 과정에서 좁은 내면에 갇혀 있던 인식이 거듭된 성찰을 통해 끝내 이 땅의 현실에 가닿게 하는 것, 그것이 독서이며 공부이고 배움임을 보여주었다.

신불출은 기성의 체제와 평가에 스스로를 기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착된 틀을 깨야 한다고 외치며 더 나은 가능성들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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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읽지는 않고 쓰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읽었으니 쓰고, 쓰려면 읽어야 한다.

생명을 조존하려면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알아야 한다. 갓난 아기처럼 호흡하는 것,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도다. 그 도를 터득하려면 알아야 한다. 길흉을 알고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 시점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 몇 권을 읽느냐‘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아니다. 책이 본디 무엇이었는지, 책과 문명, 책과 인생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깊이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되리라.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책과의 만남보다 더 신성한 순간은 없다는 것을.

현대인은 참으로 유능하지만 아주 심각하게 무능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휴식이다. 휴식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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