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는 하나님에게 순종한 예수의 삶,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수치스럽지만 하나님에 의해 가치관이 달라진 사람들은 고귀하게 여긴 그 삶과 죽음을 부각시킨다.

제사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언약을 인준하는 동시에 목숨까지 내놓으신 예수의 온전한 순종을 언약 백성의 본으로 내세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죽음과 그 효력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믿는 자들이 그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최후 심판이 남아 있더라도 지금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즉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현재와 미래이듯이 신자의 회복의 때도 현재와 미래다(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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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분의 가장 기본적인 성품이며, 생명을 구하고 존속시키는 행위에서 풍성하게 흘러 넘친다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로부터 일련의 중요한 단언들이 나타난다.

또 주님이 금송아지 사건의 여파 직후에 스스로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성실‘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신 점도 중요하다(출 32장).

사람이 거부할 때조차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의 행동이나 다짐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사람의 계산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은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욘 4:2, 11, 눅 6:35-36 참고).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고, 하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라는 자비로운 사건에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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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주님은 그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스바냐 3:12)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들에게도 시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시련은 더 큰 희망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법.

심판의 불길을 통과하는 동안 그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에 미혹되지 않고, 오만에 빠지지 않는 단련된 인격을 얻게 된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련의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고 즐거이 외쳐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힘없이 팔을 내려뜨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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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 희생당한 이들과 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울부짖는 예수의 울부짖음은 이 세상에서 고통당한 무고한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고문하고 고통 속에 죽게 한 자들의 울부짖음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꺼림칙한 광경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는 십자가가 그토록 과격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고한 자들이 당한 고통만이 아니라 고통을 가한 자들의 사악함까지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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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지극한 시대에는 희미해 보이는 빛조차 소중한 법이다. 작은 차이 때문에 피차 갈라서는 순간 고통은 영속화된다. 작은 차이는 남겨두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지혜와 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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