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것과 알고자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P18

모르는 것은 분명 빈약한 능력에서 비롯하지만, 앎에 대한 경멸은 사악한 의지에서 비롯한다. - P18

누구에게나 지식을 키워 가는 수단으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곧 읽기와 명상이다. - P19

물론 교육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읽기이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그 규칙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읽기에 관해서이다. - P19

읽기를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무엇을 처음에 읽고 무엇을 나중에 읽을지 알아야 하며, 셋째,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P19

추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선의 현상을 담고 있는 지혜이다. - P20

지혜는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그들이 자신을 인식하게 해 준다. - P20

오늘날의 학생은 무지해서든 의지가 없어서든, 적합한 공부 방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 P22

공부하는 사람은 많으나 지혜로운 사람이 드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학생들이 유용한 공부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쓸모없는 공부에 노력을 낭비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2

모든 학문에서 그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학문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인정된 것이다. - P28

나중에 그대가 그 학문들을 다 공부하고 또 논쟁과 비교를 통해 각 학문 고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 연후에야, 각각의 원리를 다른 나머지 원리에 적용해 보거나 각 학문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깊이 탐구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 P28

중심이 되는 큰길을 알기도 전에 여러 샛길로 들어가지 말라. - P28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때라야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다. - P29

배움에 나설 때 우리는 더 잘 알려져 있고 더 잘 정의되어 있으며 더 포괄적인,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차츰 더 내려가면서 분석을 통해 개별적인 것들을 구별함으로써 보편적인 것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을 탐구해야 한다. - P33

미처 지혜로워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지혜로워 보이고 싶은 욕망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 P38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자신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자신의 본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 P38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즉 지혜로운 정도가 아니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만큼 더 지혜에서 멀어진다. - P38

처음부터 모든 것에 대한 앎을 부여받은 이는 아무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에게서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지 못한 이 역시 아무도 없다. - P39

그러므로 지혜로운 학생이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읽도록 하고, 어떤 글도, 어떤 사람도, 어떤 가르침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 P39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것에서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구하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생각하는 이가 지혜로운 학생이다. - P39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꼼꼼한 탐구는 진지한 숙고를 뜻한다. - P49

공들이는 노력과 사랑은 그대가 과제를 끝까지 해내게 만들고, 염려와 경계는 그대를 신중하게 만든다. - P49

그대는 공들이는 노력으로써 공부를 지속하고, 사랑으로써 공부를 완벽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 또한 염려로써 미리 조심하고, 기민한 경계로써 면밀히 주의를 기울인다. - P49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더 알고자 하는 이 욕망 역시 일종의 무절제라네. 왜 그럴까? 자유학문을 이렇게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은 불필요한 것을 배우느라 필수적인 것을 배우지 못한 탓에 성가지고 말 많고 시와 때를 가리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따분한 자들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네. - P75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물론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의로움이 가져오는 좋은 일은 오직 자신에게만 이롭거나 기껏해야 함께 살아가는 몇몇에게만 이롭습니다. - P92

그 사람의 의로운 삶에 배움이 더해진다면, 그의 덕이 지닌 힘은 더욱 커질 것이고, 마치 그 앞에 횃불을 비춘 듯 더욱 찬란해지고 더욱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께서 바리새파의 것이라 언급하신 모든 관습들-손 씻기, 그릇 씻기-은 부정한 음식이 몸의 정결함을 침해하는 것에 관한 바리새파의 특정한 전통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P202

밖에서 오는 부정함(문자적으로 할라카적 부정함)을 믿은 그러한 바리새인들 안에서 나오는 부정함에 관한 토라 규율의 종교적인 진의를 완전히 놓친 것이다. - P202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례(부모 부양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토라를 완전히 왜곡했고 무시했다. - P202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밖에서 오는 부정함이 가능하다며 율법을 바꾸었을 때, 그들은 또한 율법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 P202

밖에서 오는 부정을 추가한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토라 안의 의미는 무시한 채, 오직 〔토라〕 밖에서부터 토라를 읽었다. - P202

