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자기 분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저자가 쓴 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어떤 취미에 갖는 광적인 열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삶의 에너지다.

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 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

미술 글쓰기가 다루는 영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넓다. 우리는 종종 눈앞에 직접 보여 주어야 무엇이 올바른지 이해한다.

활자체는 우리의 일상 풍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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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적 언어의 상응성correspondence은 바울서신서의 한 구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정경에 수록된 모든 바울 서신서의 거의 모든 장에서 이 상응성이 발견된다! - P243

신약 저자 중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신비를 완벽하게 언어화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15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일 신약 저자들이 더 치밀하고 더 방대한 언어화를 시도했다고 할지라도 역설을 제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15

기실 신약 저자들의 저술 속에는 ‘역설’의 양면이 뚜렷하게 견지되고있으며, 그 양면은 섣불리 봉합된 게 아니라 통합되어 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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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인간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독자의 취향은 모두 다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나 자신을 위해 글을 편집한다. 내가 어떤 글에 흥미와 재미를 느낀다면 다른 많은 독자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편집자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하는 두 가지 힘의 원천, 즉 자신감과 자의식에서 힘을 얻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면 그 일은 그만두는 게 좋다.

우리의 연구는 궁극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머나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생존을 위한 투쟁에 가장 도움이 되는 가치들을 표현해 오던 다양한 방식을 대상으로 한다.

내일 아침을 맞이하리라는 보장 없이는 영원한 삶을 꿈꿀 수 없다.

전략적 목표는 전략을 위한 전술 자체에서 태어난다.

그토록 상반된 여러 힘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결국 모든 차이는 음악이라는 단일한 힘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논픽션 작가는 훌륭하고 깔끔한 문장을 써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문장들을 논리정연하게 조직함으로써 과거 회상이 여러 번 반복되기 십상인 복잡한 글의 여정 속에서 독자들이 자칫 길을 잃거나 지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좋은 소재가 지나치게 많은 글을 쓸 때마다 글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든다.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 정보를 전부 담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비관적인 감정에 빠져 있을 땐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다.

하나는 글쓰기가 선형적이고 순차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을 쓸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선행 지식이 아니라 정보를 서술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능력이다.

독자가 정서적으로 글에 개입할 여지를 제공할 것. 작가는 말을 아끼면서 왜 이 소재가 그토록 감동적인지 설명하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글쓰기만큼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작업도 없을 것이다.

오직 쓰기, 다시 쓰기, 다듬기, 구체화하기의 힘겨운 반복 작업을 통해서만 한 편의 명확하고 간결한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명료한 글쓰기는 명료한 사고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따라서 글쓰기가 배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학과 교수도 몇 명 생각이 났다.

나는 글쓰기에서 이 ‘울림’이라는 특성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글은 단순히 앞서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과 경험에 따라 반향을 일으킵니다.

수업에 글쓰기를 도입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불분명한 사고는 글쓰기의 가장 큰 적이다.

학생들에게 글을 쓸 때 좀 더 구체적인 개념과 주제에 생각을 집중하라고 주문했어요. 글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글의 명료성, 보편성, 논리성, 타당성, 정확성 등을 기준으로 보고서를 평가하겠다는 얘기도 했지요.

학생들은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추론 능력이 부족한 거라고요.

"읽기, 쓰기, 생각하기는 통합된 하나의 과정입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아이디어라 해도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 글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깨달은 건 수업에서 글쓰기 비중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글쓰기의 교육적 효과가 다른 어떤 교육 수단도 닿을 수 없는 세밀한 영역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안타깝지만 글쓰기 교육에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다

수업 시간에 얘기한 내용 중 10분의 1이라도 학생이 기억하고 실천에 옮긴다면 그 글쓰기 교사는 운이 좋은 것이다. 잘못된 습관은 간단히 고쳐지지 않는다.

글쓰기를 가르치려면 흡사 외과수술을 집도하듯 학생이 쓴 글을 철저히 뜯어보고 첨삭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학생은 자신의 취약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서만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

글쓰기는 우리가 사실과 개념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

읽기와 달리 글쓰기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글을 쓰려면 연필, 펜,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같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글쓰기는 반복되는 언어적 노력을 통해서 사유를 뒤쫓고 조직화하고 마침내 명료하게 표현해 내는 과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나는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을 말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글쓰기에 있어(따라서 배움에 있어서도) 실패는 종종 지혜의 시작이다

좋은 보고서는 학생들에게서 올바른 질문을 자연스레 끌어냈고 그 자체가 수업을 이끄는 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유 활동이며, 화학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유기합성물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로서 나는 클레만큼이나 나의 잠재의식에서 찾아오는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을 언제든 기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인지 과정의 기적이라 할 그 순간을 경험하면서 나는 글쓰기가 망각 속에 묻혀 있던 과거를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현재에 불러낸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느 작가의 글에서든, 글의 내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억과 직관, 우연이다.

