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모세의 위치는 "자신의 주인에게 신실한 자이며 자기 주인의 모든 ‘살림‘을 위임받은 최고로 높은 종의 위치"와 비교된다. - P102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시고, 이로써 동시에 열방의 창조자이시다. - P104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히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떤 백성을 부를지를 자유롭게 결정하실 수 있다. - P104

이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다. - P104

이런 특별 위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이미 구상되어 있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장된다. - P105

이런 이스라엘의 특별 위치의 결과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될 것이다. - P105

이스라엘의 해방은 그 자체로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에대한 배타적 관계를 포함한다. - P106

다른 신들과의 모든 관계는 이스라엘에게 자유의 근거가 되고 또한 이로써 존재의 근거가 되신 이 한 분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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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는 그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심을 믿었고, 그는 그것을, 말하자면, 자신의 "인정"을 통해 확인했다. - P57

여기에서 "언약"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응답이 그것이다. "언약의 징표"로서 할례(11절)는 언약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행은 무조건적인 의무가 된다. - P58

그러나 언약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의 유효성은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도 의문시되지 않는다. 그 결과들은 오직 개별적인 범죄자에게 닥친다. - P58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벌이는 신학적 논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제시한다. - P61

그것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파괴되도록 허용하셨을 때 하나님이 과연 의롭게 행동하셨는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이다(18:16-33). - P61

"온 땅의 심판자"이신 그분은 소돔에 대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모두 의롭게 행동하셨다. - P61

"그들이 생육하였고 ··· 수가 많아졌다"(7절)라는 표현은 족장들에게 주신 수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창 17:6; 28:3; 35:11) 뿐만 아니라 인류의 첫 번째 부부와 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 가족들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요청(1:28)을 분명하게 떠올리게 한다(창 9:1과 출 1:7에서 동일한 낱말 "충만하다"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위한 하나의 창조적인 새로운 시작과 같다. - P70

출애굽기의 3장과 6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본질적인 기능을 한다. 이 본문들은 여기에서부터 오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인물로 나타나는 모세를 소개한다. - P86

이 본문들은 모세라는 인물을 이스라엘에게 야훼의 이름을 분명하게 고지하는 것에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 본문들은 곧 닥칠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예고한다. - P86

파라오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대자이다. 그는 야훼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던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압제한다. - P91

그는 매우 근본적인 방식으로 야훼를 "인지하는 것"을 거절한다. 즉, 그는 당초 야훼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 P91

또한 그래서 그는 야훼의 능력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더 강한 자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을 적대하는 신이 되게 한다. - P91

파라오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신적인 세력을 대표한다. 이 세력은 강력한 왕의 형태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그 왕 안에서 "이집트의 신들"이 한 분 하나님을 대항하여 서 있다. - P92

그것들은 야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열방의 신들"을 대표하며 서 있다(시 96:5).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는 두 가지 정점이 있다.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는, 이집트의 처음 난 것을 죽이는 마지막 "재앙"과 이집트 군대의 섬멸과 연결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이다. - P94

두 가지 사건 모두 개별적으로 혹은 공통으로(예컨대, 시 136:10-15)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행하신 "표징과 이적"(신 6:22 외 여러 곳)으로서 회상될 수 있다. - P94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즉 출애굽- 하나님의 행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든 미래를 위한 결정적 사건이다. - P94

시내산에서의 체류 전후 시기에 관한 보도들은 다시금 매우 복합적이다. - P98

한편으로 그것은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시기이다. - P98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세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항,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에 관해 계속해서 보도된다. - P98

이 두 측면은 출애굽을 시작한 후 약속의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이야기를 통해 서로 얽혀 있고 유지된다. - P98

개별 이야기들의 유래와 그것들에게서 추론된 본래의 의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본문들이 현재 맥락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 P100

이 이야기들은 모든 갈등을 다룬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백성"과 "모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들이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 P100

그리고 백성의 탄식과 불평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 이야기들 안에서 자주 언급된다(출 16:8; 민 11:1 외 여러 곳).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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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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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문제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대답이 필요함과 동시에 더욱 실제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닥친 고통의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 정서적 · 사회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고통이 자신에게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선명한 대답을 듣지 못하여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흔히 '신정론(theodicy)'이라 불리는 이 주제로 인해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목회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고통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자인 토마스 롱(Thomas G. Long, 1946~)은 Witness of Preaching으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설교학의 대가다. 그는 지금까지 논의된 고난의 문제가 목회 현장에서 적실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적으로도 명료하면서도 고통의 한가운데서 울부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응답을 모색한다.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은 네 가지 주요한 신학적 질문 중 최소한 하나를 포기하거나 축소하는 식으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네 가지의 주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해롤드 쿠쉬너(Harold S. Kushner)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전능성을 양보함으로 극복하려 했다. 미국의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의에 수정을 가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악의 기원을 피조물의 자유의지와 반역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론 또한 합리적인 여러 반박들 앞에 타당성이 크지 않음을 저자는 논증한다.


