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환경에는 성숙한 예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예술가가 진지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일을 방해하는 세 가지 주요 장벽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장벽은 어쩌면 예술을 넘어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칠는지 모릅니다.

첫 번째는 딜레탕티슴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딜레탕티슴이란 의당 진지하게 임해야 할 분야에 그 분야나 학문 또는 실천이 요구하는 최저 수준을 충족할 만큼의 자질도 갖추지 못한(게다가 실상 충족하기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진지함 없이 조금 손을 대 보는 것을 뜻합니다.

다양한 학문을 접한다는 것은 곧 적어도 그중 일부는 전문적인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예술의 발전과 대학 공동체에 속한 예술가의 성공적 활약을 가로막는 두 번째 주요 장벽은 창의성 자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대학은 지식의 비평적 측면, 즉 조사하기, 분류하기, 분석하기, 기억하기를 더 강조합니다. 이러한 지식을 다시 살아 있는 예술로, 독창적인 작품으로 변환하는 일은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학문은 아마도 인간의 가장 보람된 직업이겠지만, 그 창의적 원천이 말라붙은 학문은 결국에 불합리로 귀착하는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맙니다.

대학 안에서 예술가가 성공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 번째 주요 장벽은 예술가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다소 낭만적인 오해입니다. 여전히 최면에 걸려 있는 근엄한 학계 사람은 예술가를 괴짜 천재로 간주합니다.

제가 보기에 대학은 ‘천재‘를 일반인과 구별하는 곳이 아니라 그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가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이 제공하는 폭넓은 시야와 지적인 훈련, 지식의 내용이 사실상 비생산적인 인간, 즉 창의성이 없고 뛰어나지 못한 사람의 몫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그림에는 많은 요소가 더 있게 마련입니다. 수정하고 추진하고 억제하는 여러 다른 요인이 다 함께 작용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지요.

화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그리든 그것을 나타내 보이려 한다면 끊임없는 재검토와 해체가 필요하며, 새로운 태도나 발견에 비추어 부단히 재조합해야만 한다는 것이 불편하고도 자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그림에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곡해없이 담아내기로 입장을 정한 화가라면 항상 그 생각 자체에 각별히 촉각을 곤두세워야 해요.

사람이든 예술이든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개별적인 특수성이었죠.

사람이 다친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는 그가 일반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개인만이 상상과 발명과 창조를 할 수 있어요.

예술 관객 전체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각 개인은 모든 계층을 초월하고 모든 예측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독특성을 확인받습니다.

물론 사람은 광범위한 차원의 불의에 비통해하기도 하고, 사회 전체가 더 나아지기를 열렬히 바라면서 그런 사회를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떤 사회든 그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이 곧 개인의 집합이며 각각의 개인이 희망과 꿈을 느끼고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성격은 그 사회가 가진 위대한 창작품에 의해 많은 부분이 형성되고 통합된다고, 사회는 그 사회의 서사를 토대로 만들어지며 그 사회의 창작물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고 믿어요.

화가는 숱한 수용과 거부의 과정에서 동력을 얻어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갑니다. 자기 작품뿐 아니라 고금의 다른 작품에 대한 수용과 거부도 여기에 포함되죠. 화가는 그런 모든 경향을 주시해야 합니다.

주관과 객관은 이미지와 아이디어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으며 저에게는 똑같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예술가의 도전 과제는 예술에서 주관과 객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결합해 하나의 인상을, 의미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으로 녹아든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술에서 광대한 보편성을 지니는 상징은 아마도 의식의 가장 외지고 내밀한 구석에서 끌어낸 어떤 형상일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고유하고 주체적이며 가장 완전히 깨어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표면에 색깔이 있는 형체를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화가는 자기 앞에 나타나는 느낌, 질감, 빛, 관계 등에 극도로 민감해야 합니다.

그림 그리기는 창작 행위인 동시에 반응 행위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화가와 그림의 친밀한 소통 과정이자 밀고 당기는 대화이며, 그림은 화가로부터 형상과 형태를 부여받는 순간에도 화가에게 할 말을 합니다.

형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겨납니다. 자연에서 형태는 질서가 질서에, 요소가 요소에 미치는 효과에서 발생합니다. 번개의 형태나 파도의 형태가 그 예죠.

예술의 형태는 아이디어가 재료에 미치는 효과 또는 정신이 재료에 가하는 작용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아이디어를 형상화하고 실체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에서 나와요.

