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
월터 브루그만 지음, 윤상필 옮김 / 성서유니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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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해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에 비해 어려워서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탁월한 구약성경의 해석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통찰력 넘치는 성경해석을 통해 구약성경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 가운데 놓여 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더불어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하나님, 이웃, 제국』을 통해 성경 본문(text)의 상황(context)은 '제국'의 맥락 가운데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며, 약자의 부를 강자에게 몰아주고, 상품화 정책을 추구하며, 이러한 제도를 위해 언제든 모든 수위의 폭력을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이러한 제국 한가운데서 '대항 텍스트'(countertext)로 존재함을 브루그만은 역설한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통제하지만, 대항 텍스트는 주류 텍스트를 전복하려 하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여기서 저자는 언어유희를 통해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하는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 대항 텍스트라고 표현한다.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 subversion 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19).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해방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님은 출애굽 내러티브, 광야 체류 내러티브, 시내산 언약 등을 통해 현실의 상황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개입하신다. 우리는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저자는 호세아 2:2-23, 출애굽기 34:6-7, 예레미야 애가 3:20-22, 시편 85:10-13을 통해 정의와 은혜, 율법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장엄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신실함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이웃을 향해 나아감을 촉구한다. 더불어 이러한 관계성은 창조 세계의 회복과 관련되며, 모든 만물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살리며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할 때 참된 정의가 드러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위로부터의 정의'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대조한다. '위로부터의 정의'는 '왕의 정의'로 축재를 일삼으며, 통제하는 정의다. 이는 서민들의 삶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제물 삼는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는 자리이며, 성경은 그러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우리에게 들려준다. 참된 정의는 고갈과 축재, 독점과 폭력과 대항하여 해방이 불러오는 풍요가 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만이 짧고 불행한 축재의 삶에 맞서는 대안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한계를 초월하신다. '공통 신학'으로 대변되는 통제와 체제 정당화의 신학은 조건적인 면모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제재와 심판을 가하는 식이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당대에 만연한 체제의 신념과 세계관을 뛰어넘는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셨다. 


율법에서 저자는 제국의 법과 야웨의 율법을 대조한다.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다. 이 법은 고칠 수 없고 철회할 수 없다. 하지만 야웨의 토라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개방되어 있으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위해 열려있다. 물론 하나님의 법 가운데에서도 고대 근동의 '공통 신학'적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율법은 그 긴장 가운데 궁극적으로 긍휼과 환대라는 회복적 정의와 함께 타자(이웃)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들음으로 계속되는 제국주의(전체주의)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다. 지속된 경청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어로 돌아선다. 그리하여 '이웃'을 향한 긍휼과 환대를 베푼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함없이 생동하시며 여전히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자세히 귀를 기울인다.


브루그만은 구약의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제국적 측면을 폭로하며, 그것과 반대되는 우리 삶의 가장 적실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이끌어낸다. 그의 성경 해석은 통찰력 있고, 필체는 생동감 넘치며, 적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세계관이 해석 과정에서 녹아들어있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성경 본문으로 돌아간다. 구약의 내러티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도 꼼꼼하고 세세하게 본문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지금 현재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부차적이지만 책을 읽을 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편집과 번역의 질을 들 수 있다. 성서유니온의 책이야 믿고 읽을 수 있다. 편집의 질로 인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번역은 책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중요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번역의 질이 떨어지면 집중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 책의 번역은 매우 훌륭하다. 브루그만 특유의 문체와 느낌을 잘 살려낸 듯하다(며칠 전 읽었던 책은 매우 훌륭한 저자의 탁월한 내용이었는데,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 힘들 정도의 문체와 단어 선정이었다). 


