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성장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습니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을 익히면서 자기혐오의 씨앗이 생깁니다. 자신 안에 없는 것을 ‘훌륭한 것’, ‘옳은 것’이라 믿고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위장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 써서 자신을 포장하고 그것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황홀해지는 이유는 ‘이 모습이라면 타인이 감동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조금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애自愛로부터 발생하고 집착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생긴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싫다고 느끼는 사람과 친구인 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서부터 넘쳐나는 애정에 이끌리는 것이 진짜 친구다.

누구하고든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될 수 없다.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파괴적인 사람과도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서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혼자서 상대에 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상을 만들어 강요하는 행동은 상대에게 굴욕감을 줍니다.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이 느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대립을 일으키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짐작할 수도 있는데,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닙니다. 파괴적인 태도를 강요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파괴적인 태도의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창조적인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조건입니다.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집착하는 대상의 진짜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타인에게 받아들여진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 상을 강요하는 방법 외에 다른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사람은 타인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준비한 분류표의 어딘가에 적당히 배치해서 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파괴적 태도’라고 부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야말로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종속하는 원인입니다.

자만하면 자신의 실력 부족은 모른 체하고, 문제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애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중하게 여기는 것과 반대로 자기애는 자기혐오로부터 생깁니다. 자기혐오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래야 한다는 모습을 미리 고정해 놓고 그 모습과 어긋난 자신에게 혐오감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호감을 받으면 당신의 자원을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애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근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욕구를 인정하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자애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스스로 그 몸을 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친구 만들기의 대원칙입니다. 누구하고나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친구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강요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누구하고든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강요하는 사람과도 만나서 사귄다는 말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의 부정으로 생긴다.

표면적인 평온을 지키기 위해서 불쾌한 강요를 참으면 ‘친구인 척’을 강요당하게 되고 당신의 중요한 친구 네트워크가 순식간에 오염됩니다.

자기애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타인의 장점을 욕망하는 것이 집착이다.

자기애자의 두 번째 전략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먹이가 되어 줄 사람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용모, 상냥함, 총명, 자산, 학력, 지위, 능력, 강함, 신분 등 무엇이든지 좋으니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을 목표로 정해 그의 장점을 수중에 넣어서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려는 야비한 욕망을 품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런 욕망이 집착입니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대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는 친구입니다.

파괴적인 태도와 사랑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파괴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집착할 뿐입니다. 파괴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의 마음에 든다는 말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집착당한다는 뜻이고, 집착당한다는 말은 소유당한다는 뜻입니다.

자기애자가 취하는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장하고 위장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자원과 시간을 확보하려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많은 자원을 획득하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확보해 자신의 위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전력을 다하느라 타인을 배려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기 위한 위장에 쫓기는 인간은 타인을 짓밟으려 하고 타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쓸 수 없게 됩니다.

위장에 봉사하기 위한 자원과 시간을 획득하느라 분주한 것이 이기심이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자립’한 것이다.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파괴적 태도가 당신을 끌어당기게 된다.

서로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는 말은 서로의 진짜 모습을 늘 탐구하고 자기가 만든 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상태가 자애입니다. 인간은 원래 자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아기를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가까이 옵니다.

‘공포’에는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을 스스로 은폐하면 ‘불안’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정신의 결함 때문에 기묘한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며 정신적으로 완벽한 성인聖人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어떤 형태의 ‘장애’를 갖고 살아갑니다. 적어도 나이를 먹으면 어딘가 몸 상태가 나빠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인정하고 자애하는 동시에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자기혐오에 빠지는 두 가지 측면을 갖습니다. 이 경우 자애와 자기애가 한 명의 인간 안에서 경합하고 애정과 집착이 갈등합니다. 집착은 종종 애정으로 오인됩니다.

의존할 곳을 점점 줄여 소수의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종속하는 상태입니다.

이기심은 자애에 반합니다. 이러한 근시안적인 이익에 휘둘리면 자신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이치에 맞게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자립에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창조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창조적인 태도를 가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사람과도 친구를 하면 됩니다. 물론 친구의 모든 친구와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중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친구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친구의 친구와 친구가 되면, 친구의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를 소개받으세요. 이렇게 해서 한 명이던 친구가 세 명으로 늘고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막대한 수의 친구가 생깁니다.