저자는 이러한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그동안의 접근방식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배우고 계승해야 할 것들을 세심하게 분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 사랑하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특히 '무고한 고통의 경험'에 대한 문제는 조금 더 세심한 용어 사용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무고하다'라는 용어보다는 '비극적'이라는 용어 사용이 훨씬 더 인간 삶의 실재와 일치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용어의 전환만으로도 꼬였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욥기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를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임을 역설한다. 신정론적 질문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갖게 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그동안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갖지 못한 목회적 관점이며,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차근차근 해석함으로 고난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 저자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원인인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지에 대한 질문이다. 토마스 롱은 세 가지의 질문들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고찰함으로 매우 실제적이고 적실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 선함,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상황과 환경이 변하고 한 사건에 얽혀 있는 많은 맥락들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희망과 통찰을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방법은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신학적 용어로 볼 때 신정론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겨우 삼백 년 전 철학자 라이프니치가 고안해낸 용어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ē(정당성)"가 합쳐진 것으로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고,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신정론이다 - P16

어만은 하나님의 능력, 현존, 자비에 관해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인생의 엄연한 사실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만이 볼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행하기를 꺼려하셨다 - P52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무고한 고통 역시 존재한다는 이 네 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충돌은 라이프치니 시대로부터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공식을 형성해왔다. - P56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은 천사나 스랍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에 소속된 만큼이나 확실히 세속적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며, 신앙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과학과 이성의 세상에 굳건히 내려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다 - P59

신자들이 울부짖음의 형태로 우리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 P71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 P81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필수 요인으로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하나님은 악의 주체이며 도덕적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 P142

아이의 죽음은 "무고하다"라기보다는 "비극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런 용어의 전환은 아이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실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런 비극이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무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상태에 내재된 모든 위험과 가능성을 동반한다. 아이는 고난을 당했고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 역시 고통을 당했지만,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P149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책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도록 그림을 조작한 다음, 이런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리의 도덕적 질서의 투영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자 하는 편만한 종교적 충동에 대해 저항한다 - P156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건의 체계는 신적 섭리의 조건을 조작하도록 허용했고, 경건의 공식에 도전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위협 요소로 신속하게 걸러내야 했다. 엘리바스는 과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표지판을 그리느라 분주한 나머지, 새로운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이전 도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 P16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들어오셔서 외견상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기억과도 전쟁을 벌이신다. 악에 속한 모든 것, 마지막 승리에 대한 헛되고 거짓된 주장, 현재에서 야기된 아픔, 우리 기억과 역사를 장악한 악은 모두 불살라질 것이다. 악은 승리할 수 없다. 이 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것인데, 바로 그것은 "무"(nothingness)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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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신앙의 가장 강력한 사실들을 가지고 십자수를 놓아 벽에 걸어둘 만한 구호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엘리바스에게 기도의 능력은 협상 카드였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협상 장치였다. 그에게는 신앙 대신 종교적 기계만이 있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건의 체계는 신적 섭리의 조건을 조작하도록 허용했고, 경건의 공식에 도전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위협 요소로 신속하게 걸러내야 했다.

엘리바스는 과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표지판을 그리느라 분주한 나머지, 새로운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이전 도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과거에 욥은 정통성의 모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잠언을 쏟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고한 고통이라는 욥의 경험은 그의 정통성이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 그의 세계관이 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욥은 한때 "잠언" 게임에서 연승을 거두던 자였다. 그러나 부당한 고통은 정통성의 카드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조커였다.

욥은 이 카드를 뽑았고 더 이상 자신의 카드를 공개할 수 없었다. 규칙은 변했고 게임도 변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점점 깨닫게 되는 바는, 욥과 친구들 간의 차이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종교적 체계를 사랑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연설은 합리적인 담론이 아니다. 그분의 말은 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연설로서, 모든 요약과 설명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경험적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통 받는 욥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공정했다. 이제 폭풍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이 음성은 욥이 가진 질서와 규칙의 체계가 애당초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욥의 것은 질서에 대한 인간의 계획으로 땅에서 하늘로 투영된 질서일 뿐이다.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욥의 울음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질서라는 인간의 개념을 하나님에게 강제하려는 시도였다.

