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심각한 문제는 상당수 성직자, 목회자가 하느님의 현실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자신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 P37

그러나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은 세속 문화의 우상숭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 P37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하느님의 궁극적 현실성을 새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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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멘토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그리고 프레더릭 폰 휘겔(Frederick von Hugel) 남작이었다.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목사, 너무 많이 아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영혼을 ‘이하동문’으로 취급하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기도, 기도와 성경의 결합이었다.

성령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성경)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기도)을 융합하셔서 그것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삶을 형성하신다.

새로 안수를 받은 신학교 졸업생이 그를 찾아와 그가 세인트 조지 장로교회의 목사직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제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로서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자주 화장실에 가고, 휴가를 길게 가십시오."

그런데 이제 내가 목사가 되어 황무지에서 생존하는 법을 찾는 입장이 되자 감정으로는 내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혹 목회의 차원에서 사람들 안에 인위적인 감정을 조작해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자란 교회 문화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점검하는 것이 자기 삶에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영혼은, 자신의 영성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아니면 뜨거운지를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내장 온도계였다.

모든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을 향해 ‘불 붙어’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그리고 특히 설교는 타들어 가는 장작에 불을 더 키우는 부채질 같은 것이었다.

당신들은 악을 희화화해서 자기 가정이나 일터에 들어설 때마다 거기에 엎드려 있는 악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려 해요.

아니면 아예 그 존재를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에 이름을 댈 수 있는 죄목을 붙여서 일망타진하려고 들지요

테레사와 요한은 반대편 끝에서 작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기도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의 방식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개혁하고자 했다.

루터와 칼뱅이 성경과 바른 믿음에 관심을 두었다면, 테레사와 요한은 영혼과 바른 기도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앉아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 혹은 교회에 가고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듣는 것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 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친구, 일터와 동료, 꿈과 환상, 애착의 대상, 손쉬운 만족의 방법, 친밀한 관계의 비인격화, 살아 있는 진리를 소모품으로 축소하는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을 가져다가 정제하는 불의 제단에 놓고-우리 하나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다!-그것이 전부 거룩한 삶을 위해 구속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목사로서 내가 성경과 진리만큼이나 영혼과 기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진리가 일상과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터와 칼뱅은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 일을 아주 잘 해냈다.

테레사와 요한은 자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정직하고 분별 있게 다루려고 노력했고, 우리가 성숙하고 거룩해지려면 모호함과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대로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요구에 맞게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에 맞게 하나님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건 못하건, 좋아하건 말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에 몰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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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를 뗀 이후부터 나는 죽 경쟁하는 인간으로 살았고, 나를 부추기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잘 연마된 나의 경쟁적 본능이 내 주변의 경쟁적이고 소비주의적인 교회 문화 때문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있다고 했다.

경쟁적인 목사에서 명상하는 목사에 가까운 어떤 존재로 내가 발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나는 물었다. 사람들과 특별한 안건 없이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입하지 않으면서 직접적인 인도는 성령이 하시게 하고, 나는 인내하며 부드럽게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숙한 삶으로 안내하는 목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기도와 의식이 기본적인 틀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목회적 관계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자유를,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고 있었다.

장로교는 기도와 예배, 성인과 예술가, 나라와 대륙 사이의 거대한 연속성 안에 나를 이식해 주었다

목사의 자리는 잘 배우면서 훈련받아야 하고, 고통을 겪는 남자와 여자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자세히 알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직장과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이해해야 하는 자리였다.

오순절파와 장로교는 둘 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반대 극이 아니라 연속체를 이루는 양극이었다.

의도적인 안식일을 만들어서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냥 하루 쉬는 것은 ‘사생아 안식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막 지나온 창조의 주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막 지나온 거룩한 주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언제나 우리가 놓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식일은 다시 기억하는 날, 우리가 어디에 있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날이 되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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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이라는 일터에서 목사로 사는 것이 온통 비옥한 농지와 매끄러운 푸른 언덕과 장엄한 지평선과 웅장한 산만 있는 삶이라고 내가 생각했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풍요롭고 멋진 지평선과 봉우리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대륙이라기보다는, 황무지와 월 드러그에 더 가까워 보이는 미국 문화와 미국 교회에서 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목사였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중 안에서, 이 장소에서, 이 일터에서, 이 가족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상상력을 얻고 믿음을 개발할 때까지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모든 성장에는, 특히 성품의 성장, 영적인 성장, 교회의 성장,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영혼의 성장에는 휴지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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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예배로 부름받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과 행동을 인식하게 되는 장소로 계속해서 들어갈 것이며, 깨어서 그 현존과 말씀과 행동에 동참할 것이다.

교회를 공식적으로 세울 준비를 하면서 우선순위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성소를 마련할 것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핵심적 형성의 행위다.

단순히 거룩한 땅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 속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규정되는 사람들이 아니라,하나님의 백성이다.

성막의 가구들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예배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다.

예배란 ‘숱한 세월의 희망과 두려움’을 지나 오면서 남자와 여자와 아기들의 몸에, 동네에, 가정에, 일터에 날마다 조금씩 형성되는 구원이라고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산자의 땅’이 우리 동네에 창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그분과 말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이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예배의 북극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고, 예배의 남극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주님과 말하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는 예배당의 건축 양식이 그 북극과 남극을 유지하고, 어느 각도에서 보나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이 존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인식하는 데 최대한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장로교 전통에서 ‘거룩한 말씀’은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듣는 말씀’과 성경적 성례전인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보는 말씀’, 두 가지다.

말씀을 통해서든 성례전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동일한 것을 말씀하신다.

세례반. 세례는 기독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성례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했음을 표시해 준다.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세례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신다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배의 장소는 듣는 장소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곳은 또한 말씀으로 선포된 것에 대답하고 응답하는 장소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화를 촉발한다.

우리는 회중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예배드리러 올 때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는 단지 보고 듣기 위해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온다. 넉넉한 환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도는 넓게 만들었다.

높이 달린 이 십자가가 하는 또 하나의 선언은, 우리가 망각해서 혹은 부주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아래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예배는 소원 성취를 위한 행위가 되고 찬송은 자기를 축하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크고 포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관계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예배는 감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하게 하고 그 신비에 집중하게 하는 예술이다

예배는 야웨의 구원과 계시에 푹 잠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내 잰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그 관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환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 이상의 환대였다.

정원 가꾸기는, 우리가 먹을 것을 기르고 조리하고 대접하는 일이 곧 창조계를 존중하면서 거기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되게 하고, 또한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살아 있는 창조계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행위가 되게 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천이 되었다

성만찬도 식사다. 주님의 식탁에 모여 앉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준비해서 내놓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것은 궁극적 환대이며, 모든 환대의 모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서로 유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새와 물고기, 흙과 공기, 검정색과 하얀색,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등 우리가 집에서 하는 모든 식사는 강렬하고도 깊은 의미에서 주의 만찬에서 파생되었다.

잰이 하는 일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략 ‘하늘과 땅의 교차로에서 서성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녀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증언할 때 우리는 조언이 아니라 씨앗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씨앗은 싹이 틀 수 있는 땅을 필요로 하지요. 식사는 바로 그와 같은 땅이에요. 식사는,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말과,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말씀과 잡담 몇 마디가 음식과 함께 흡수되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관계의 환경을 날마다 마련해 줍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추상성이나 보편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지혜를 나누어 주지 않으셨어요. 그런 몇 가지 지혜로 사람들이 알아서 하나님이나 자기 이웃을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신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저녁 여러분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취하고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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