상대의 파괴적 태도에 대응하지 말고 창조적 태도에 말을 걸어야 한다.

파괴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 배후의 창조적 태도에 말을 걸면 그 사람이 분노할 수 있다.

자립한 사람은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곤란하면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한 인간관계를 잘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관계는 화폐를 이용하든 이용하지 않든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습니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을 익히면서 자기혐오의 씨앗이 생깁니다. 자신 안에 없는 것을 ‘훌륭한 것’, ‘옳은 것’이라 믿고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위장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 써서 자신을 포장하고 그것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황홀해지는 이유는 ‘이 모습이라면 타인이 감동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조금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자애自愛로부터 발생하고 집착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생긴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싫다고 느끼는 사람과 친구인 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서부터 넘쳐나는 애정에 이끌리는 것이 진짜 친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더봇 다이어리 : 인공 상태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8
마샤 웰스 지음, 고호관 옮김 / 알마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르나 주제에 따라 읽기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시를 대할 때와 과학 서적을 마주할 때는 그 자세부터 다르다. 철학이나 신학서적을 읽을 때와 에세이를 볼 때도 많은 차이가 있다. 다른 장르에 비해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텁텁해지면 소설책을 펼친다. 머리가 뻑뻑해질 때도. 


책을 읽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책 읽기의 목적은 '즐거움'이다. 문유석이 『쾌락독서』에서 주장하듯 "독서란 원래 즐거운 놀이다(14)." 독서를 신비화하거나 숭배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이 독서를 하지 않는 것을 나무랄 필요가 없다. 내가 즐거우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SF소설은 거의 보지 않았다. 이 세계를 잘 모른다. 그러니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SF, 판타지 소설 작가 마샤 웰스(Martha Wells)의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를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시리즈물이다. 2019년 9월에 알마에서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이 출간되었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알마, 2019)

 

시리즈물이기에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을 읽은 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를 읽으면 더 자연스럽고 풍성하다. 하지만 이전 시리즈의 정보가 없다 해도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개별적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형태다. 이전의 에피소드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미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알마, 2020)

 

​이 책에서 머더봇은 전편(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에서의 사건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기억의 장소로 가려고 한다. 그 과정 가운데 다른 인공 존재의 도움과 감시 등이 시시각각 등장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내달린다. 마치 지금도 이러한 인공 존재들과 함께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그만큼 작가의 묘사는 구체적이며 섬세하다. 그러면서도 사건의 전개는 과하지 않다. 적절한 절제와 완급조절이 탁월하다. 


흥미진진하지만 내용은 깊다. 어떤 면에서 매우 진중하다. 인간의 악, 사회의 부조리, 인간의 존재. 여러 질문들이 머리를 떠다닌다. 작가는 그러한 지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의 근원적 질문은 강하게 마음에 부딪힌다. 이야기를 통한 질문은 더욱 무겁게 가슴에 와닿는다. 


SF소설을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라면, 이 시리즈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 SF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미 이 책을 읽고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스로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그저 살아남아서 계속 나아가쟈 하죠. - P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이란 실제로 우리 모두의 영혼과 우리의 풍습을 그려낸다. 즉 지적 과장에 힘입어 진실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서로 다른 각자의 본래 정신 상태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책을 읽는 방식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중에서는 매우 즐거우면서도 실망스럽고 동시에 확신하기 어려운 방식도 있다. 쉽게 믿으면 안 되지만, 결국에는 꽤나 교훈적인 그 방식은 바로 정신에 관한 연구다. 사람과 사람의 영혼까지 함께 연구하는 독서 방식인데, 이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고전 작품의 독자는 당대에 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낯선 상태로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독자의 낯섦은 적대를 넘어 모든 세대를 아우르고야 마는 지경에 다다른다. 어떠한 유행도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그 자신 또한 유행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좋은 희곡을 읽어야 한다. 좋은 희곡을 읽는 데에는 매우 특별한, 정말이지 매우 특별한 독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읽으려면 우선 해당 작품이 극장에서 자주 상영된 것이어야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작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극장에서 맞닥뜨리는 창의성을 좇는다는 말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작업이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태도가 잘 드러나도록 하고 사건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다.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읽어서도 안 되며 사실 읽으려야 읽을 수도 없다

좌우지간 우선 보라. 보는 습관을 들이자. 본다는 것은 좋은 연극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 살아 숨 쉬는 작품과 생명이 없는 작품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전자는 볼 수 있고, 후자는 그럴 수 없다. 좋은 극작가가 작품을 봐 가면서 집필하듯이, 좋은 독자는 작품을 눈앞에 세워 두고서 읽어 내려간다.

