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울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게 인간 된 도리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거짓말하지 않는 게 인간 된 도리라고 말이다.

이 잘못된 풍토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이제 우리는 이 둘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해!"라고 할 때도 어디까지나 부정확한 표현을 삼가라는 뜻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진실을 말할 것, 전체적인 상황을 공정하게 이야기할 것, 정보를 잘못 전달하지 말 것, 얼버무리지 말 것, 정보를 숨기지 말 것,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 ‘그럴듯한 주장’을 입에 담지 말 것,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 뻔뻔하게 정보를 취사선택하지 말 것, 진짜로 열불이 났으면서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인 척하지 말 것, 그저 제 잇속을 따져 움직이면서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척 속이지 말 것.

우리가 아이들에게 절대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코 우연히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건의 실상이 존재한다는 점, 실상을 알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 행복해진다는 점이다.

신앙을 제일로 여기던 옛 종교인들은
도덕적 진리를 위해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고문했다.
실익을 중시하는 요즘 현실주의자들은
육체적 진리를 위해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고문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어느 편에서 싸웠는지다.

개혁한다는 건
형태가 찌그러진 무언가를 보고
모양을 잡으려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모양이 어떤 건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진화나 진보라는 단어를 붙들고 말씨름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개혁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reform’이라는 단어에는 ‘form’이 들어 있다.

알아서 전개되는 게 진화고, 대개 잘못된 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게 진보라면, 개혁은 이성적이고 단호한 인간을 상징한다.

미신과 사회 여건에 영향받지 않도록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외딴 섬에서
홀로 아이를 키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섬과 호수와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종교를 선택하지 않아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

종교를 배제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곧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독히도 음침하고 기괴한 환경.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구나 자유롭게
종교에 관해 논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도 종교를
입에 올릴 수 없다는 뜻이다.

박해의 본질은 스미스필드에서 자행된 고문이나 화형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물로든 벼슬로든 그 나라에서 권력을 쥔 자가 시민들이 믿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나 철학으로 시민들을 지배하는 것, 이것이 박해의 본질이다.

새해의 목적은 새해를 맞이하는 데 있지 않다. 영혼과 코, 발과 척추, 귀와 눈을 새롭게 하는 것, 바로 여기에 새해의 목적이 있다.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결심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이후의 삶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효율’이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행동이 이루어진 뒤에라야 그 행동이 효율적이었는지 비효율적이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 일에 대한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효율에는 선택권이 없다. 행동이 완료된 뒤에라야 성공인지 실패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을 시작하려면 개략적으로라도 옳고 그름이 있어야 한다.

승자를 응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응원받는 그 순간에 그는 승자가 아니었으므로. 이긴 편에서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싸움이란 본래 어느 쪽이 이길지 알아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나른한 감상주의자일 것이다. 늘 뒤를 돌아보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저 승리만을 좋아한다면, 항상 전투에 늦으면 된다.

용기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용기는 죽을 각오로 살기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적에게 에워싸인 군인이 무사히 탈출하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와 살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함께 필요하다.

삶에 대한 집착만으로는 안 된다. 삶에 집착하면 겁쟁이가 될 테고, 그러면 탈출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는 지독하게 무심한 태도로 살고자 해야 한다. 물을 갈구하듯 삶을 갈망하고, 포도주를 마시듯 죽음을 들이켜야 한다.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눈길을, 빗길을 조심조심 걷게나
길은 아주 단순하지만,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아이처럼 논다는 말은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고 중요한 일인 양 논다는 뜻이다. 해야만 하는 허드렛일이나 작은 걱정거리라도 생기면, 그렇게 거대하고 야심 찬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어른들에게는 정치와 상업, 예술과 철학에 쏟을 힘은 있어도 놀 힘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직시하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는 도저히 잊을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사실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직시하는 이들은 우리보다 현명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들이 분명하다.

