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이야기에서 영은 그야말로 생명의 역동적 원리이고 영혼은 피조물, 즉 살아있지만 그 생명의 초월적 기원으로서 영에 여전히 의존하는 피조물입니다. - P72

부활한 그리스도의 생명은 생명을 주는 성령과 철저하게 연합되어 있으므로,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모든 생명의 원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소망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 P76

이처럼 성령은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생명 자체의 운동인 자기 초월적 반응을 일으키며 작용합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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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예배가 한 주간의 중심이다.

예배란 성경이 우리가 한 주 동안 텍스트로 삼고 살아가야 할 권위적인 책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로 우리의 집단적 삶을 재구성하고, 서로를 경쟁자나 위협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만나는 행위다.

목사의 소명은 사람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게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떠올렸다

성경은 "날마다 죽노라"와 같은 비유적 의미에서든,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와 같은 사실적 의미에서든, 죽음에 많이 집중한다.

부활은 우리가 묻히거나 화장된 이후의 일하고만 상관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과 상관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활은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 상관이 있다.

"무덤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죽음을 연습한다. 그러한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부활을 살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처음으로 죽음을 암시받는 행위다. 먼저 죽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

목회는 자기 자신이 주목받으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려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장 목회를 잘하는 것이지.

이 소명을 건강하게 지키려면 끊임없는 자기 부인, 자기 감춤이 필요해

목회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익명성을 가지고 있는 일인데, 그 익명성이 오히려 복이지

목사들의 경우, 쉽게 눈에 띄면 눈에 띄기를 원하게 되거든

오래 전에 친구 목사가 내게 목사의 자아에는 ‘질병의 악취가 있다.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자아의 냄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어.

세례식과 장례식은 이 제거의 과정에 유익하다. 목사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례식과 장례식에서 목사는 부수적인 존재로까지 비쳐진다.

모든 관심과 감정은 세례를 받는 사람, 묻히는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는 것이고, 권리의 포기이며 죽음이다. 그렇게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천하는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례는 부활을 증언하는 죽음이다. 세례식에서나 장례식에나 목사는 전면에 나서지도 중심에 서지도 않는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처음에 그 시편을 기록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거칠고, 현실적이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할 만한 면이 거의 없고, 전혀 경건하지도 않다.

히브리인들이 기도할 때 사용한 언어는 그들이 자녀를 꾸짖을 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산과 강과 독수리와 비둘기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불의와 배신에 대해서 신랄하게 불평할 때 썼던 언어와 똑같았다

기도를 위한 특별한 언어가 따로 있고, 나머지 것들을 위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았다. 사업상의 언어, 사회의 언어, 길거리 언어, 기도 언어가 다 같았다.

나는 두 언어의 세계에서 살았다. 성경 언어의 세계와 현대 언어의 세계다

나는 날마다 두 언어의 경계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축복하시고,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데 쓰시는 성경의 언어를, 우리가 잡담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길을 안내하고 사업을 하고, 노래를 하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데 쓰는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다.

"친밀함이지. 모든 사람의 이야기에 우리가 한 부분이 되고 그들이 우리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는 친밀함 말일세. 평범한 삶과 구원의 삶이 뒤섞여 있는 그 일상이 그리울 거고, 기도로 발전되는 대화가 그리울 걸세. 이 문화의 세속성과 개인주의를 은연중에 뒤집는 예배와 환대도 그리울 거고.

이야기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언어의 방식이다.

내가 기준으로 삼고 사는 텍스트인 성경은 이야기로 전해진 삶의 방식에 오래, 깊이 잠기는 책이다.

이야기는 사람을 그들이 하는 일로 축소하거나, 그들이 일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축소하거나, 그들의 외모로 축소해서는 그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언어의 방식이다.

이야기가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듣기와 말하기가 동등하다

이야기는 언어를 사용해서 패턴과 의미를,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선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발견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작위적이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경험과 꿈, 임무와 노래, 약속과 배신 속에서 단어와 문장은 환대의 자리마다 이야기를 감지하고 드러내고 구성한다.

