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판)
E. P. 샌더스 지음, 박규태 옮김, 김선용 간추림 / 비아토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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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발전은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우리를 성경의 서사로 초대한다.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는 텍스트의 철저한 독해와 더불어 당대의 문화와 배경 이해로 인해 더욱 다채로워진다. 신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훌륭한 작품이 많다. 꼼꼼하게 살펴보고 반복하여 읽으면 좋겠지만 진입장벽이 꽤 높다. 전체적인 흐름을 놓칠 때도 있고, 핵심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탁월하고 친절한 안내자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간결하게 핵심을 정리한 책도 큰 도움이 된다. 


요약판은 방대한 내용을 간결하게 압축하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큰 장점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이미 있어 왔다.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은 존 볼트(John Bolt, 1947~)에 의해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Abridged in data-one Volume)으로 단권 축약본이 나왔으며,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방대한 저서 『교회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또한 베버(Otto Weber, 1902~1966)에 의해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Karl Barth's Church Dogmatics, An Introductory Report data-on Volumes I: 1 to III:4)로 단권으로 소개되었다(모든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신약학에서 매우 중요한 샌더스(Ed Parish Sanders, 1937~)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는 출간된 지 40년 만에야 겨우 한국에 번역되었다. 하지만 내용의 방대함과 더불어 전체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 완독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 읽었지만 오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선용 박사는 이를 위해 책의 내용을 과감하게 줄이고, 독자들이 쉽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판』은 샌더스가 주장하는 핵심을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40주년 기념판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 판』에 동일하게 있는 마크 챈시(Mark Chancey)의 서문은 보다 더 선명하게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서문만 읽더라도 샌더스가 바라보는 유대교와 율법, 바울의 사상에 관한 관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후의 발전 과정과 흐름을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오랫동안 개신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크다. 특히 유대교에 대한 오해가 만연하다. 저자는 그러한 오해가 마치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의 논쟁과 같다고 주장한다. 유대교를 로마 가톨릭교의 역할로 역투영하는 셈이다(82).  이러한 오해의 주된 원인은 유대교에 대한 베버(Ferdinand Wilhelm Weber, 1836-1879)의 묘사라 할 수 있다. 베버는 유대교를 기독교와 대립하는 율법 종교로 그렸다. 또한 유대교의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했다(71). 아마 대부분의 개신교인이 이러한 영향 아래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샌더스는 그동안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유대 문헌을 직접 독해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유대 문헌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를 밝힌다. 이를 저자는 "종교 패턴"이라고 한다. "종교 패턴은 그 종교 신자들이 기능을 따라 그 종교를 이해한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59)." 저자는 유대교의 많은 문헌들(탄나힘, 사해, 외경과 위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여 그동안 암묵적으로 동의한 유대교는 율법주의라는 등식을 해체한다. 


1장부터 3장의 연구는 4장에서 귀결된다. 저자는 4장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유대교가 가진 기본적인 전제를 다시 한번 밝힌다. 즉 '언약' 개념이 유대교 신학의 기저에 전제되어 있었기에 '언약'이라는 용어가 매우 드물게 등장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교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 패턴이다. 저자는 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후 2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언약적 율법주의'가 일관되게 유지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리 퍼져있었으며, 예수와 바울도 알았을 수 있음을 조심스레 추측한다.


5장에서 저자는 바울의 사상이 인간의 비참한 곤경에서 시작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순서가 중요해진다. 기존의 도식이 인간론으로부터 구원론을 시작했다면, 저자는 바울서신에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해결책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구원론으로 시작하여 인간론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셔야 했고, 율법도 함께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율법은 인간 곤경의 해결책일 수 없다. 이렇듯 바울 사상의 핵심은 기독론과 구원론이라 할 수 있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 판』에서는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부록이 있다. 그것은 샌더스의 자서전과 그의 소논문 "다시 살펴본 언약적 율법주의"다. 이 부록만으로도 매우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샌더스의 자서전은 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특히 주요한 세 가지 저서(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예수와 유대교, 유대교: 관습과 믿음)의 출간 과정을 그린다. 각 저서의 방향성과 내용 요약은 각 저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안내해준다. 곳곳에 배어있는 학자로서의 치열함, 대학자이지만 겸손하게 자신과 자신의 연구를 성찰하는 겸손함은 많은 귀감이 된다.