이처럼 할라카 문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은 비유와 같다. 예수께서 음식의 정결과 부정함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코셔 체계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정결 관습들에 대한 바리새파의 이해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 P203

초기 유대인들의 주된 성경 주해 방식은 미드라쉬였다. 미드라쉬는 새로운 교훈이나 내러티브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성경 곳곳에서 관련 있는 (혹 심지어 겉보기에 연관되지 않는) 단락이나 구절들을 연결짓는 것을 말한다. - P226

이런 예언적인 텍스트들과 다니엘서의 그 사람의 아들과의 연결은 분명 고난받는 예수에 관한 연구〔기독론〕의 온전한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예수의 죽음(과 승귀)도 이에 따라 해석되었다. - P226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 이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죄인을 대신해 받는 메시아의 고난과 속죄하는 죽음이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개연성이 있다. - P226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이미 자리 잡힌 상태에서, 메시아 대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시며 자신을 살피시고 그리시며 나타내시는 예수를 보게 된다. - P227

우리의 죄를 속죄하려 고난받는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종교 역사 동안 내내-심지어 기독교와 분리되고 난 한참 뒤에도- 친숙한 개념이었다. - P237

고난받는 메시아 개념은 고대 유대교, 중세 유대교, 그리고 근대 초기 유대교에도 존재한다. - P237

본질적으로 ‘(십자가에서 나온) 기독교인의 메시아 개념이냐 아니면 유대인의 (승리주의자) 메시아 개념이냐‘의 대결 같은 것은 없다. - P246

단지 하나의 복합적이고 경쟁적인 메시아 개념, 곧 마가와 예수께서 유대인 공동체 전체와 함께 공유했던 메시아 개념이 있을 뿐이다. - P247

자신이 받을 고난을 예언하신 그리스도, 수난 내러티브 속 바로 그 고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는 온전히 유대 토양에서 자랐다"는 마르틴 헹엘의 주장과 결코 어떤 점에서도 부딪히지 않는다. - P247

복음서의 유대교는 쉽게 말해 전적으로 유대-메시아 운동이었으며, 복음서는 유대적인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 P247

신약성경은 많은 이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제2성전기 유대인의 삶과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250

그분의 생애, 특권, 권세 심지어 승리 이전 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막들은 모두, 성경을 미드라쉬적으로 세밀하게 읽은 데에서부터 발전해 나온 것이며, 이것들은 결국 그분의 생애와 죽음 안에서 성취된다. - P253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체험한 승귀와 부활은 이 내러티브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 P2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와 마가는 토라와, 바리새인들에 의해 드러난 구전 전승들과 혁신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P196

예수(마가)에게 있어서 기록된 토라는 신적인 것인 반면에, "장로들의 전통"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 P196

이것은 단연코 율법의 폐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단지 율법을 제자리에 두는 것뿐이다. - P201

예수께서 말씀하신 설명은 토라의 규율들이 가진 깊은 의미를 해석한 것이지,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P201

예수께서 크게 기여하신 것은 율법을 이처럼 깊이 있게 해석한 것이지, 소위 말하는 율법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 P201

이는 토라를 버리라는 훈계가 아니라, 토라를 실천하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 진정으로 더 깊이 헌신하라는 부르심이다. - P201

예수의 유명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종교 세계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녹 문헌에도 다니엘서와 거의 똑같은 표현으로 두 신적 존재가 나타난다. 곧 늙은 존재와, 사람의 모습을 가진 이-즉 "사람의 아들" 같은 이, 혹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the Ancient One]과 대조되는 젊은 인물-가 언급된다. - P137

사람의 아들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제2성전기 말에 이르러, 널리 받아들여지는 유대인의 신앙 표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P140

「에녹의 비유」는 어떤 고립된 분파의 산물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유대인의 사고 체계와 저술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 P140

그리스도 교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측면들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한 존재로 결합〔combination〕된다는 점이다. - P144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개념조차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 P144