더불어 옮긴이의 적절한 해설은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역주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해설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감춰진 사본'이나 '빈곤과의 전쟁', '자신을 방어할 권리', '뉴 짐 크로우 법'에 대한 개념을 관심 있는 독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성경 본문은 항상 상황 속에서 출현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본문이 나타난 순간이나 당대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정치와 경제는 항상 동일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와 관련된 본문의 거시 상황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 P17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 P19

출애굽의 해방 내러티브, 광야에서 증명된 풍요, 시내산 언약은 야웨의 단호하신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화를 보라. 그분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요, 제국의 우상들이 판이하게 다른 야웨이시다. 그런 분이 착취에 관심을 두실리 만무하다 - P21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 P23

야웨께서 약속하신 새 일은 이제 ‘이적/경이‘mavels, wonders와 관계된다. 이 약속은 갱신된 언약에 발맞추어 도래할 결과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며, 이는 참으로 웅장하고 독창적일 것이다 - P46

신실에 대한 가르침은 타자를 신실의 궤도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타자를 거부하는 입장은 성경에 안온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하나님, 이스라엘, 교회가 공히 드러내듯이 궁극적인 신실함이란 타자를 품고자 가까이 ‘나아감‘reach을 말한다. 이 나아감이 ‘나아갈 자‘reacher를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뛰어 넘어 창조 세계로 오시고,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나아가셔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선민이 된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 P82

그분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요, 이스라엘과 만민을 신명나게 하며 바다와 들과 나무를 춤추고 노래하고 포효하게 하는 통치다 - P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 하나님은 ‘먼 곳으로부터‘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가사의하게 등장하신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변함없는 충실함hesed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P169

이분은 예사로운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한 분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은 천상이나 성전처럼 먼 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깨진 관계를 바라보시고 친히 돌보시며 능히 한계 너머로 나아가실 수 있다. 그분이 광야로 진입하신다. - P188

통속적인 공통 신학은 은혜가 보응의 한계 너머로 흘러 나갈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로의 처지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 이스라엘은 야웨, 곧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속량하시고 관을 씌우시고 만족케 하시는‘ 분의 연민 어린 뜻이 구체적인 정책에 담길 것이라고 상상한다(시 103:3-5). - P221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 P265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토라를 말씀하고 주석하고 강조하신다. 그분은 이웃 사랑의 관점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신다. 은혜로이 품으시고 정의롭게 회복하시는 그분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정돈하겠다고 변함없이 고집하신다 - P286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묻기도 하는 상대가 되었음을 알고 벅찬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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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공통 신학은 은혜가 보응의 한계 너머로 흘러 나갈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로의 처지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 이스라엘은 야웨, 곧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속량하시고 관을 씌우시고 만족케 하시는‘ 분의 연민 어린 뜻이 구체적인 정책에 담길 것이라고 상상한다(시 103:3-5).

하나님의 은혜가 의로운 자에게 임할 때, 참 이웃다움을 창조하는 아름다움이 만개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이 세상 한가운데로 ‘이웃, 이웃, 이웃‘이라는 말이 내려온다.

곁에서 함께 뒤섞이며 살아가는 이 이웃이라는 존재는 새로운 존재로 규정되고, 이전과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해방의 하나님, 그분이 이웃 사랑의 후원자가 되신다.

참된 들음이란 사람의 전 존재를 걸고 경청하는 것이다.

들음은 실제로 귀를 기울이는 행동과 관계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야웨께서 주시는 세계에 몸을 다해 충성함을 뜻한다.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토라의 본질은 규율을 늘어놓는 데 있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와 환경,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려하는 지속적인 대화에 있다.

이스라엘은 더욱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웃의‘ 집, ‘이웃의‘ 아내, 모든 ‘이웃의‘ 소유를 넘어 과부의 집, 거류민의 아내, 빈민과 고아와 과부의 모든 소유에까지 이웃 사랑의 범위를 확장해 간다.

이스라엘이 들음으로써 옛 계명의 깊이와 절실함은 더욱 날 서게 벼려지고, 그들에게 무거운 책임까지 짊어지라고 요구한다.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토라를 말씀하고 주석하고 강조하신다.

그분은 이웃 사랑의 관점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신다.

은혜로이 품으시고 정의롭게 회복하시는 그분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정돈하겠다고 변함없이 고집하신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묻기도 하는 상대가 되었음을 알고 벅찬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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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은 항상 상황 속에서 출현한다.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본문이 나타난 순간이나 당대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정치와 경제는 항상 동일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와 관련된 본문의 거시 상황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출애굽 내러티브, 신명기 언약 전승, 예언자들의 문서를 통해 입증되신 그분이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맞서고 계신 것이다.