예배는 오락으로 대체되었고, 통계가 케리그마를 이겼다.

이야기는 언어를 사용해서 패턴과 의미를,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선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발견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작위적이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경험과 꿈, 임무와 노래, 약속과 배신 속에서 단어와 문장은 환대의 자리마다 이야기를 감지하고 드러내고 구성한다.

예배는 오락으로 대체되었고, 통계가 케리그마를 이겼다.

목사는 고유한 소명이라네. 더 낫다거나, 특권이라거나,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볼 때 고유한 소명이고,(그만큼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고유한 소명일세.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소명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다네.

그러한 고유성 중 하나는 다른 소위 전문직보다 우리 직종이 훨씬 더 많은 실수를 한다는 것일세.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많은 경우(늘 그렇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라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예수님을 따를’ 때의 느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네.

교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이 소명으로 인해 우리가 서게 된 자리는 곧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증언하라는 뜻이기도 하다네. 구원과 거룩함의 신비를 살아내라는 뜻이지.

이렇게 모호함 가운데서 내게 좀더 분명한 길을 제시해 준 시편의 구절은 바로 이것이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현재의 맥락에서 내가 생각하는 ‘교만한 자’는 ‘자신의 일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목사들이라네.

내가 목사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게 해준 것 두 가지는 예배와 가족이었다네.

매주 회중과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내 중심을 잡아 준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네.

예배를 희석시키거나 예배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허락될 수 없었네.

또한 가족은 내가 날마다 실천하는 희생적 사랑이 현실적이고, 신실하고, 인격적일 수 있게 지켜 주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랑의 삶에서나 너무도 공개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 준다네.

그렇게 공개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우리는 허세를 부리며 살 수도 있고, 자신감은 넘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용감하게 친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 수도 있다네.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본다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반응하는지를 사람들은 보고 그것에 따라서 좋게 혹은 나쁘게 영향을 받는다네(우리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 바로 주일 예배일세).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은, 예배든 가족이든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일세. 너무 애를 쓰면 오히려 자의식이 생기고, 우리의 자아와 실행력과 명성이 우리가 실제로 헌신한 일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네.

목회의 소명이 실현되는 일차적 맥락인 회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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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냥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웠다.

미국에서 목사의 소명은 소비주의 종교로 무력해지고 진부한 언어로 게을러질 위험에 언제나 처해 있다. 성 마리아 신학교에서 보낸 그 세월과 시간들은 그 무력함과 게으름을 막아 주는 방어막이었다.

현장에 계신 하나님, 일터에 계신 하나님, 노숙자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 주변의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우리 안에 그리고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서로의 글을 우리는 매주 듣고 토론했다.

"나를 보지 말고, 저기 아래에 있는 그림자를 보세요. 그림자놀이를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지도 몰라요.

자신이 매달려 있는 행글라이더의 인대와 힘줄과 조직을 하늘 높이 띄워 주는 성령을 안다. 이 지상에 자신이 그림자놀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드리우는 연약해 보이는 교회를 안다.

목사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의 상당 부분이 배후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일요일에 보는 것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요일에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견고하게 해주고 거기에 무게를 실어 주는 조화로움과 리듬은 목사와 사람들의 삶 깊은 곳에서 서서히 조금씩 형성된다.

함께 있지 않고 서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사와 회중이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닌, 그 보이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일요일에 보는 모습, 그리고 주중에 가끔씩 보게 되는 그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나머지 날들의 모습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삶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조화와 리듬을 감지하게 해주는 공동의 회중 정체성을 개발할 방도를 찾고 싶었다.

일요일에 우리가 서로 아무런 혼란 없이 조화롭게 오가고, 신속하고 품위 있게 하나님께 응답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의 작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일요일의 예배에서는 그들이 나를 보지 않을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

일요일의 예배는 그들이 나를 보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을 전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일요일의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신 자리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과 그들의 삶에서 하고 계시는 일에 그들을 초대하는 자리다.