거의 동시대 문헌인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녹의 비유」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지상에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현현) 개념, 그리고 사람이 신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지게 되었다는 (신격화) 개념 사이에 강한 연속성 혹은 종합이 발견된다. - P146

본래 메시아 개념은 오랫동안 갈망했던 왕조를 회복시킨 다윗 가문의 한 평범한 인간 왕에 초점을 두었던 반면에, 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은 이와 개별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 P149

이제 우리는 두 개의 평행하는 에녹 전승 곧 『에녹1서』 14장과, 다니엘서 7장에서 발전해 나온 전승들을 보게 된다. - P151

한쪽에는 승귀하여 신격화된 인간에 대한 전승이 있으며, 또 다른 한쪽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내려온, 제2위의 하나님 같은 구원자에 대한 전승이 있다. - P151

아직은 마가복음과 그 이후의 복음서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인간화된 신〔anthropized divinity〕과 신격화된 인간〔divinized human〕의 통합 혹은 동일화까지는 발견하기 힘들다. - P152

이것이 한데 모이는 곳이 바로 「에녹의 비유」 70-71장이며, 이는 아주 오래된 전승의 독립적인 줄기로 봐야 한다. - P152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념들, 본래 개별적이었던 두 개념이 합쳐진다. - P152

두 전승이 「에녹의 비유」에서 합쳐진다. 선재한 제2위의 하나님, 다니엘서의 구원자는 이제 그 사람의 아들처럼 묘사될 뿐 아니라, 그렇게 불리기까지 한다. - P154

그리고 노아 홍수 전 고양된 일곱 번째 현인〔sage〕 에녹은 하늘로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 P155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며, 〔세상에〕 있지 않다. 이 한 땀 한 땀이 때를 맞춰 꿰어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문헌이, 에녹은 처음부터 메시아였고 처음에는 감춰졌던 그 사람의 아들이었으며 이후 인간의 형태로 지상에 보내졌다가 다시 그가 전에 머물던 곳으로 승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P155

분명히 에녹 버전에서 강조점은 신격화에 있고 복음서에서 강조점은 신의 현현에 있는데, 이는 이후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P156

하지만 내 생각엔 ‘유대적인 그 사람의 아들‘ 전승의 두 버전 모두에, 두 요소 모두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P156

1세기와 2세기 초반-심지어 그 이후까지- 예수 운동이 보였던 개념들과 관습들 9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당시 유대교의〔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과 관습들의 일부로 무리없이 이해될 수 있다. - P171

삼위일체와 성육신이란 개념 혹은 이 개념들의 기원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직접 무대에 등장하시기 전부터-말하자면 예수께서 메시아적 소명을 시작하셔서 그러한 신학 개념들을 드러내 보이시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존재했었다. - P171

예수께서는 토라의 관습들과 율법들을 버리신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바리새파로부터 오는 토라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여 그것을 확고하게 지켜내셨다. - P173

예수의 유대신앙〔Judaism〕은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파에서 나온 율법에 대한 일부 급진적인 변화들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반응을 보였다. - P174

기독교가 유대교 안에 있는 한 유형〔variation〕이라는 견해, 심지어 예수께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전통주의자이셨다고 말하는 견해는, 2세기, 3세기, 4세기 소위 유대 기독교〔Jewish Christianity〕와 그 초기 라이벌이었던 이방 기독교〔Gentile Christianity〕- 몇 세기 후 결국 승리를 거두는-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안이다. - P175

탈무드에 따르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이는 부정하거나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을 도입한 것은 바로 랍비들(혹은 유명한 바리새인들)이었다. - P193

따라서 예수께서 꾸짖으신 것은 코셔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억지로 떠맡기려 했던 혁신〔변화〕들이었다.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의 아들"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 P75

"사람의 아들"이 마가복음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의 세계 안에서 알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칭호일 때에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P75

이 칭호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모든 용례는 다니엘서 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7장을 암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 P75

만일 예수께서 ("역사적" 예수이든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이든)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생각하셨다면,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아들이시지, 어느 한 순간에만 사람의 아들이실 수는 없다. - P77

