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라를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아들 예수를 통해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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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이면 자기 시간을 오롯에 살아낼 수 있을까? 하루를 여원에 잇댈 때이다. 하나님이 품고 계신 역사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수용할 때 우리는 영원의 한 부분이 된다. 영생이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된 시간 경험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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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철학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던 ‘환대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hospitality)는 초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초대가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나와 친한 사람을 계획적으로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이라면, 환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람의 방문을 기꺼이 아무 준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실천한 우정은 특정한 얼굴이 떠오르는 ‘친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낯선 사람‘을 향해 작동하는 커다란 사랑(charity)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이기심은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심리적 무기이지만, 때로는 자아의 확장을 가로막는 강력한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정의란 누군가가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다시 창조해야 하는 열린 개념‘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감의 밑바탕에는 항상 타인을 향한 사랑, 나 자신을 향한 믿음,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아‘를 놓는 순간,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놓아 버리는 순간에 다른 존재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집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교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합니다.

내 아픔과 상처와 슬픔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 당신의 상처,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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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대상은 ‘바깥’에서만 구하지 말고 우리 마음속에서 찾을 때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혼자 있음을 자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어떤 소문과 세파 속에서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나가 아닌 ‘진정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인입니다.

강한 것들이 자신의 힘으로 약한 자를 찍어 누르려 한다면, 약한 것들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유연하게 험난한 세계의 광풍을 견딥니다.

강한 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려 한다면, 약한 자들은 자신이 가진 힘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작은 힘으로 지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직조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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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왠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지요.

슬픔 따윈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 세련된 인간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에 저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슬픔은 숨겨야 할 금기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라 믿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절제하는 것과 슬픔 자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저기서 힐링 열풍이 거센 요즘, 이 요란한 힐링 열풍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스며 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요?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닐까요? 아픈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한 조바심,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믿는 조급증, 아픔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전에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퇴치하려는 성급한 통제의 욕망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통증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분명 우리에게 어떤 절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통증의 메시지를 우선 가만히 들어 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위기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명징하게 깨닫습니다. 어떤 영광도 인기도 명예도 재산도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큼 소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바꾸기 어려운 외부의 상황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의 실천을 모색하는 것.

이렇듯 나로부터 시작되는 자발적 윤리가 구원의 희망이 됩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신경 쓰느라 진정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을 등한시하는 문화는 결코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지요.

때로는 슬픔 속으로 온몸을 던져 슬픔과 사투를 벌여 마침내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정의는 어느 날 갑자기 이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와의 끊임없는 결투를 통해서만 정의로움의 감각은 단단히 담금질 됩니다.

정의감은 정의와는 다릅니다. 정의감이 있어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불의에 타협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지요.

정의감을 간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때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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