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 없이는 어떤 것도 즐길 수 없다.
심지어 교만까지도.

돌 맞아 죽은 선지자는 싸움꾼이나 헤살꾼이 아니다. 그저 사랑을 고백했다가 채인 사람일 뿐이다. 선지자는 늘 짝사랑으로 괴로워한다.

대중은 저속한 작품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특정 부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부류의 문학 작품보다 더 저속하든 더 고상하든 대중은 그 부류의 문학 작품을 더 좋아한다. 이런 취향을 비상식적이라거나 무분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류가 서로 다른 문학 작품 간의 경계는 눈물과 웃음의 경계만큼이나 생생하고 실재하기 때문이다.

저속한 희극 작품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비극 작품도 좀 읽어 보라고 말하는 건 추워서 몸을 덜덜 떠는 사람에게 밍밍하지만 따뜻한 커피 대신 최고급 얼음을 건네는 것만큼이나 분별없는 짓이다.

무언가의 진가를 알려면 그 대상을 고립시켜야 한다. 설사 그 대상이 고립이 아닌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탑을 바라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명의 여성을 뒤따르고, 신앙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별을 경배한다.

저속한 희극 작품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비극 작품도 좀 읽어 보라고 말하는 건 추워서 몸을 덜덜 떠는 사람에게 밍밍하지만 따뜻한 커피 대신 최고급 얼음을 건네는 것만큼이나 분별없는 짓이다.

무언가의 진가를 알려면 그 대상을 고립시켜야 한다. 설사 그 대상이 고립이 아닌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탑을 바라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명의 여성을 뒤따르고, 신앙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별을 경배한다.

억압당하는 자를 구하려면, 얼핏 상극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억압당하는 그를 몹시 비참한 존재로 여기는 동시에 몹시 매력적이고 중요한 인물로 여겨야 한다.

낙관론자들은 개혁을 두고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비관론자들은 개혁을 가리켜 가망 없다고 말한다.

억압당하는 자를 구하려면, 낙관론자도 되고 비관론자도 되어야 한다. 그를 가리켜 벌레같이 비참한 존재요 신과 같이 존귀한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은 다양성을 장려한다. 사랑은 개성을 향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서로 좋아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증오다.

현대 국가들은 서로를 싫어하면 할수록 순순히 서로를 뒤좇으며 모방한다. 본디, 모든 경쟁은 맹렬한 표절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

솔직한 거짓말쟁이가
그렇지 않은 거짓말쟁이보다 훨씬 낫다.

솔직한 거짓말쟁이란 전에 한 거짓말을 털어놓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사실, 내가 월요일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어"라고 수요일쯤 털어놓는다. 항상 너무 늦지 않게 진실을 밝힌다. 따라서 전에 했던 거짓말이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서 흉측한 비밀이 될 일이 없다. 묵은 거짓말을 가슴에 끌어안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어떤 장소를 영원히 기억하려면, 그곳에서 한 시간 동안 살면 된다. 그 장소에서 한 시간 동안 살려면, 한 시간 동안 그곳을 잊어야 한다. 눈을 감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불멸의 풍경은 안내 책자가 시키는 대로 바라보았던 풍경이 아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우리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풍경이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가령 죄라든가 연애라든가
유치한 고뇌 따위를 생각하면서 걷느라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던 풍경들.
그때 보지 못했기에
지금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칭찬하며 감탄해 마지않는 추종자들조차
칭찬하지 않는 기질마저
칭찬하고 추켜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허영심의 가장 고약한 면이다.

바보짓을 하다 들통나서 진땀 나는 상황을 모면하려면, 약간의 굴욕감은 견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다.

첫째, 악마처럼 오만한 태도로 버티기.
둘째, 눈물을 흘려 동정심에 호소하기.
셋째, 다 장난이었다는 듯 껄껄 웃기.

전제 정치의 죄와 슬픔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너무 많이 사랑하면서
너무 적게 신뢰하는 데 있다.

철학자는 자신이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드러내지 않고는
호박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에 관해서도 입을 열 수 없다.
그러나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에 관해서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살인자들은 인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기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이는 목숨을 희생시켜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더 충만해지는 느낌을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삶 자체를 증오합니다. 다른 이들의 삶 못지않게 자신의 삶도 증오하지요."

우리가 자라면서 교훈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는 교훈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비도덕적이어서다.

아이들은 인간이 좋은 의도를 가진 나쁜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의도를 가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순전한 도덕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저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분하려는
건강하고, 진심 어리고, 훼손되지 않고,
끝이 없는 욕구.