출애굽의 해방 내러티브, 광야에서 증명된 풍요, 시내산 언약은 야웨의 단호하신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화를 보라. 그분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요, 제국의 우상들이 판이하게 다른 야웨이시다. 그런 분이 착취에 관심을 두실리 만무하다.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야웨께서 약속하신 새 일은 이제 ‘이적/경이‘mavels, wonders와 관계된다.

이 약속은 갱신된 언약에 발맞추어 도래할 결과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며, 이는 참으로 웅장하고 독창적일 것이다.

인자, 긍휼, 성실. 우리가 호세아서에서 만난 이 세 가지 용어는 사실 출애굽기 금송아지 사건 직후에도 나온 표현이었다(출 34:6).

예레미야애가에서 이스라엘은 평강이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사라진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절망에 굴하는 대신, 옛일을 기억하고 낭송하고 마음에 새기며 모진 삶을 버텨 낸다.

기억하고 낭송하고 마음에 새기는 태도는, 언약을 성실히 수행하고 긍휼을 베풀고 신뢰를 쌓는 행실로 이어진다.

결국 그러한 기억함은 ‘그러므로‘를 낳고, "나는 소망한다!"라는 외침으로까지 이어진다(애 3:21).

신실에 대한 가르침은 타자를 신실의 궤도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타자를 거부하는 입장은 성경에 안온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하나님, 이스라엘, 교회가 공히 드러내듯이 궁극적인 신실함이란 타자를 품고자 가까이 ‘나아감‘reach을 말한다.

이 나아감이 ‘나아갈 자‘reacher를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뛰어 넘어 창조 세계로 오시고,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나아가셔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선민이 된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그분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요, 이스라엘과 만민을 신명나게 하며 바다와 들과 나무를 춤추고 노래하고 포효하게 하는 통치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 하나님은 ‘먼 곳으로부터‘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가사의하게 등장하신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변함없는 충실함hesed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분은 예사로운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한 분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은 천상이나 성전처럼 먼 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깨진 관계를 바라보시고 친히 돌보시며 능히 한계 너머로 나아가실 수 있다. 그분이 광야로 진입하신다.

새로운 통치의 으뜸은 정의(‘미슈파트‘)지만, 이제 정의는 다함없는 은혜 가운데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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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으로 성경 읽기 -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토마스 R. 슈라이너 지음, 임요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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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Crossway의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이다(Crossway의 시리즈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Crossway의 이 시리즈는 성경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조망함으로 보다 더 성경을 통일된 전체로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신약학에 관심이 있다면 토마스 R.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는 익히 알 것이다. 이미 그는 『바울과 율법』, 『바울신학』, 『신약신학』, 『성경신학』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로 '언약' 개념을 주장하며, 이 주제를 통해 성경 전체를 조망한다. 그는 언약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언약들은 성경 메시지의 조화와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주며 구속사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속을 베풀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한다(창 3:15). 언약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징표들은 특성상 언약적이며,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17).


언약은 관계적인 용어며, 선택된 관계를 통해 결속력이 있는 약속을 맺는다. 이러한 성경에서의 언약 개념으로 저자는 6가지의 언약을 살펴본다. 이는 창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이스라엘과의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이다. 앞의 다섯 가지 언약은 새 언약으로 귀결되며, 새 언약은 각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성취된다.


저자는 각 언약의 세부적인 특징과 핵심적 논의를 성경 본문을 주 자료로 하여 각 장에서 밝힌다. 특히 각각의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되는지를 매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다. 이를 통해 성경 전체가 언약이라는 주제로 이어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분량이 적기에 간명하게 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학의 핵심적 논의를 다루고 있어서 결코 가볍지 않다. 독자들은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글을 통해 쉽고 흥미롭게 성경에서의 핵심적 주제인 언약을 빠르게 훑어볼 수 있다. 더불어 성경 전체에서 중심적인 뼈대를 세울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각주가 거의 없고,  참고문헌이나 더 깊은 연구를 위한 도서가 없다는 것이다(원서에 있는 For Further Reading과 Scripture Index가 왜 빠졌을까?). 이는 성경에서의 '언약'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안내가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성경의 전체 그림을 쉽게 스케치해주는 원래의 의도에 맞게 좀 더 쉽고 깔끔한 문장이나 문체였으면 좋을 것 같다(원서를 곁에 두고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언약들은 성경 메시지의 조화와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주며 구속사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속을 베풀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한다(창 3:15).
언약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징표들은 특성상 언약적이며,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 P17