곧 사람의 아들이란 내러티브 전체를 가리키고 또 그 속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용어라 할 수 있다. - P77

다니엘서 저자가 다니엘이 환상을 가지고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한 분 그 이상의 하나님에 대한 고대의 증거들을 감추기 원했다는 것이다. - P84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신학적인 논쟁은, 사실상 이미 예수께서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유대교 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 P84

메시아-그리스도는 아기 예수가 나사렛에서 나기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의 사상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P85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2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안에 가장 오래된 신학 개념들 중 하나이다. - P85

내 견해로는 제2위의 구원자 하나님 개념은 이스라엘 종교의 초기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 P88

메시아 개념이 우리가 다니엘 7장에서 발견한 더 젊은 신적 존재와 결합되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 또한 그에게 붙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 P88

한 보좌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보좌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 존재가 차지하고 있다. - P88

더 늙은 존재는 영원무궁히 땅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세를 더 젊은 자에게 주며 홀을 건넨다. - P88

이때 다윗 계열 이스라엘의 왕 역할을 하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오래된 용례를 차용하고, 그것을 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과 사람의 아들과의 동등한 신성 표지로 받아들이는 일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P88

이렇게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 이는 모두 유대 전통과의 어떠한 단절도 없이 이뤄진 일이다. - P88

다니엘 7장으로 인해 우리는 두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천상의 구원자를 가리키는 용어, "사람의 아들"의 궁극적인 원천이란 유산이고, 또 하나는 제2성전기에 깊이 파고든 고대 이스라엘의 이위일체 신학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란 유산이다. - P98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믿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이미 이전부터 메시아/그리스도는 신-인[god-man]일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유대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 P104

그 사람의 아들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분명히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 - P106

이러한 주장은 다니엘 7:14에서 나온 것인데, 거기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권세[authority]-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권세이다-와 영광과 왕위"가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 P106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께서 신의 특권으로 보이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세’)를 주장하실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의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세’)이다. 이는 곧 다니엘 7장을 상세히 읽은 것에 근거를 둔 성경적인 권세이다. - P108

내가 주장하는 바는 치료를 위한 안식일 위반은 허용(지금은 받아들여진 관습)하는 쪽의 논의 위에 여러 주장들이 덧씌워지고, 또 다윗의 행동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시되는 더 묵시적인 시각으로 인해 급진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 P123

성경의 다양한 전례들과 논증들을 통해 안식일에 치료가 허용된다는 논쟁적인 개념을, 예수께서는 더 확장시켜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신다. - P124

그것은 곧 안식일에 생명이 위험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을 토라가 허용할 뿐만 아니라, 메시아 곧 그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얼마나 더 확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 P124

오히려 메시아를 예표하는 다윗은 율법의 일부를 제쳐놓을 수 있는 권한을 누렸고 새로운 다윗이자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P125

이것은 율법이나 혹은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새로운 주 곧 그 사람의 아들이 율법 위에 세워져 역사상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묵시적인 선언이다. - P125

현대 정치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통치자는, 필요하다고 사료될 때, 혹 적합하다고 판단될 때 법에 예외를 둘 수 있는 자이다. - P129

그 사람의 아들이 통치권을 받은 것도 정확히 그러한 판단을 위해서이다. - P130

그 통치권은, 다른 안식일 준수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위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허용을 더욱 더 확장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 P130

메시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제한되었던 허용 범위를]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하셨다. - P130

나는 권세를 부여 받은 이 신적 존재가 다니엘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이 구원자 왕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 P130

따라서 그는 다윗 계열 메시아와 동일화되기에 적합하다. 그 존재가 복음서 안에서뿐 아니라 동시대 비-기독교 유대문헌, 이를테면 『에녹서』, 『에스라4서』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 P130

복음서 안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의 용례는, "사람의 아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고대 유대문헌들에서 나타나는 용례와 연결되어 있다(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제2위 신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 P130

널리 알려진 유대교의 모습-보편적이라거나 경쟁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은 이미 예수 이전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