희곡을 읽으면서 얻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있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 희곡을 읽을 때 크게 와 닿는 기쁨으로, 그것은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다양한 문체를 관찰하는 즐거움이다.

극작가를 읽을 때의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사상적 측면에서 무엇이 작가의 것이고 무엇이 등장인물들의 것인지를 가리는 일이다. 이러한 탐구는 깊은 몰입과 열정이 필요하며, 그때에도 우리는 거의 근접할 수 있을 뿐 결코 완전에 다다르지 못함을 감지한다.

성찰의 즐거움, 우리가 극작가를 읽으며 얻는 이 활력 넘치는 즐거움은 작가 자신이 작품에 무엇을 담으려 했는지를 알아보는 데 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탐구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착각에 빠질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위험마저도 탐구를 이어 나갈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인이란 서사시인, 애가시인, 서정시인을 말한다. 이들을 읽는 방식은 웅변의 달인이거나, 산문이라도 운율 때문에 음악이 되는 부류의 산문시인과는 어느 정도 차이를 두어야 한다. 처음에는 매우 낮게 읽고 그다음에는 소리 높여 읽어야 한다. 시인의 생각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소리를 낮춰 읽어야 하는데, 대개 소리 높여 읽으면 본인의 습관 때문에 본래의 반도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 후에 소리를 높여 읽는 까닭은 귀로 듣고 운율과 음성적 균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이때 의미는 이미 파악한 상태이므로 우리 정신은 그것을 놓치는 법이 없다.

소리 높여 읽으면 리듬이 스며들기에 글을 한 편의 음악처럼 써 내리는 작가가 지닌 의미를 온전하게 채워 넣게 된다. 리듬이란 본디 의미 자체로, 어떻게 보면 생각에 앞서는 것이다.

위대한 산문 작가도 그렇겠지만 시인은, 단번에 모든 아름다움을 선사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모두 한 번에 주지도 못한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천천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화가를 대하는 것처럼 구성을, 소묘를, 색채를, 사람의 형체와 그 외관을, 물을, 하늘을 공부해야 한다. 총체적 인상은 이러한 모든 각각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녹아났을 때야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책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읽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작품이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작품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잘 이해할 수 있다.

독서의 주적이란 바로 자기애나 소심함, 몰입이나 비판적 정신이다

자기애,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에 생긴 질투심은 책을 읽거나 읽는 도중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권태로워야만 굳이 자신을 희생해 가며 책을 펼치는 굴욕을 맛본다. 책에 담긴 생각에 자족하고, 다른 것들과 매한가지로 이 생각 또한 가치 있으리라 여기게 된다. 독서란 권태로움이 자기애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쥐는 행위다.

독서에서 적이란 인생 그 자체다. 삶은 책을 읽기에 알맞지 않다. 인생이 관조나 성찰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야심, 사랑, 탐욕, 증오, 개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증오, 질투, 경쟁, 각각의 분쟁, 이 모든 것이 삶을 뒤흔들고 폭력적으로 만들며, 미지의 무언가를 읽을 생각에서 멀어지게 한다.

늦깎이 독자는 위험하다. 일련의 환멸을 맛볼 각오를 해야 하며 언제나 이미 온기가 날아가 차갑게 식은 상태에 있는 저자를 읽게 된다.

비판이란 계속해서 정신을 운동시켜 주는 행위다. 이는 우리 정신에게 무엇이 거짓이고 취약하며 형편없고 조악한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거짓이고 취약하고 형편없고 조악한 것들과 그 덕분에 알게 될 진짜고 아름다운 것들에, 그리고 비판하는 연습 없이는 얻지 못할 한없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시시하거나 어중간한 수준의 만족이 주는 진솔함을 포기한다. 따라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정확하거나 확실하지 못하리라. 언제나 처음에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해야만 우리는 작품에 들어갈 수 있다.