부록 2인 '다시 살펴본 언약적 율법주의'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반박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매우 중요하고도 귀한 논문이다. 2004년과 2007년에 발표한 논문이니만큼 후속 연구과 여러 반론에 대한 샌더스의 입장이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후속 연구를 위한 자료를 안내해주는 부록의 An Annotated Bibliography for Futhe Study도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김선용 박사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하여 소개한다. 바울 신학과 샌더스의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후속 연구를 위한 귀하고 친절한 안내를 통해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의 핵심을 뒤따라 가볼 수 있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많은 분량은 다양한 유대 문헌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그 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핵심적이고 통일된 사상을 소개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렇기에 유대교와 유대 문헌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이 책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된 책으로 살펴보자면, 다니엘 보야린(Daniel Boyarin, 1946~)의  『유대 배경으로 읽는 복음서』 (2020, 감은사)와 프데더릭 J. 머피(Frederick J. Murphy, 1949~)의  『초기 유대교와 예수 운동』 (2020, 새물결플러스), J.C 판데어캄(James C. VanderKam, 1946~)의 『초기 유다이즘 입문』 (2004, 성서와함께)등도 유대교와 유대 문헌 이해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 판』은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독자들은 쉽고 간명하게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파악할 수 있는가? 독자들의 의견은 다양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 목적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수월하게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읽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부록의 자서전과 논문, 후속 연구를 위한 안내를 통해 샌더스의 다른 저작을 독파하고 싶은 마음과 다양한 바울신학 저서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면 이 책의 출간은 대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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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찌모찌 2020-12-08 14:56   좋아요 0 | URL
아~ 신약학 전공은 아니고요.. ㅎ 조직신학은 잠시 했었었죠...ㅎ 그냥 저도 잘 모르니 이것저것 읽으면서 알아가고 있답니다^^ 감사해요 ㅎㅎ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주요 문헌은 (에스라4서를 제외하면) 모두 어떤 종교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관련하여 공통된 이해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을 "종교 패턴"이라 불렀으며, "안으로 들어감과 그 안에 머묾"을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바로 종교 패턴의 의미라 정의했다. 이 종교 패턴의 기초는 이스라엘 선택이었다. - P504

외부인은 회심하면 "안으로"들어올 수 있었고, 내부인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은 선택이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선택받은 이에게 율법을 수여함이다. 선택받은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들이 언약 속에서 누리는 지위를 유지했다. - P504

우리 논지는 많은 고대 유대인이 여태까지 자주 언급되지 않은 기본 가설들을 주요 원리로서 견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원리는 존재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존재했다고 추론해야 한다. 두 주요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선택을 확신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선택에 대한 확신과 함께 하는 요구, 곧 유대인은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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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기능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애정 어린 말로 들렸다.

이 책은 내가 어떻게 목사로 빚어졌는지, 목사라는 소명이 어떻게 나를 빚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은 목사가아닌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기 오래 전부터 나는 이미 목사였다. 다만 그 당시의 나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그 이름이 붙여지고 나자 온갖 것들이, 별로 상관없어 보였던 경험과 기억들이, 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과 일치하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내 손에 꼭 맞는 장갑을 찾은 것과 같았다. 목사는 내게부르심이었고, 내 인생의 모든 조각의 합, 곧 소명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나는, 술과 마약과 온갖 방탕한 생활로부터 극적으로 회심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 이야기들이 가장흥미로웠다. 나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에 필적하는 이야기들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서 들려주는 교회 문화에서 자랐다

드니즈 레버토브(Denise Levertov)가 쓴 시를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도착이다." 자신이 시인으로 성장해 간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그 표현을 보고 나 자신이 목사로 빚어져 온 과정도 그와 같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로 만들어지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내딛는 나의 걸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어, 일관된 삶과 소명이라는 나의 도착점에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통합되었던 것이다.

과거의 목사들과 오늘날의 목사들 사이의 연속성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롭게 등장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 처음부터 다시 제시하고 키워 가야 하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는 세대다.

미국의 문화와 가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무분별한 소비주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비인격적인 역할과 명분과 통계로 만들어 버리는 탈인격적 방법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심지어는 적으로 간주하는 정신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속한 이 문화에서는 매서운 경계심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예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하고 해로운 문화적 오염 물질로부터 내 소명을 지키려면 말이다. 나는 내 개인적인 삶이나 내가 하는 일 모두가 하나님과 성경과 기도로 형성되기를 원했다.

목사들이 교회를 떠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도자란 ‘일을 해결하는 사람’ 그리고 ‘일을 이루어내는 사람’이라는 가정이 문화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목사가 그러한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2천 년에 이르는 우리의 목회 전통에 따르면 목사는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사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공동체 안에 세워진 사람이다

목사가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현장을 중심으로 하고, 언제나 인격적이며, ‘쉬지 않는’ 기도의 일이다.

동시에 목사가 되는 방법을 정리한 청사진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목사가 되면서 나는 목사의 삶은 매우 현장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사의 감정과 가정 생활, 신앙의 경험과 적성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실제 회중에 그대로 작용한다.

목사란 아마도. 목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교회적 합의를 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하는 일을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아마도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목사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 그리고 영혼과 관계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신비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특정 조건 하에서 수행한다. 언제 어디서나 눈으로 보고 측정할 수 있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서 한다. 그 조건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을 깊이 의식하고 싶다. 내가 거룩한 신비를 의식하는 것만큼이나 그 조건을 깊이 의식하고 싶다.

"여호와께서 과연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여기를 알아야 한다.

격자로 정리된 달력으로 혹은 숫자가 새겨진 시계로 추상화된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kairos)다. 잉태의 시간, 궁극적 현존이신 그분 앞에 현존하는 시간이다.