그날은 가능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들이 나 자신이나(내가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에 주목하게 만들지 않겠다.

나는 아멘 예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카렌이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린도에 세워진 신생 교회를 향해 바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는 예수의 ‘예’가 찍혀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전하고 기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기도하는 것에는 위대한 ‘아멘’, 하나님의 ‘예’와 우리의 ‘예’가 아주 또렷하게 찍혀 있습니다(고후 1:20, 「메시지」).

나는 위대한 아멘인 하나님의 ‘예’와 우리의 ‘예’의 지지 아래 회중과 목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게 하는 데 그 편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같이 사는 동료로 서로를 받아들이도록 회중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고, 회중과 목사의 관계 형성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나는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실제로 느끼게 해주는 간단한 대화를 기록했다.

언어에서 가장 인격적인 단어가 이름이며 따라서 이름이 관계를 맺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이름을 많이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할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돌아보고,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할 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돌아보았다.

목사로서 성공하는 것이 부모로서 실패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이미 실패한 목사다. 오늘로 사임을 해야겠다.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숙고하고 제대로 반응하며 긴장을 풀고 싶습니다. 그래야 여러분 앞에서 숙고하고 제대로 반응하며 긴장을 풀 수가 있습니다. 서두르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마음이 너무 분주합니다.

나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화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서 다 짜내 버리는 문화입니다.

나는 그 문화를 충분히 관찰하고 잘 알아서, 나의 신은 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회중이 이해하게 돕고 싶습니다. 이건 감지하기 힘든 미묘한 유혹입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심과 어려움, 열망과 즐거움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여러분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실패할까 안전부절못하는 상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예배로 인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순종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인도하고, 설교할 때는 성경을 이해하기 쉽고 살아 있는 현실의 언어로 전달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인의 존엄성을 회복해 주고, ‘그저’ 평신도일 뿐이라는 나약한 이미지를 없애 버릴 수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목사가 되게 해준다면, 나는 그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장로가 되게 해주어야 했다.

그들의 은혜로 나는 꾸준히 순종하는 목사의 소명에서 중요한 부분인 ‘보이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계발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쁘지 않은 목사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결정에서 생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이제 내가 ‘바쁘지 않고’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형성된 그 목사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우리 회중의 남자와 여자들이자신의 일터에서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시간과 에너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그들이 전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긴 것처럼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겨서 회중 전체가 일을 분담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을 함께하면서 우리 회중이 확신하게 된 것 하나는, 기독교 용어 중에서 ‘전임 기독교 사역’이라는 말이 영혼에 참으로 해로운 문구라는 사실이었다. 그 말이 사용될 때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일이 단절되고, 우리의 예배와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단절된다.

목사들은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상기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엉망진창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이지요. 하지만 기적처럼 보이지 않고 기적과는 정반대로 보이는 기적입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을 서서히 인식하다가 그것이 사람과 상황 안에서, 말과 행동 안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놀랍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적으로 삽니다. 기적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저에게 회중이 생기면 저는 인내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인생에 행하시는 일을 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공동체 안에서 유일하게 자기 마음껏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봐 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잘하는 일이 없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잖아요.

상당 부분의(어쩌면 대부분의) 목회는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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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하느님은 당신의 선택적 의지와 행위에 있어서, 또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아버지로 드러남으로써 인격적입니다. - P59

또한 아버지로서 영원히 당신의 아들과 관계하기에 그분은 아버지, 아들, 영의 연합과 일치 가운데 영원히 인격적입니다. - P60

이러한 연합과 일치 가운데, 형언할 수 없는 신적 신비는 영원히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인격들 없는 하나의 인격적인 하느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P60

이러한 성서의 증언은 신학이 한 분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통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도록 자극합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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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게 목사와 작가는 하나의 정체성의 양면이었다. 목사라는 소명에 작가를 덧붙인 것이 아니고, 작가라는 소명에 목사를 덧붙인 것이 아니었다.

요한에게 작가와 목사는 같은 것이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는 요한의 그러한 면을, 즉 그가 목사이면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걸을 때 오른발, 왼발 하듯이 그는 목사, 작가였다.