그렇게 해서 인간은 정신에서 툭하면 이탈하는 의미를 붙잡아 두고, 생각과 신념과 태도를 실재하는 사물로서 지속시키려 합니다.

비순응성은 훌륭한 사고의 전제 조건이며, 따라서 한 국민이 성장과 위대함을 성취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기본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회에 어느 정도의 비순응성이 존재하느냐 그리고 용인되느냐는 그 사회의 건강 상태를 말해 주는 징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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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예술 그 자체에 이른바 자연스러운 환경이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예술과 예술가가 존재하는 일반 사회의 분위기는 예술가라는 직업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예술가는 일종의 자기방어와 자기긍정이 가능한 작은 사회 속에 머물죠.

그런 예술인 사회에는 예술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접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의 사회에서 물러나 흡사 수도승처럼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예술 작품은 갈수록 안으로 향하고, 보편적인 경험의 생생한 흐름을 점차 따라가지 못하며, 지난날 예술을 위한 추진력과 영감이 되었던 인간으로서의 책무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예술이 현실에 뿌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이 생명의 토양을 긍정할 수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예술에 자극을 제공하는 것은 때마침 공교롭게도 존재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삶이란 삶의 어떤 특수한 갈래나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가 삶에서 자신의 성미에 맞는 재료를 발견하는 상황이 곧 예술을 위한 적절한 상황입니다.

예술이 발생하는 원천은 자극이나 심지어 영감보다 더 강렬한 어떤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은 차라리 도발에 가까운 어떤 것에서 불붙는지도 모른다고, 단지 삶에 의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삶에 의해 강제되는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예술은 거의 언제나 건방진 구석이 있고 기성의 권위를 경멸합니다. 따라서 예술 그 자체의 권위와 번영마저 갈아 치울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혹은 누구든) 그처럼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것은 오직 현실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냉엄한 현실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선택은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선택에는 어느 정도의 신념과 헌신이 따릅니다. 또한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을, 예술을 추동하는 힘이 수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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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의 가정 - 하나님과 동행하는
러셀 무어 지음, 김주성 옮김 / 두란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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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무어(Russell Moore)는 작년 『왜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 없는가』(복있는사람)를 통해 알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쉬운 문체, 적절하고 구체적인 적용 등이 기억에 남는 작가였다. 


『폭풍 속의 가정』은 제목에서 보여지듯 '가정'에 대한 책이다. '폭풍 속의 가정' 앞에 '하나님과 동행하는'이 붙어 있으니,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가정에 대해 접근해보겠다는 의중을 눈치챌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을 '폭풍 속'에 있다고 표현함으로 현실적 가정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 시각으로 드러내보이겠다는 목표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에 대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은연중에(현실은 어떻든) 행복하고 온전한 가정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런 가정에 대한 이상과 더불어 압박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듯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가정에 혼재해있고, 관계의 불협화음들이 내재해있으며, 늘 긴장가운데 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가정의 문제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저자는 이러한 가정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성경적 가정이 완벽한 모습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이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가정은 기쁨의 원천이지만 동일하게 아픔과 고통의 근원임을 인정해야한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가운데서 저자는 십자가를 통해 가정을 보기를 권면한다. 기쁨과 고통의 접점, 가장 크나큰 아픔과 사랑이 겹쳐 있는 그 곳. 바로 그 십자가로 가정을 초대한다. 그리하여 가정이 꾸준히 성화를 이루어가는 장이며, 그러한 과정 가운데서 더 큰 기쁨과 충만함,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대원칙 가운데서도 소소하고 실제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남성성과 여성성, 성, 이혼, 훈육, 가정 안의 상처, 노년의 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 등 가정에서 일어나고 접할 수 있는 다양하면서도 구체적 사안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미국의 문화와 가치관 등이 다수 있어 아쉬움이 있지만, 큰 원리 안에서 우리의 문화와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며 적용할 수 있을지를 비판적으로 독해해본다면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방법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막 8:35). 이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되찾는 길은 우리의 가족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 P93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가족의 복리를 더 잘 추구할 수 있다. 우리가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자유를 얻게 되어 가족을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해 움켜잡고 숨 막히게 하던 것을 놓게 되면, 그것이 현재의 가족에 대한 기대이든, 오래 전 가족에 대한 향수든, 가족 안의 상처에 대한 흔적이든, 미래의 가족에 대한 걱정이든, 자유로운 가족이 되어, 교회 가족이라는 새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 P95