우리 주위에 위인이 없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늘 위인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떠받들 위인을 찾느라 손과 무릎이 바쁜 사람은 절대 위대해질 수 없다.

디오게네스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의 잘못은 너무도 명백하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인간이 정직한 동시에 부정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위선자는 몹시 불행한 사람이다.

가장 정교하고 고된 지적 예술에 온 힘을 쏟은 끝에 아무도 모르게 걸작을 완성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여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머쥐어도 칭찬 한마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천재요,
무인도에 사는 나폴레옹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
말들이 있는데,
살다 보면 그런 말을 꽤 자주 듣게 된다.

멀쩡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신중하게 내릴 수 있는 정의는 하나뿐이다.

멀쩡한 사람이란 가슴에는 비극을,
머리에는 희극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술가적 기질은
아마추어들을 괴롭히는 병이다.

톨스토이식 해석을 지지하는 자들은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누우면 어린양처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이 주도한 악랄한 합병이자 제국주의다. 사자가 양을 먹어 치우는 대신 양이 사자를 흡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자는 과연 어린양과 함께 누워서도 당당하고 흉포한 성질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교회가 풀려고 했던 문제이자 교회가 이루어 낸 기적이다.

겸손은 자신을 점으로 줄이는
화려한 기술이다.
작은 점 혹은 큰 점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아예 없는 점.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복잡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우주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갖가지 특성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자기에게 살짝 짐승 같은 면도 있고, 악마 같은 면도 있고, 성자 같은 면도 있고, 시민 같은 면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말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자기에게 약간의 광기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가 자기는 멀쩡하다고 굳게 확신하듯이, 유물론자의 세계는 몹시 단순하고 견고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을게"라고 말하면서 도덕이 시작된 게 아니다. 이런 거래가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 거룩한 곳에서는 우리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말자. 그래선 안 된다"라고 말한 흔적은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성을 얻었다.
그들은 담력을 기르지 않았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 싸웠더니 자기도 모르게 용감해졌다.
그들은 깨끗해지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단에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칠면조의 삶과 죽음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나, 스크루지의 영혼과 크래칫의 몸은 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관념적 지식을 위해 인간의 가정을 불행하게 하지도, 축제를 망치지도, 선물과 선행을 모욕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본래 다 위험한 법이라네.
나도 한때는 그랬었지."

겸손은 주로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에게는 늘 새로운 욕구가 생겼고, 새로운 욕구가 자비심을 웃돌기 일쑤였다. 향락의 위력이 기쁨의 반을 망가뜨렸다. 인간은 즐거움을 쫓아다니다가 가장 큰 즐거움을 잃었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키우고 싶으면 스스로 작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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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유는 분리, 폭력 장면, 단조로운 시간 가운데 갑자기 생긴 의식처럼, 어떻게 언어 형태로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트라우마나 암중모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 P13

이러한 최초의 충격은 책을 -꼭 철학책이 아니라도- 읽으면서부터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물음이 되고 문제가 되지요. - P13

여기서 민족 문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문학으로부터 단지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서 부재하지만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닌, ‘부재하는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 P13

제가 받아들인 식의 종교적 감성은 규정된 신조보다 책들 -성서와 고대 랍비들의 사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주해들- 에 대한 존중으로 이루어졌스니다. 이는 약화된 종교적 감성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 P16

성서는 책 중의 책으로 거기에는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갖도록 말해지게 된 첫 번째 것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주석가들에게도 동일한 차원의 심오함을 열어 주는 형태로 언급되어 있다는 감성은 ‘신성한 것‘에 대한 의식을 문학적인 판단으로 간단히 대체한 것이 아닙니다. - P16

환원 불가능하고 궁극적인 관계에 대한 경험은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 P85

종합이 아니라, 인간들의 대면에, 사회성에, 그것의 도덕적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 P85

그런데 우리는 도덕이 전체성과 전체성의 위험에 대한 추상적인 반성을 넘어서 부차적인 층위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 P85