영성 신학이란 실제로살아내는 신학이며, 글을 통해 삶의 기층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다.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내 글쓰기는 곧 성경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은 회중과의 대화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즉 신비로 천천히 들어가는 글쓰기였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탐험하고 발견하기 위한 글쓰기.

언어 안으로 내가 들어가고 언어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글쓰기.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되어 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혹은 알아채지 못했던, 혹은 숨어 있던 것을 창조해 내는 글쓰기

집중하기 위한 글쓰기. 기도의 행위로서 글쓰기. 황무지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내 목회 소명에 동화되어 관계의 내면을 드러내 주었고, 신비로 나를 데려가 주었고, 상상력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 성경의 언어세계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경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게 훈련시켜 주었다.

그 글쓰기는 우리 회중의 언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언어의 신성한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목사로서 내가 하는 일은 온통 언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언어와 상관이 없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계시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가르치셨고, 기도하셨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여하고 믿고 듣고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삶의 방식은 무엇보다도 현장 중심적이고 인격적이다.

기도의 삶이다.

언어는 말로 하고 글로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한 우리 회중에 속한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도 들어야 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언어의 상당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리고 분명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삶 전체라는 것이었다.

버리면, 특히 하나님, 예수님, 기도, 믿음과 같은 말들을 대상화시켜 버리는 불임의 생명력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 얘기’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황무지의 시기 동안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목사와 작가의 공통 기반은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모든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언어는, 모든 진정한 언어는, 도서관에 소장될 법한 정보와 지식을 정확하게 말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교제에 더 가깝다.

진정한 언어는 생명을 지향하는 관계를 맺는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 용서와 구원과 정의가 그 안에 있다.

진정한 언어는 혀와 귀가 다 필요하다.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글에서 내가 배운 것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얘기-즉 인격이 제거되고, 관계가 없고,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언어-는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다

목사와 회중은 자신들이 언어를, 이 신성한 언어를, 이 하나님의 말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나는살아내는 신학과 성경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글쓰기를 통해 목회적 삶의 기층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반복하거나, 따라하거나, 맥락 없이 증거 본문을 대지 않는다. 그 글을 쓰고 있는 요한 안에서 성경이 재창조되었다.

그는 성경을 완전히 소화했다. 살아낸 성경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살아낸 것을 글로 쓰고 있다. 그의 책은 결코 ‘받아쓰기’가 아니다.

내 경우 그 이야기는 소명에 따르는 성숙의 과정이다.

내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 문구는 ‘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하기’이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언제나 결국에는 생겼던 결과는, 인생이 가치 있어진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기독교적 삶의 실천 가능성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실제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일과 죄, 가정과 이웃의 혼란 속에서 내 임무는 기도하고 방향을 안내하며 복음을 실제로살아내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인내하며,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말이다.

인내하며: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머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빠르게 혹은 쉽게 할 방법이 없다.

현장에서: 나는 경제, 날씨, 문화, 학교 등, 이곳의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의 그 어떤 면도 추상화되거나 경건하게 이상화되지 않게 할 것이다.

인격적으로: 나는 그들을, 그들의 이름과 집과 가족과 그들의 일을 알 것이다. 그렇다고 사생활을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프로젝트나 대의명분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계시에, 구원의 이야기에 우리를 집어넣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그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거기에 순종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형성하신 믿음의 공동체다.

우리가 서로를 기능이 아니라 이름으로 알고 사귐으로써 함께하는 삶의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어떤 책임을 맡느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게 되는가의 관점에서 예배하는 회중의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믿음에 대해서, 의심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심리 조작이 없는 예배. 프로그램이 없는 공동체. 내가 목사로서 정말로 즐거워했던 것은 이러한 모호함의 상태,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서서히 얻게 되는 통찰과 하게 되는 결심은 신앙의 고백으로 발전되고, 사전 계획 없이 ‘서로’ 자발적으로 가지는 관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환대의 문화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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