이성은 이 세 가지 요인에 영향받지 않는 나머지 부분을 채운다.

소재로 다루는 사실이나 인물, ‘인용문’, 글의 정서, 이야기의 윤리적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논픽션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 또한 논픽션 작가에게는 독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훌륭한 논픽션을 쓰는 것은 픽션을 쓰는 것보다 여러 면에서 더 어렵고 더 높은 정확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확실히 글쓰기는 질서보다 무질서가 지배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애매성은 소음이다. 불필요한 중복은 소음이다. 잘못된 어휘 사용은 소음이다. 모호성은 소음이다. 전문용어는 소음이다. 과장과 허세는 소음이다. 난삽함은 소음이다.

정보는 당신의 신성한 창작물이고 소음은 오염 물질이다. 메시지를 사수하라.

최고를 위한 값싼 대용품은 없다.

간결한 진술은 독자를 배려하는 최상의 형태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용어가 마치 목발처럼 쓰일 때, 다시 말해 전문 분야의 사람들이 다른 말로는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핑계로 과도하게 그들만의 사적 언어에 의존할 때 생겨난다

사람들은 잔뜩 허세 부리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신과 함께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문장이 이처럼 무겁고 생기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안에 어떤 인간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의 생동감을 살리는 한 가지 방법은 개념명사를 능동형 동사로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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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0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전형적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그만큼 인간은 복잡미묘하다는 뜻 같아요.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글이 많네요. 읽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모찌모찌 2020-09-10 12:04   좋아요 1 | URL
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영역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인데, 흡입력이 있습니다^^
 
필립스 신약 성경 세트 - 전2권 필립스 신약 성경
J. B. 필립스 지음, 김명희.송동민 옮김 / 아바서원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종종 설교나 강의를 한다. 논리의 흐름은 불분명하고, 우리 삶에는 적실하지 못했다. 울림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마음에 부딪히는 단어가 없다. 내 삶에서 길어 올린 언어가 아니다. 고심했다. 골몰했다. 어떻게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닿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진리'라고 믿는다. 우리 삶에 중차대한 원리와 원칙이 '성경'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성경은 하나의 큰 이야기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빚어가는 하나의 드라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들려야 유익을 누린다. 참되고 옳은 글이라도 읽혀야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다. 성경은 계속 들려져야 하고, 읽혀야 한다.


'The Message'의 저자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 ~ 2018)은 거대한 드라마인 성경 이야기가 더욱 친근하게 들려지고 읽혀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삶의 대부분을 성경을 번역하는데 매진했다. 그 결과물이 'The Message' 성경이다. 피터슨은 어떤 계기로 성경을 새롭게 번역할 마음을 가졌을까?  그는 『이 책을 먹으라』 (Ivp)에서 그 이유를 소상히 밝힌다. 바로 J.B. 필립스(John Bertram Phillips, 1906~1982) 목사가 번역한 성경을 읽으면서다. 피터슨은 필립스 성경을 읽으며 성경 텍스트 자체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밝힌다.


필립스는 자신이 교구 목사로 사역할 당시 청년들이 성경 말씀 자체를 어려워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헬라어로 된 서신을 직접 번역하기에 이른다. 부분적으로 번역된 그의 책들은 서신서, 복음서,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등을 차례로 출간하게 되어 신약성경을 완간하기에 이른다. 그의 The New Testament In Modern English는 전 세계에서 팔백만 부 이상 팔렸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경의 맥락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정확성에 치우치기보다는 그 언어에 담겨 있는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신약 성경의 최초의 독자들은 매우 긴급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문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문맥에 따라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그렇기에 필립스는 신약 성경의 맥락에서 살아있는 언어로 새롭게 성경을 번역하기를 원했다. 


그는 번역자의 역할이 신약 저자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한 뒤, 성찰과 반성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적실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 했다. 이는 설교자도 동일하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해석한 뒤, 우리의 현실에 세심하게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언어로 우리를 노출시켜야 한다. 생명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의 개역개정판으로 보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를 필립스는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정말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까요!"라고 번역했다. 그는 원어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맥락 가운데 의미했던 저자의 의도를 표현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우리가 잘 아는 본문으로 비교해보자. 마가복음 1장 11절 하반절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 이후에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다. 개역개정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한다. 이를 필립스 성경은 "너는 내가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네가 정말 마음에 든다!"라고 표현한다. 더욱 생동감이 느껴진다. 원어로 보더라도 'ὁ ἀγαπητός(호 아가페토스)'는 '극진히 사랑과 아낌을 받는 대상'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에 원뜻에 더 가깝게 보인다. 