"내가 "창조 언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 용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언약이 다른 언약들과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볼 수 있으며, 이 용어는 구속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로 역사를 개시했으며, 이와 같이 옛 창조는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고 그 새로운 창조를 향해 가리킨다 - P29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제사장-왕이어야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해야 했으며, 그들이 에덴동산에 살고 에덴동산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선함을 보여야 했다.
그들이 죄로 타락함으로 인류를 죽음과 죄가 통치하는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전체 성경 내러티브를 볼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하는 마지막 아담임을 볼 수 있다(롬 5:12-19; 고전 15:21-22)
아담은 언약의 우두머리로서 불행과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신자들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가운데 통치할 것이다(롬 5:17). - P46

노아 언약은 인간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끝의 시간이 오기까지 지상에 생명의 존속을 의미하는 보존의 언약이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노아 언약이 창조 언약의 최초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을 봤다.
인간의 깊은 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인간을 계속 축복하신다. 홍수는 일종의 다가올 최종 심판이다(마 24:36-41; 벧후 2:5) - P61

처음부터 온 세상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관심이 있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일종의 새로운 에덴의 새로운 아담이었다면, 이 축복이 온 세상에 확대되는 것으로 보려는 소망이 있었다 - P71

명백히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다가올 세대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역할을 성취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의롭고 정당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 P81

언약의 조건적 요소와 무조건적 요소 사이의 긴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해결된다. 순종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중개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이다 - P91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겼지만, 옛 언약, 곧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마지막이자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이다. - P114

다윗 언약에 오면,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 속에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소망하고 있다. 다윗 왕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대변할 것이며, 나라는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들이 백성을 통치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의로운 통치는 여호와의 지배 아래 그 땅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 P117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할 때, 새 창조는 온전히 임한다. 땅의 약속, 새 언약은 이제 전 우주로 확대되는데, 전 우주는 하나님의 도성이자 성전이 될 것이다(계 21:1-22:5).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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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들은 성경 메시지의 조화와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주며 구속사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속을 베풀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한다(창 3:15).

언약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징표들은 특성상 언약적이며,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창조 언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 용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언약이 다른 언약들과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볼 수 있으며, 이 용어는 구속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로 역사를 개시했으며, 이와 같이 옛 창조는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고 그 새로운 창조를 향해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제사장-왕이어야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해야 했으며, 그들이 에덴동산에 살고 에덴동산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선함을 보여야 했다.

그들이 죄로 타락함으로 인류를 죽음과 죄가 통치하는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전체 성경 내러티브를 볼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하는 마지막 아담임을 볼 수 있다(롬 5:12-19; 고전 15:21-22)

아담은 언약의 우두머리로서 불행과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신자들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가운데 통치할 것이다(롬 5:17).

노아 언약은 인간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끝의 시간이 오기까지 지상에 생명의 존속을 의미하는 보존의 언약이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노아 언약이 창조 언약의 최초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을 봤다.

인간의 깊은 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인간을 계속 축복하신다. 홍수는 일종의 다가올 최종 심판이다(마 24:36-41; 벧후 2:5).

처음부터 온 세상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관심이 있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일종의 새로운 에덴의 새로운 아담이었다면, 이 축복이 온 세상에 확대되는 것으로 보려는 소망이 있었다.

명백히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다가올 세대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역할을 성취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의롭고 정당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언약의 조건적 요소와 무조건적 요소 사이의 긴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해결된다.

순종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중개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이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겼지만, 옛 언약, 곧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마지막이자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이다.

다윗 언약에 오면,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 속에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소망하고 있다.

다윗 왕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대변할 것이며, 나라는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들이 백성을 통치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의로운 통치는 여호와의 지배 아래 그 땅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할 때, 새 창조는 온전히 임한다.

땅의 약속, 새 언약은 이제 전 우주로 확대되는데, 전 우주는 하나님의 도성이자 성전이 될 것이다(계 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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