도덕은 독립적이면서 예비적인 범위를 갖습니다. 제일철학은 윤리학입니다 - P86

‘초월‘이라는 말은 정확히, 우리가 신과 존재를 함께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 P86

마찬가지로, 인격들 사이의 관계에서, 초월은 나와 타자를 함께 사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마주함의 문제입니다. - P86

참된 결합이나 참된 조화는 종합의 조화가 아니라, 얼굴 대 얼굴의 조화입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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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규정하는 것과
법이 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쁜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해 좋은 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쁜 법을 저지하기 위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지적 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지극히 영적인 죄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에 매듭지은 일뿐만 아니라 최근에 매듭지은 일까지 뒤엎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한 ‘사상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언론은 결정을 밀어붙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대중을 선동한다.

지금 정말 필요한 건 잘못된 결정을 무효로 돌릴 강단이 있는 지도자다.

그리고 이것이 힘을 가늠하는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온 우주를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위대한 문학 작품은 모두 은유다.

《일리아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전투이기 때문이요,

《오디세이아》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여행이기 때문이요,

욥기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요즘, ‘논리’라는 것이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실, 대부분의 논리는 방어하는 데 쓰는 무기이지 생산하는 데 쓰는 도구가 아니다.

지적 체계를 쌓는 사람은 느헤미야처럼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흙손을 들어야 한다. 탄탄한 체계와 상상력이 흙손이라면, 논쟁은 칼이다.

실제로 광범위한 지적 활동을 경험하다 보면, 논리라는 것이 주로 논리학자를 무찌르는 무기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비결은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미치광이는 조그마한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0분의 1의 진실 안에 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야기나 어떤 음모,
또는 어떤 관점 밖에 있는 우주를
상상하지 못한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진가를 알아보지만,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이 이야기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우주를 이해할지는 몰라도 자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아는 그 어떤 별보다 더 멀리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나 너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앙 아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이름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잊었다.

우리가 상식, 합리성, 현실성,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실히 잊어버렸음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정신, 예술, 황홀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 기억한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그저 인간일 때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을 때뿐이다.
땅을 풍경 삼아 서 있으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되고,
집 앞에 서 있으면 그 집의 주인이 된다.
인간들이 연대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죽음과 영계靈界가 존재감을 강렬하게 내뿜는 곳뿐이다.
마음에 스며든 신성한 어둠을 떨쳐 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아주 분명해진다.

예술은 인간의 독특한 특징이다.

인간은 늘 길을 잃었으되,
이제는 찾아갈 주소마저 잃어버렸다.

늘 뒤꽁무니를 보고야 무엇이 지나간 줄 아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실체를 깨닫는다.
해 질 녘에야 그날 일을 상기한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짧게 줄이는 게 문학이다.
요즘 철학책들이
문학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된 이상理想을 추구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이상에 눈을 돌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싫증이 날 만큼 기독교를 탐구한 적도 없다.
사람들은 정치적 정의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정치적 정의를 기다리다 지쳤을 뿐이다.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고,
나쁜 소설은 저자에 관한 진실을 들려준다.

평범한 사람들만 기이한 것에 기습당한다. 기이한 사람들은 기이한 것을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순간이 훨씬 많으나, 기이한 사람들은 늘 삶이 따분하다고 불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 성경 대부분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고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등장인물 중 유일한 주인공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인간이 해와 달을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듯이,
인간은 종교 역시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다.

욥기가 지적으로 아름다운 건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 말이다.

아무리 광기를 끌어올려도 현대 궤변가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이상은 없다. 오래된 이상 중 하나를 완성하는 게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어느 날, 케케묵은 격언이 현실이 되면 지축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해 아래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은 단 하나, 해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슬픈 일을 겪은 사람이 음울한 철학을 갖게 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슬픔과 비관은 정반대다. 슬픔은 무언가에 가치를 두어서 생기지만, 비관은 그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질고 잔인한 일을 많이 겪고도 누구보다 세상을 낙관하는 시인들을 자주 보지 않는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그들은 늘 인생을 낙관한다.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역겨울 지경이다.