 

​한 가지 우려가 남았다. 아무리 좋은 번역 성경이라도 언어와 문화, 시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되는 번역의 어려움이다. 그것은 유진 피터슨과 톰 라이트(N.T Wright, 1948)의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된다고 했을 때와 비슷하다. 한국의 상황과 맥락, 문화에 새롭게 잘 접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역서를 통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김명희와 송동민은 이를 훌륭하게 해냈다. 편집의 묘미는 이들도 당당히 필립스와 같은 위치에 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인 '예수에서 교회까지'의 하단에 이런 기록이 있다. "증인들의 기록을 J.B. 필립스와 김명희·송동민이 옮기다" 번역자의 노고를 따뜻하게 존중하는 출판사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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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09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옮긴이를 이렇게 표기한 책은 처음 봅니다. 번역하신 분들께서 정말 뿌듯하실 것 같습니다.^^

모찌모찌 2020-09-09 20:2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번역자들의 노고가 매우 크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우연히 보게되었어요. 매우 감동적이더라고요^^
 

인문학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 과학이나 수학 얘기에 질겁하듯이 과학, 수학이 적성에 맞는 학생들은 영문학, 철학, 미술처럼 숫자나 공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문학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나는 우리가 평생 짐처럼 끌고 다니는 이러한 두려움이 대개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범교과적 글쓰기’는 글의 주제가 무엇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모든 글쓰기가 사유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명확히 전제한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모방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명료하게 사고하는 과학자의 글은 최고의 작가가 쓴 글만큼 뛰어날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주로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생산된 학사 과정 수준의 훌륭한 글쓰기 사례를 소개하는 선집 형태를 띨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단순히 한 문장 한 문장을 써 내려 가는 과정을 통해, 즉 그 주제의 의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추론의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얼마나 자주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분야의 주제를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던가를 떠올렸다

마침내 나는 글쓰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배움이 동일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범교과적 글쓰기’는 단순히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학생을 쓰도록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배우기를 겁내는 학생을 배우게 만드는 기술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고,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그 주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모르는 주제에 대해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이디어, 다른 이들의 수많은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그저 이들의 생각을 순수하게 즐기기만 해도 무척 기쁠 것이다.

배움이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이 말해 준 것 같았다.

어째서 명료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까?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유용한 작업을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 미국인이 얼마나 많은가?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글쓰기는 결코 ‘작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글쓰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이다

글쓰기는 국어 교사나 ‘언어의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감성적인 영혼만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글쓰기는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행위다. 명료하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명료하게 쓸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해 온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접근 불가능할 만큼 전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것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또는 남이 그것에 대해 쓴 글을 편집하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주제는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을 문장이라는 논리적 단위로 잘게 쪼개는 작업을 통해,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씩 써 나가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지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우선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책임을 국어 교사에게만 전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국어 교사의 진짜 전공은 문학이다.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 즉 남이 쓴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 내는 법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국어 교사가 바란다고 생각하는 ‘문학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며 그것이 ‘좋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자기 생각을 힘 있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글쓰기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요인 중 하나가 동기부여다.

동기부여는 글쓰기 교육의 핵심이다.

관심이 있거나 잘 아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훨씬 더 자발적으로 글을 쓰고자 할 것이다.

모든 과목에서 필수적으로 글쓰기를 가르친다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논리 훈련이며 언어는 특정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통해 나 같은 문과 타입의 학생도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숫자와 상징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던 다양한 학문이 글쓰기를 통해 접근 가능한 영역으로 변신한다.

누구에게나 본보기가 필요하다. 예술이든, 기술이든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모방을 통해 배운다.

중요한 점은, 우리는 결국 본보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을 취한 뒤, 허물을 벗고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된다.

그 이전에 언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기능하는지 그 감각을 익혀 체화하지 않고는 절대 글을 잘 쓸 수 없다.

글쓰기의 정수는 바로 다시 쓰기에 있다는 점이다.

본디 의미란 놀랍도록 규정하기 어렵다. 평생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왔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쓴 모든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애매모호하게 표현된 부분이 없는지 검토한다

서두름을 경계하라. 한달음에 ‘쉽게 쓴’ 것처럼 보이는 글은 사실 엄청난 노고의 산물이다. 글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기체와 같다.

글쓰기를 ‘과정’ 중심으로 보는 관점은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거치는 과정, 즉 최상의 결과물을 빚어내기 위한 반복적인 다시 쓰기와 다시 사고하기를 강조한다.

과정이 훌륭하다면 결과는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

글쓰기는 사고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조직하는 행위다.

글쓰기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접근해 그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깨닫게 한다.

개념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창에 서린 성에를 닦아 내는 작업과 비슷하다. 흐릿하고 모호했던 개념이 글을 쓰면서 서서히 명확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범교과적 글쓰기’는 두 가지 원칙, 즉 ‘글쓰기를 위한 배움’과 ‘배움을 위한 글쓰기’에 기초한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곳으로 들어가는 적절한 진입로, 즉 인문적 요소가 담겨 있고 평범한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진입로만 마련된다면 모든 학문이 이처럼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글쓰기가 바로 그 진입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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