우선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이해하고자 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다시 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비판적 검토 아래, 작품이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에 애당초 토론이 불필요했음이 입증됐을 때 다시 자신의 갑옷을 내려놔야 한다.

믿음, 비판, 감탄. 이렇게 세 단계가 있는데, 실제로는 동일한 것으로 독자와 작가는 누구는 온전한 감탄에, 누구든지 진실이나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각각의 단계를 연이어 건너야만 한다.

자기애, 잡다한 정열, 소심함, 불만족한 정신. 이런 것들은 독서의 주적으로, 언제나 우리 안에서 비롯된다. 그 수가 많음을, 상당히 흉물스러운 것임을 우리는 보았다. 서글픈 노년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독서의 주적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책은 우리에게 남을 마지막 친구이며, 우리를 속이지도, 우리의 늙음을 나무라지도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는 교조적으로, 즉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인상적으로, 즉 본인이 느낀 감정에 따라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역사가로서의 자기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돼 버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근본이 되는 것, 몇몇 특징이나 세부 관찰을 제외하면 선생의 의무가 될 행동은 정성을 다해 감독하고, 통고하고, 밝혀내어 학생을 칭찬해 주는 것으로, 학교 과제는 언제나 반영의 산물이다. 아이로 하여금 잘 정리하여 기술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도록 하면 된다. 이미 제법 생각할 줄 알고 어느 정도 문체를 만들었더라도 언제나 앞선 것에 근거하여 아이들의 과제를 판단해야 한다. 개성이나 독창성은 조금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읽기는 감미롭다. 그리고 거듭하여 읽기는 가끔 더더욱 감미롭다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읽는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데서 오는 기쁨은 정신 깊숙이 어떤 불씨를, 상상력을 부추기는 어떤 열기를 불러일으킨다.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기 위해 다시 읽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자기를 저 자신과 비교하기 위하여 다시 읽는다.

우리는 다시 읽으면서 예전의 자기 자신과 비교하며 부침浮沈을 기록한다. 자기 감각에서는 침몰일 수 있겠다. 그러나 득실로 따져 볼 때 우리의 종합적, 비판적 지성에서는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적, 정신적 차원에서 우리 인생의 굴곡을 그려 본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어떤 작가를 다시 읽든지 간에, 더 많이 느끼든 더 적게 느끼든, 더 잘 이해하든 매우 잘 이해하든 심지어 덜 이해하든, 그 모든 것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일부며 그 원인 또한 우리의 삶에 있다. 따라서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다.

독서에서 받은 인상들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소재로 한 자서전을 매우 잘 쓸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때 그 책의 제목은 재독再讀이라 붙일 수 있겠다. 재독은 자신의 기억을 읽는 행위로, 굳이 그 기억을 글로 쓰는 노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매우 큰 장점이리라.

있다. 천천히 생각해야 하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 생각할 때는 신중함을 기해 너무 빨리 자기 생각을 개진하지 말 것이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읽을 때는 신중함을 기해 작가에게 줄곧 반박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우선 개진되는 작가의 생각에 자신을 내던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토론을 위해 되돌아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읽는 즐거움을 도외시한 비평적 독서는, 생트 뵈브의 말마따나 무미건조로 점철된 특별한 종류의 즐거움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비평가는 독자에게 작품 전체의 흐름을 이해시키거나 새로운 방식에 따라 거듭하여 읽기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유한다

천천히 책을 읽고, 대상을 봤을 때 처음으로 파악한 의미를 경계하며, 무턱대고 책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책을 읽을 때 나태함에 젖지 않게 해 준다

조급함도 금물이다. 조급함은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느린 독서는 애초에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을 구분해 준다.

‘천천히 읽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보편적 독서의 기술이 될 수 없고, 다만 다양한 작품에 따른 서로 다른 독서의 기술들이 있을 뿐이다

책 읽는 즐거움을 도외시한 비평적 독서는, 생트 뵈브의 말마따나 무미건조로 점철된 특별한 종류의 즐거움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천천히 책을 읽고, 대상을 봤을 때 처음으로 파악한 의미를 경계하며, 무턱대고 책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책을 읽을 때 나태함에 젖지 않게 해 준다

조급함도 금물이다. 조급함은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느린 독서는 애초에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을 구분해 준다.