신약성경은 고통을 착각이라고, 죽음을 친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었으며, 죽음이란 놈은 매우 실제적이고 강력한 마지막 원수였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고통스러운 부정(no)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이 부정을 그것과 길항하는 긍정(yes)으로 상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실제로는 인간의 고통이 그다지 끔찍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신약성경은 욥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부정의 불가피한 실재를 강조한 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공한다.

이 죽음과 부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경험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애매모호한 상호 작용이, 만물 안에서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의 긍정으로 흡수되었다는 약속이 된다.

욥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신정론적 질문에 대해 타당한 해결을 찾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 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욥기의 약속에 따르면 이 빛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말 많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존재하는 이 경외감이야말로 진실로 지혜의 근본이다.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란, 신자가 문제와 질문을 탐험한다는 것이 야간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과 비슷해서, 신앙이 우리를 도와서 진실로 존재하지만 신앙 없이는 놓치고 마는 무엇을 좀더 잘 보도록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인은 신정론의 질문 같은 인생의 심오한 문제에 대해 논리와 정직성, 냉철한 사고로 접근하는 동시에,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섬김에 참여함을 통해서도 그 신비를 탐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악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단순히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이상이다. 이 행위는 아주 오래되고 심오한 기도의 형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항소에 참여하는 것이다. - P200

기독교 신정론의 첫 번째 반응이 항의라면, 좋은 소식의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이 이 악을 의도하지 않으셨고 이 악의 원인도 아니시며 이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왼손으로부터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4

하나님은 악을 뿌리 뽑으실 수 없는데 이것은 그분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악을 뿌리 뽑지 못하시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P220

이런 방식, 곧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신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에 신실하지도 않으며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는 하나님도 아니다. - P220

하나님은 진정으로 전능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이 능력은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의 능력과 같지 않고, 오히려 연약함의 형태를 취하는 사랑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능력이다. - P222

우리는 하나님이 큰 칼을 휘드르며 창조 세계에 뛰어들어 악을 쳐내시기를 원한다고 믿는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의 범위를 벗어난다. - P2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들어오셔서 외견상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기억과도 전쟁을 벌이신다. - P235

악에 속한 모든 것, 마지막 승리에 대한 헛되고 거짓된 주장, 현재에서 야기된 아픔, 우리 기억과 역사를 장악한 악은 모두 불살라질 것이다. 악은 승리할 수 없다. 이 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것인데, 바로 그것은 "무"(nothingness)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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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용어로 볼 때 신정론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겨우 삼백 년 전 철학자 라이프니치가 고안해낸 용어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ē(정당성)"가 합쳐진 것으로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고,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신정론이다.

이런 잔인한 공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하나님, 신적 의지 안에서 이런 무분별한 고통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은 도덕적 괴물일 뿐이었다.

어만은 하나님의 능력, 현존, 자비에 관해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인생의 엄연한 사실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만이 볼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행하기를 꺼려하셨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무고한 고통 역시 존재한다는 이 네 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충돌은 라이프치니 시대로부터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공식을 형성해왔다.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은 천사나 스랍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에 소속된 만큼이나 확실히 세속적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며, 신앙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과학과 이성의 세상에 굳건히 내려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다.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다.

나는 설교자들이 회중에게 이런 지성적 탐구, 곧 합리성을 갖춘 신앙을 추구하는 기도가 갖는 유익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이 울부짖음의 형태로 우리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깊은 비통에 빠진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어느 때든 누구에게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뿐 아니라, 특정한 진리를 말하기에 적절한 때를 찾기 위한 목회적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필수 요인으로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하나님은 악의 주체이며 도덕적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관여하지만 창조 세계에 완전히 묶이지 않으신다.

실제로 기독교는 세상 "속에" 계신 하나님이나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대신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은 "무고하다"라기보다는 "비극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런 용어의 전환은 아이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실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런 비극이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무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상태에 내재된 모든 위험과 가능성을 동반한다.

아이는 고난을 당했고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 역시 고통을 당했지만,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책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도록 그림을 조작한 다음, 이런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리의 도덕적 질서의 투영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자 하는 편만한 종교적 충동에 대해 저항한다.

여기서 해결이 요구되는 문제는 왜 욥이 고통 당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도대체 어떤 하나님과 창조가 도덕적으로 비합리적인 이런 경험의 들쑥날쑥함을 허용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핵심은 욥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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