결혼식이 종종 긴장감으로 가득 찬 것은 그것이 너무 이상화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의 인생의 틀이 되는 완벽한 하루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그렇게 이상화하게 되면 비단 결혼하는 사람뿐 아니라 미혼인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결혼하지 않은 삶으로 부르신 사람들도 때로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샘낼 수 있다. - P155

훈육은 곧 제자 훈련이다.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하고, 그들의 미래에 필요할 애정이나 직관,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세대를 훈련시킨다. - P318

양육과 훈육은 그런 것이다. 최종 목표는 아이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행동이 올바른 사람이 지옥에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재 가장 힘 있는 사람 앞에 굴복하는 법을 배운다면, 이 시대에 강해 보이는 마귀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회개 없이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를 이루지 못한다. - P346

가족은 복음이 아니다. 만일 가족이 삶의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길 바랄 것이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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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방법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막 8:35). 이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되찾는 길은 우리의 가족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가족의 복리를 더 잘 추구할 수 있다.

결혼식이 종종 긴장감으로 가득 찬 것은 그것이 너무 이상화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의 인생의 틀이 되는 완벽한 하루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그렇게 이상화하게 되면 비단 결혼하는 사람뿐 아니라 미혼인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결혼하지 않은 삶으로 부르신 사람들도 때로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샘낼 수 있다.

훈육은 곧 제자 훈련이다.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하고, 그들의 미래에 필요할 애정이나 직관,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세대를 훈련시킨다.

우리가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자유를 얻게 되어 가족을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해 움켜잡고 숨 막히게 하던 것을 놓게 되면, 그것이 현재의 가족에 대한 기대이든, 오래 전 가족에 대한 향수든, 가족 안의 상처에 대한 흔적이든, 미래의 가족에 대한 걱정이든, 자유로운 가족이 되어, 교회 가족이라는 새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양육과 훈육은 그런 것이다. 최종 목표는 아이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행동이 올바른 사람이 지옥에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재 가장 힘 있는 사람 앞에 굴복하는 법을 배운다면, 이 시대에 강해 보이는 마귀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회개 없이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를 이루지 못한다.

훈육의 핵심은 행동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회개를 배우는 것이다.

가족은 복음이 아니다. 만일 가족이 삶의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길 바랄 것이다.

만약 가족을 부드럽게 붙잡는다면, 가족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가족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악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게 한다.

십자가에서 짐이 축복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가족을 짐으로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채워 주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 앞에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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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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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독자는 자신의 관점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하고 통합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도의 관점에서 사회학적 방법론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대하여 조금 더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책은 『구별짓기』라는 책으로 국내에 이미 많이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아날학파의 4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의 권위자인 '로제 샤르티에'의 대담집이다. 


다른 학문분과와의 대화는 보통 각 분과의 전문적 용어 사용이나 연구방법론의 차이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자신의 학문 이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없다면, 의미있는 대화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어려움을 너끈히 뛰어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학문에 더욱 풍성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미 두 사람은 오랜 친분 관계와 더불어 서로의 학문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심도있고 유의미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을 통해 부르디외의 사회학과 그의 연구 방법론, 역사학과의 차이와 유사점, 그의 학문에 대한 태도 등을 가감없이 볼 수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의 대담이니만큼 그의 저작들에 비해 최대한 쉬운 언어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기에 그의 풍부하지만 다소 난해한 지적 담론들을 간명하게 볼 수 있는 최고의 입문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외견상 그런 고통을 초래한 사람[사회학자]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전가하는 것이죠. - P26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있고 우리가 다투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 P28

막스 베버에 따르면, 예언자란 삶과 죽음 따위의 총체적 질문에 총체적으로 답하는 인간입니다. 사르트르가 구현한 철학자는 바로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 그러니깐 존재, 삶, 정치 등 온갖 문제에 포괄적으로 답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총체적 역할에 조금은 눌려 있었고 조금은 지치기도 했어요. 그런 탓에 우리 세대는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멀어진 것이죠. 그를 닮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P29

적어도 사회과학은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일상의 사회세계에서 제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제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론계나 평론계, 또는 사이비 과학계에서 제기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입니다. - P31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P36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 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 P39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49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철학자들은 크게 화를 내겠죠.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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