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항상 비교의 작업이다.

우리가 자신과 타자 간의 비교를 멈출 때, 모든 것이 자명해 보이는 폐쇄된 시스템 안에서 움직일 때, 우리와 다른 사고 및 생활방식에 자신을 개방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곧바로 무지의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울러 비교의 대상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체를 바꾸기를 꺼릴 때 우리는 건전하고 통찰력 있는 비교작업을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혹은 다른 종교간의 비교가 열매를 맺으려면 비교하는 사항들을 모두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제2성전의 건립은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종교에서 새로운 시작이었다.

제2성전기의 시작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바로 직전의 기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이 기원후 70년에 제2성전을 파괴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성전의 상실만이 아닌, 유대인의 삶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제2이사야가 기대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넘어서는 보편적 구원이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본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관념은 제2이사야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인 유일실론과 맞닿아 있다. 제2이사야의 유일신론은 명쾌하고 강력하다. 그것은 제2성전기와 그 이후의 신학을 지배하는 명제 즉 세상에는 단 한 분 하나님, 창조주이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그분만이 계신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관련하여 헤세드(hesed)와 에메트(emet)라는 두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헤세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말한다.

"한결같은 사랑"이나 "친절한 인애"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유익을 나타낸다.

에메트는 "신실함"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약속한 것을 이루시는 분임을 표현한다.

따라서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고 믿음직한 분이시다.

족장들이 만난 하나님은 "엘 샤다이"(El Shaddai)나 "엘 엘룐"(El Elyon)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예. 창 14:20; 17:1; 35:11).

이것은 그들이 각 족장의 시대마다 부족의 신을 섬기다가 족장들의 시대가 다 흘러간 후에야 그 신들이 한 하나님 야웨의 현현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족장들의 이야기는 본래 독립된 전승들이었다가 후대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한 가문의 세대들을 연결하는 내러티브로 합쳐진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자기 이해 및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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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므로 반드시 학습을 해야 한다.

인간은 여타의 생물과는 다르게, 학습한 것을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않고 공동체 활동을 통해 나누며 그것을 세대를 이어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도구가 사용되는데, 문자로 이루어진(더러는 이미지가 포함된) 책은 가장 널리 이용되는 매체이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책읽기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머리 속에 지식을 입력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논지가 자신의 생각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것처럼 구사되고 활용될 수 있다는 것, 즉 자기화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책읽기를 자기화할 수 있게 잘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하고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은 후 책을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설명을 할 수는 없으니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이것은 서평 쓰기로 이어진다.

서평을 쓰고 난 후에는 자신이 쓴 서평을 자신이 다시 읽음으로써, 적어도 그렇게 쓴 것만큼은 자기화할 수 있다.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지적인 책읽기가 한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빠르게 소진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 탐구의 궁극 목적인 진리-그런 것이 있다면-에 이르는 가장 명시적인 방법은 지속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책읽기 뿐이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책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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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말하는 신은 역사 안으로 침투하여 들어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한 철학의 신은 자신을 나Ich로서 지칭하시며, 그리고 이런 나로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너Du로서 존재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사유를 통해 형성된 신은 인간의 사유를 통해 도출된 하나의 사유대상일 뿐이지요.

이는 지식을 위한 운동이며,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운동과 자발성이 여기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고안해낸 정신의 일부이지, 결코 하나님의 일부에 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닌 사유능력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은 전혀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이 지닌 사유의 능력 밖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과 운동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사유 능력의 범위를 깨뜨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상이 만들어낸 신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고안된 신일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결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정하여야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다스리는 하나님이며,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영광이 돌아가도록 두지 않으시며, 오직 당신 한 분만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성서의 주요 동기Haupmotiv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Herrschaft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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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속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역사의 걸음은 느리기 이를 데 없다.

많은 이들이 현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인간의 소명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따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심고 물 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건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대체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세상에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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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전달, 즉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이면서도 황홀하게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문장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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