용감한 사람들은 다 척추동물이다.
겉은 부드럽고 가운데는 단단하다.
겁쟁이들은 다 갑각류다.
겉은 단단한 껍질로 덮여 있고 안은 부드럽다.

실수가 범죄보다 위협적이다.
한 가지 실수가 많은 범죄를 낳기 때문이다.

비관론은 생이 너무 짧아서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나,
종교는 생이 너무 짧아서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진실을 말한다면,
그가 말할 첫 번째 진실은
자기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다.

입 밖에 내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한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누구나 다 아는 ‘뻔한 말’이다.

공통성이란 성인들과 죄인들,
철학자들과 바보들에게
두루 통하는 공통된 성질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는 과학이 과학적이길 바란다는 이유로 과학을 공격한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과학과 철학을 뒤섞으면,
이상적 가치를 모두 잃은 철학과
실용적 가치를 모두 잃은 과학이 나올 뿐이다.

나는 나를 죽일 음식이 이 음식인지 저 음식인지 의사가 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하는 건 철학자의 몫이다.

"사실이 허구보다 더 낯선 법입니다.
허구는 인간의 마음이 창조해 낸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 쏙 들게 마련이니까요."

희망은 청춘과 함께하고 청춘에게 나비의 날개를 빌려준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청춘에게는 주지 않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청춘은 특별히 서정적이고 열광적이고 시적일 수 있는 시기지만, 절망적일 수도 있는 시기다. 이야기가 하나 끝날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일을 겪든 희망을 품는 힘,
모험을 견디고 우리 영혼이
끝내 살아남으리란 걸 아는 지식,
이 위대한 영감은 중년에 찾아온다.

요즘 철학자들은 사랑과 싸움을 갈라서 정반대 진영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싸움이, 싸움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픈 마음이 없이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싸워야 할 이유가 없으면 싸울 수 없다.

지금은 정말로 행복하다. 사람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그게 당연한 거였다. 나란 존재는 만물보다 더 나은 동시에 더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낙관론자의 즐거움은 만물의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어서 평범하고 지루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신의 조화造化에 비추어 본 만물의 부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어서 낭만적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학문의 쓰임이 아주 다양하지만,
주된 용도는 부자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글자를 잇고 기워서 긴 단어를 새로 만드는 데 있다.

명성이나 돈을 거머쥐리라는 희망 없이,
심지어 잘해 낼 거라는 보장도 없이
어떤 일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 일을 통해 손에 넣을
보상을 좋아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그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철학과 신학이 뭔가 특별하고 지루하고 학리적인 분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유일하게 대중적일 뿐만 아니라 천박하고 시끄럽다고 할 만큼 통속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황당무계한 헛소리일 뿐이다.

적어도 우리가 어떤 이를 사랑할 때는 우리가 그에게 받는 느낌과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이에게 받는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독교회는 내 영혼의 실질적인 선생이되, 이미 죽은 스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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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칭의 교리 말고도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심오하고 다채로우며 풍성한 내용이 그에 걸맞은 관심과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은 아쉽다.

?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neednot"는 주장과 "할례받으면 절대 안 된다mustnot"는 주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 바울이 이방인 남성 신자의 할례와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신칭의 가르침이 어떤 상황과 문맥에서 등장하는가?

? ‘의롭게 됨(혹은 의롭다고 여겨짐)’, ‘믿음’, ‘율법의 행위들’ 등 갈라디아서의 키워드는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 ‘그리스도와 연합’ 또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은 정확히 어떤 현상을 말하는가?

?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의 권면은 1-4장의 신학적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을 때 "이 부분은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독자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내용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독자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모두 좋은 질문이다. 이 책이 날 선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었기를 바란다.

또한 바울이 어느 부분에서 억지를 부리는지, 그의 주장 중에 어떤 것이 설득력이 부족한지 독자 스스로 정직하게 느끼며 판단하면 좋겠다.

갈라디아서가 특정 시대에 특정한 교회의 특정한 문제를 다룬 상황적 편지라는 사실, 고대인의 의사소통 방법, 고대인의 세계관, 이 세 가지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가 저술될 당시의 맥락에서 파악한 뒤에 교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점이 몇 가지 있다.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당시의 편지 쓰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편지들은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한 정보(예: 바울이 디모데에게)에 뒤이어 감사의 표현이나 건강 기원 등을 담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행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감사 표현 대신 저주를 써넣었다. 그것도 두 번(1:8-9)이나! 갈라디아서가 회중 앞에서 처음 낭독될 때 갈라디아 회중은 자기들의 관습적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대목에서 무척 놀랐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전복적 의미가 곳곳에 박힌 구약해석, 독특한 은혜 이해, 복음 설명, 일반적이지 않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는 바울의 계산된 수사법이 있다.(수사법은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사학에서 도출된 기술이다.) 편지 도입부의 저주문구는 그가 사용한 수사법의 한 예이다.

