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하나님에게 곧바로 연결되는 도관으로 보는 이러한 개념은 토비트서에서 새로운 부분으로 넘어가며, 토비트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하늘에 있는 보고에 돈이 쌓인다고 가르친다. - P254
이는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 두루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집회서와 복음서들에 있는 그 개념의 흔적을 밝혀냈다. 놀랍게도 그 개념은 학문적인 신학계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 P254
랍비 문서들을 보면 하늘의 보고라는 이미지는 5세기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일직) 팔레스타인의 일상 언어의 한 부분이 되었다. - P254
구제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한 (그래서 "기쁘고 신속하게, 또 그 일을 제대로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해" 구제를 하는 한), 그 사람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된다. - P273
이렇듯 구제는 단지 벌금의 변제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 P273
가난한 사람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것은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것과 같다. - P281
하나님은 성전에서 드리는 동물 희생 제사가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그 제물을 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가 베푸는 구제도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셔서 경외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단이 있게 하신다. - P281
안셀무스를 이해하는 핵심은, 그가 변제와 형벌을 명확하게 구분했다는 데 있다. - P331
이는 현대 독자들이 대체로 주목하지 않는 측면이다. 안셀무스의 추정에 따르면, 형벌은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를 겪는 것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반면 변제는 악행에 대한 자발적 배상이다. - P331
안셀무스의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변제를 하신 것이지, 형벌을 겪으신 것이 아니다. - P331
엄청 좋은 책!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입문서다.이 책에서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신학이 폴 틸리히, 칼 바르트 등과는 어떤 지점에서 다른지도 설명한다. 부록의 해제 또한 일품이다. 얇지만 무거운 책! #조직신학서론 #판넨베르크 #비아
교회 공동체는 잠재적인 보편적 상징 위에 자신이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P109
교회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의 활동을,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인간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게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 P109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실현할 때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사람들은 서로 형제자매가 됩니다. - P109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피조물인 인간의 운명, 곧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함으로써 그분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과정을 실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영을 통해 아들은 창조하고 화해하며, 피조 세계와 연합을 이루는 하느님 활동의 경륜 전체를 구성합니다. - P115
유한한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영원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은 세계의 미래는 물론 당신 자신의 미래이며, 과거의 모든 것도 당신 자신 안에 있습니다. - P81
그러므로 하느님의 광대무변함과 영원함은 시간과 공간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영적인 장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의 창조 활동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은 이치에 맞습니다. - P81
할례는 격리된 행동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개인에게 부여한다(3절).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이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음을 의미한다(2:17-18을 보라).
5:6은 새로운 논점을 도입하는 것 같다. 바울은 청중의 기대대로 할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맺는 대신, 무할례든 할례든 중요하지 않다는 한결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여기서 바울은 3:28의 세례 문구를 재현한다(6:15도 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자리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할례를 받든 받지 않든 그 자체는 조금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육체"("self-indulgence", NRSV)에 대한 경고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가 윤리적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 서신에서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는 항상 특정 존재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특정 존재에게 예속되어 있다(예. 롬 6:15-23을 보라).
"서로 종노릇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한계를 극적으로 역설한다. 하지만 기독교 공동체 안의 종살이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종살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인습을 거부한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라는 인용문은 레위기 19:18에서 유래한다. 복음서 전승에서 예수님은 이 계명이 하나님 사랑 바로 다음에 온다고 인정하신다(마 22:39; 막 12:31; 눅 10:27). 야고보서는 이 계명을 "최고의 법"이라고 부르고(2:8), 바울은 로마서 13:9에서 이 계명을 다시 인용한다.
바울은 5:16-26에서 성령의 삶과 육체의 삶 사이의 이분법을 전개한다. 바울이 인간의 몸 자체를 비하하는 유사 영지주의 논증에 가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가 ‘육체’라는 용어를 여러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이 본문에 포함된 구체적인 악덕과 미덕은 수도 많고 다양하지만, 공동체 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다.
바울이 이 목록을 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이 목록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악덕 목록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 들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에서 절정에 이른다.
범죄한 이들을 회복하는 책임이 공동체 전체에 있지만(1a절), 각 개인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1b절)
6:14-17에서 바울은 논쟁에서 돌이켜 이제는 자신의 복음 이해를 강력하게 재진술한다. 그는 시작하면서 자신의 견해와 교사들의 견해를 대조한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육체, 아마 그들의 할례를 자랑하기를 바라지만,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이다
6:14-15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증언된 확신을 다시 한번 간추린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과 공동체, 사실상 세상 전체에 단 하나의 배타적 주장을 제시한다는 확신이다.
바울은 마지막 호소에서 자신의 복음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기 몸의 "흔적"을 얘기한다. 이 흔적은 바울이 수고하며 견뎠던 박해를 상기시킨다(참고. 고후 11:23-25). 바울은 이 흔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가 종이 된 것을 나타내는 낙인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다(예. 롬 1:1; 갈 1:10; 빌 1:1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