‘천천히 읽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보편적 독서의 기술이 될 수 없고, 다만 다양한 작품에 따른 서로 다른 독서의 기술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을 담은 책에 맞는 독서법은 다음과 같다.

지속적인 비교와 대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보편적 생각은 작가가 수많은 생각과 세세한 관찰을 쌓아 가며 도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비평가는 독자에게 작품 전체의 흐름을 이해시키거나 새로운 방식에 따라 거듭하여 읽기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유한다

철학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 철학자를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라보는 작업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감정인지, 감정적인 생각인지, 감정과 생각이 혼재된 상태에서 도출된 생각인지를 본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사상가의 정신으로부터 천천히, 순수하거나 거의 순수한 상태의 생각이 쌓여 도출되는 관념적 생각인지를 본다

언제나 작가와 거리를 둔 상태라면 작가의 내면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단지 작가의 말을 재단할 뿐 진정한 읽기는 할 수 없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자. 무엇이 점차 드러나는가? 글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처음 봐서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작가는 생각보다 훨씬 덜 단호하다

다시 한 번 읽고 주의 깊게 살피면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말을 이끌어 나가는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작가의 수많은 잠언을 비교하다 보면 그의 방식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한 저자의 기술 방식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언제든지 저자와 대치한 상태에서 그 방식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놀이로 우리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작가를 가장 밑바닥까지 소유하는 행위다. 작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다른 방향으로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지를 알게 해 줄 뿌리나 씨앗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진정으로 작가를 알게 된다.

찾고자 하는 즐거움은 바로 사유의 즐거움이다. 작가의 생각과 거기에 섞여 드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를 자극하는 작가의 생각과 그를 해석하는 우리의 생각을 모두 따라가며, 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생각을 배반하며 우리는 사유의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관건은 즐거움으로, 여기에는 수많은 불경스러운 즐거움이 존재한다

독자는 처음으로 모순을 찾아낼 때 즐거움을 느끼고, 다음으로는 그 모순을 해결하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작가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작가를 작가 자신과 맞붙이고 또한 작가 자신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

철학자인 한 작가를 읽는다는 것은 계속하여 그와 토론하는 일이다. 이때 토론에는 개인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매력과 위험이 가득 차 있다

진정한 지적 행복이란 바로 정신적 자유이다

지적 작업에서 필요한 것은 포기도 승리도 아니다. 포기하면 언제나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고 승리는 언제나 공허한 법이다. 한 사상가와 마주해서 자신을 알려면 언제나 정중하면서도 너그러울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옳았음을 알아야 하며 마지막에 이르러 그와 명료하게 뜻이 일치해야 한다. 또한 작가가 틀렸음을 알고 그 앎에 감사를 표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자가 생각의 씨를 뿌리듯 감정을 다루는 작가는 감정의 씨를 뿌린다. 무엇보다 작가는 우리가 감동하기를 바란다. 감동이란 작가가 작품 속 등장인물에게 내맡긴 감정을 독자와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염으로, 우리가 창조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정신 상태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자신을 내던진다고 내가 명명한 행위는 무엇보다 감정을 다루는 작가를 대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상상으로 가득한 작품을 생각한다는 건, 등장인물이 자연스러우면서 진실임 직한지를 자문하는 행위다. 그리고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맛보듯 등장인물들의 진실함을, 즉 그들의 도덕적 삶이 얼마나 잘 집약되어 있는지를 음미한다

소설 읽기는 두 번째 순간, 즉 판단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폭넓은 인간관계를 겪어야 하는데, 이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습관을 통해 생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가장 강한 감정은 바로 우리가 살면서 본 것들을 소설에서 다시 볼 때 생겨난다. 그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명확하고 더욱 두드러진 방식으로 말이다

진정으로 좋은 소설이라면, 소설은 반쯤은 무기력하게 벌어진 손아귀에서 벗어난 삶을, 우리한테서 멀어지는 삶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또한 허구를 판단하고 그것이 좋을 때 더욱 즐기기 위해 우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독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기를 요구하며, 훌륭한 독자는 심리 분석이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독서는 우리가 의식하는 바를 엄중히 살피기를 종용하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에게 검토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좋은 독자라면 이미 허구의 등장인물들을 비교할 때, 그 인물을 우리가 아는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과 비교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 권의 책처럼 읽어 내려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