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바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바쁜 날에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시험도 없고 자격증을 딸 일도 없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지켜 주는 내 안의 수호천사는 교과서에도 안 나오고 문제집에도 없는, 그렇게 평생 답이 없는 인문학이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세상 모든 것과 목마른 대화를 꿈꾸는 ‘공부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매순간 지켜 주고 채찍질하고 때로는 어깨를 토닥여 주기에, 나는 아직도 ‘나 자신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으로 가는 길이 바로 저 멀리 뒤돌아 앉은 당신을 향해 가는 길임을, 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나에게 공부란 주어진 아픔을 견디는 수동적인 무기가 아니라 현실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무기입니다.

저는 공부할 권리를 지킴으로써 끝내 행복할 권리를, 더 깊이 세상을 사랑할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공부란 나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이 차가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현실을 바꾸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당신의 상상을 바꾸면 됩니다. 당신의 생각, 의식, 감정을 바꾸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당신의 무의식과 대화해야 합니다.

밤에 꾸는 꿈, 낮에 꾸는 백일몽, 억눌린 모든 감정,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모든 상처들과 대화를 시작해 봅니다.

난 안 될 거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는 나쁜 상상과 싸워야 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을 향해 지금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을 알려 줄 것입니다. 무의식은 ‘내가 아는 나‘보다 훨씬 총명하고 지혜롭고 관대하니까요.

『신데렐라』는 내게 없는 보물이나 생명수를 찾아 멀리 떠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잿더미에 파묻혀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나의 진짜 운명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역경을 딛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꿈을 되찾는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만이 진짜 끝이라고. 그 끝을 선택하는 결정권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헥토로의 용기는 자꾸만 내 삶은 무엇인가, 내 용기는 왜 이토록 작고 보잘것없는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타인의 삶에 영감을 주는 용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따라 하기 어려운 용기임과 동시에 우리가 진심으로 배우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용기입니다.

헥토르의 용기는 무엇을 갖거나 정복하기 위한 용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기를 냄으로써 명예나 체면이나 지위나 영토를 얻을 수 잇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용기를 냄으로써 그저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용기입니다.

헥토르의 용기는 신들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용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눈부신 용기입니다.

강한 자가 자신의 힘을 굳건하게 믿고 내는 용기가 아니라, 약한 자가 자신이 가진 줄도 몰랐던 숨은 힘을 모두 끌어내 마침내 스스로 최후까지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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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은 내게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하고 싶은 일‘과 ‘보상이 좋더라도 하지 않으면 더 좋은 일‘을 구분할 지혜를 주었다.

중년은 노년의 앞 페이지에 살짝 끼워진 부록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지혜롭게 삶을 바꿀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청년처럼 다급하지 않게, 노년처럼 마음과 몸의 거리가 너무 많이 멀어지지 않게. 결코 내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겐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눈물과 흐느낌을 담아낼 마음속 비밀의 화원이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노래를 불러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정원을 가꾸어도 좋다. 마음속 비밀의 화원을 가꿀 용기의 씨앗이 싹트는 곳에서 우리의 찬란한 마흔은 꽃필 터이니.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력은 부지런히 갈고닦되 내 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아마추어처럼 순수해야 한다. 아마추어의 본질은 ‘미숙함‘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다. 최고의 장인처럼 일하고, 처음 일터에 나가는 신입사원처럼 해맑은 ‘첫 마음‘으로 내 일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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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지금까지 내게 사랑의 본질은 감정의 영역에 국한되었던건지 모른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등의 조용한 감정들・・・・・・ 그러나 사랑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정신이고 그럴 때 정신은 행동한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하강. 그러나 생은 쌍곡선 운동이다. 어딘가에서 하강할 때 또 어딘가에서는 상승한다. 변곡점이 곧 다가오리라. 거기서 나는 새의 날개가 되어 기쁨의 바람을 타고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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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계시되고 인간의 삶 가운데 체험된 인격적 존재이다.

곧 그분은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불의와 정의, 전쟁과 평화,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고 혼재된 우리들의 삶 속에 나타나시어, 목마르고 상처받은 영혼의 귓가에 속삭여주시며 정의와 평화와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는 이신론의 틀에 갇혀 원리와 법칙과 이성으로서 계측되는 하나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우주에는 중력Graviational Force,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 강력Strong Force, 약력Weak Force이라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연 우리 인류의 기술문명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앞으로 1천년 혹은 1만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문명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핵전쟁이나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나 신종 바이러스, 소행성의 충돌이나 지질학적 격변 등이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요인들이다.

인류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인간에 의한 요인이 더 많다. 또 자연적인 위협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려면 인류의 선한 의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인간이 성취한 놀라운 과학기술은 한편으로는 문명의 이로운 도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공할 파괴력을 행사한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지의 기간 여부는 이런 지적 생명체가 상당한 수준의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존속 기간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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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함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쉐키나(임재)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을 가를 수 없다. 그러나 제도화된 종교는 거룩을 권력으로 치환하곤 한다. 그들은 가르고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들의 특권을 강화한다.

예수님은 ‘거룩함‘이라는 척도가 지배하는 유대교 사회적 세계에 새로운 척도를 제시했다. ‘자비‘가 그것이다.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 타자의 약점까지도 품어 안으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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