지금, 구원이 창조의 자궁 안으로 발길질하며 들어오고 있다. 주의하라. 준비하고 있으라. "때(카이로스)가 찼으니…." 회개하라. 믿으라.

중세 기독교의 몇몇 전설에 보면 신성한 장소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성배가 보관되어 있거나 언약궤가 묻혀 있는 장소는 지금도 거룩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거룩한 땅,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계발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신성함에 물든 땅. 그러한 전설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청소년기에 나는 그와 비슷한 일이 이 오두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전설은 그렇다 치고,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하나는 지금까지 65년 동안 이곳이 보호받는 장소와 시간이 되어 현재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기도와 묵상, 숙고와 깨달음, 대화와 독서의 중심지로서 나를 더 깊어지게 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나는 지난 경험과 만남을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했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정리되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 자신이 되어 갔다. 그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목사가 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성한 공간은 복잡하지 않고 조용하다.신성한 덮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거대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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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믿음이 율법에 순종함이 아니라 복음으로 들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경험한 일이었다(갈 3:1-5). - P404

더 중요한 점은 성령과 믿음이 오직 이 길로만 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몰아낸 것은 이방인 문제와 바울의 구원론이 천명하는 유일주의이지, 율법에 관한 바울의 오해나 바울의 배경이 결정지은 견해가 아니었다. - P404

인간의 진정한 곤경은 사람들이 다른 주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 P409

아무리 열심히 참회해도, 참회가 주를 바꿔놓지 못한다. - P409

인간은 자신이 지은 범죄들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를 해결할 길은 하나님이 그 범죄들을 보아 넘기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 범죄들을 속하고자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문제를 이루지는 않는다. - P409

인간의 문제는 그리스도라는 주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 P409

바울 사상의 핵심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고 1차 변화를 겪으며 이 변화는 결국 부활과 궁극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요, 이런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영인 사람이라는 것이며, 인간이 그리스도와 이룬 연합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연합을 형성하여 그가 참여를 통해 이룬 연합을 깨뜨리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하여 방금 말한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P422

바울은 이 두 점-즉 하나님의 정의는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지만,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이 그의 구원론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행위도 "안에" 계속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에서 우리가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P427

바울이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말했고, 말한 바를 의미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한 영이다. 현세의 외형은 실제로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이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옮겨가고 있다. 마지막은 실제로 올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실제로 변화될 것이다. - P429

바울이 한 말이 바로 바울이 실제로 생각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세우신 주이시요, 믿는 자는 다 주께 속하며 그와 하나이며, 믿는 자들은 주와 한 몸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주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하는 말이요 하려 했던 말이다. - P431

바울이 구사하는 의 용어(righteousnes terminology)도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의 용어와 관련이 있다. 바울의 글에서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처럼 의로움(인간/인간)과 경건함(인간/하나님)을 구분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여러 미덕 중 하나이지도 않다. - P435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큰 변화가 있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토라에 순종하고 범죄를 참회함을 뜻하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 P435

요컨대, 유대교에서는 의가 택함 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그룹 가운데서 지위를 유지함(maintenance of statris)을 암시하는 용어이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옮겨감을 나타내는 용어(transfer term)다. - P435

즉 유대교는 언약에 헌신함을 "안에" 자리 잡게(들어가게) 해주는 것으로 보고, 순종(의)을 뒤이어 사람이 안에 계속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본다. - P435

반면, 바울의 용법을 보면, "의롭게 되다(bemade righteous" ("의롭다하심을 받다(be justified")는 구원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몸 안에 들어감(getting in)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그 몸 안에 머(stayingin)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 P435

따라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P435

유대교는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이 그렇게 율법에 순종함으로 언약 안에 머문다는 뜻이다. 결국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아니면 행위로 말미암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의롭다"는 단어 그룹을 서로 달리 사용한 데서 생겨난 결과임이 드러난다. - P435

바울이 논박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대교가 합당히 여기는 올바른 경건에 이르는 수단("율법의 행위로")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유대교의 근본 기초들이다: - P448

선택, 언약과 율법, 그리고 이것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른 의"에 합당한 수단(토라에 순종함과 참회)도 잘못이라 주장하거나, 이 수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유대교에서 발견한 문제다: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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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언제나 새 피조물임(고후 5:17)을 말하기 전에, 성령을 소유함이 곧 보증이라고 언급했다(5:5). 따라서 우리는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종말론적 기대를 담은 간명한 구원론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이나 영에 참여함이라는 현재의 실재와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둘은 함께 간다. - P37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주요 구주로 임명하셨다. 그를 믿는 이는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가졌으며, 현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영인 이로 간주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그들이 속한 주로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 P378

바울의 강조점을 틀림없이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뒤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죄를 대속함으로 나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쪽으로 나아간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목적이라고 말한다. - P382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생각할 때 과거의 범죄를 속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주[主]인 이가 바뀜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며, 이렇게 주가 바뀜이 미래에 임할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 P382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이와 같이 전개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고자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율법도 함께 주셨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고자 주어진 분이라면, 율법은 구원의 길일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는가? 아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에 건네줌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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