시인은 보통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뛰어넘는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위에 올라선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묘하고 칙칙한 것을 모두 편견이요 미신이라 매도한다.

과똑똑이는 사람들로 바보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시인은 사람들로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시인은 종종 돌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평범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과똑똑이는 대체로 땅을 차지하고 왕관을 쓴다.

현대 세계 전체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다.
실수를 계속하는 게 진보의 일이고,
그 실수를 바로잡지 못하게 막는 게 보수의 일이다.

자아는 메두사다.
허영은 다른 사람의 거울 속에서
메두사를 보며 살고,
교만은 혼자 메두사를 연구하다가
돌로 변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근간을 뒤흔든 크나큰 실수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섞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꿈꾸는 ‘이상’에 맞춰 이 세상을 계속 변화시킨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상을 바꾸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비록 느리더라도 사람들 가운데 정의를 구현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는 정의와 자비의 타당성을 즉각 의심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새 예루살렘이 계속해서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상에 맞춰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에 이상을 바꾼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권력을 이해하는 열쇠는 간단하다.
그들은 항상 진보 쪽에 서려고 애쓴다.
항상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다.
상류 계층에게는 참 쉬운 일이다.
상류층에게 새로움이란 필수품에 가까운 사치품이다.
과거와 현재가 너무 따분한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미래를 노려보며 아가리를 한껏 벌린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든,
우리가 내놓은 지혜로운 말은 이 세상 몫이나,
우리가 내뱉은 어리석은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몫이다.

재산은 민주 국가의 예술이다. 모든 인간이 하늘의 형상을 따라 하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나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론은 언제든 들불이 될 수 있다.
이견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들불.

견해 차이 못지않게 무관심도 신성하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잊힌 듯하다. 대중의 무관심 역시 하나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여론은 대개 현명하다. 모든 사람에게 ‘미네랄 섭취’에 대해 투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치자. 투표용지가 한 장도 수거되지 않으면, 나는 아마도 시민들이 투표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은 이미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무성한 나무처럼 사방팔방 잘 자랄 수 있는 사람은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서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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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 도입부로 읽는 네 편의 복음서 비아 시선들
모나 D. 후커 지음, 양지우 옮김 / 비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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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마무리가 주는 여운을 뒤로하고 또 다른 시작이다.

거창한 계획과 다짐보다, 소소한 일상을 단단히 살고싶다.


독서도 마찬가지.

이런저런 책을 읽겠다는 계획보다,

책이 내게 말을 건네기를 기다렸다.


이 책. 원서 제목이 '시작'(Beginnings)이다.

심지어 얇다. 

새해 첫 책으로 제격이다. 


저자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프롤로그를 세세히 살핀다.

성경 저자의 세심한 편집과 배치에 따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어떤 점을 전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하는지를 밝힌다.


얇지만 풍성한 내용이다. 

복음서를 대할 때 먼저 이 책을 읽고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모나D후커 #복음의시작 #비아 #2021년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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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의 도입부는 문체 면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상이합니다. - P126

마르코가 간결하고 극적인 장면들을 보여주었다면, 마태오와 루가는 이를 좀 더 확장해 이야기 형식으로 서문을 썼습니다. 반면 요한은 우리에게 단단한 신학을 선사합니다. - P126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을 언급함으로써 요한은 창조라는 주제를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생각과 연결 짓습니다. - P131

우리가 예수를 통해 받은 것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전언도, 하느님 영광의 잔영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 말씀과 영광이 체현된 것입니다. - P140

이제 복음서 저자가 ‘육신이 된 말씀‘이라 말했던 분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 P140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저 영광이 하느님의 외아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 P156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은총과 진리의 진정한 현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 P156

요한 복음서를 여는 문단들은 예수의 이 ‘영광스러운‘ 죽음에서 모든 것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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