1장을 채우는 주제는 바울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권위, 회심 전과 후 바울 삶의 극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미묘한 관계이다. 이러한 굵은 씨줄에, 본론에서 자세히 다룰 은혜의 본질, 복음의 규범성(복음은 순종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이해, 갈라디아 교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이 희미한 날줄의 형태로 엮여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된 것이며,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한다(1:7-9, 11 참고). 이 주제는 1장을 지배한다

바울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면 바울의 복음은 ‘절대적 권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의 죽음을 우리 죄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행위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표현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유사 단어(‘넘겨 주심’)로 다시 등장하며, 이어지는 21절에서 이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사건’이 지닌 선물의 측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넘겨) 주신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 이 신학적 사실과 당위성으로부터 바울은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기-주심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은혜와 칭의의 관계를 스케치 정도로만 남겨 둔다. 그리고 나중에 편지 본론에서 자세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 관계들이 규명된다.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집어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현시대의 악한 손아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악한 시대와 분리된 채 살아가도록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바울은 편지의 초두부터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기반으로 신학(구원론)과 윤리(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어 말한다.

5-6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논하는 것은 결코 이 중요한 신학적 편지의 부록이 아니다.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5: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사건’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4).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점이 몇 가지 있다.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당시의 편지 쓰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편지들은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한 정보(예: 바울이 디모데에게)에 뒤이어 감사의 표현이나 건강 기원 등을 담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행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감사 표현 대신 저주를 써넣었다. 그것도 두 번(1:8-9)이나! 갈라디아서가 회중 앞에서 처음 낭독될 때 갈라디아 회중은 자기들의 관습적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대목에서 무척 놀랐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전복적 의미가 곳곳에 박힌 구약해석, 독특한 은혜 이해, 복음 설명, 일반적이지 않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는 바울의 계산된 수사법이 있다.(수사법은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사학에서 도출된 기술이다.) 편지 도입부의 저주문구는 그가 사용한 수사법의 한 예이다.

1장을 채우는 주제는 바울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권위, 회심 전과 후 바울 삶의 극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미묘한 관계이다. 이러한 굵은 씨줄에, 본론에서 자세히 다룰 은혜의 본질, 복음의 규범성(복음은 순종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이해, 갈라디아 교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이 희미한 날줄의 형태로 엮여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된 것이며,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한다(1:7-9, 11 참고). 이 주제는 1장을 지배한다

바울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면 바울의 복음은 ‘절대적 권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의 죽음을 우리 죄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행위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표현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유사 단어(‘넘겨 주심’)로 다시 등장하며, 이어지는 21절에서 이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사건’이 지닌 선물의 측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넘겨) 주신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 이 신학적 사실과 당위성으로부터 바울은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기-주심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은혜와 칭의의 관계를 스케치 정도로만 남겨 둔다. 그리고 나중에 편지 본론에서 자세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 관계들이 규명된다.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집어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현시대의 악한 손아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악한 시대와 분리된 채 살아가도록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바울은 편지의 초두부터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기반으로 신학(구원론)과 윤리(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어 말한다.

5-6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논하는 것은 결코 이 중요한 신학적 편지의 부록이 아니다.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5: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사건’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4).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에게서 연원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복음"(1:7)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은 이들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켰다."

감정, 권위, 세간의 인정, 청자와의 관계 등 여러 요소가 화학 작용을 이루어야 설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갈라디아 회중과 가까이에서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은 확실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바울이 선택한 설득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학, 더 정확히는 청중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논법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한다.

광의의 맥락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절대 침해될 수 없는 바울 복음의 규범성normativity은 바울이 선언한 저주를 통해 보전된다.

갈라디아서는 편지이고 그 안에 이중으로 저주 문구가 적혀 있기 때문에 이를 읽는 자 중에 혹 바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바울 복음에 걸맞지 않게 사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

복음이 은혜를 통해 가져다준 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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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레이는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이 1-4장의 신학적 논증의 필연적 결론이라고 정확하게 말한다. 이 윤리 권면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에 목말라하며 불안해하다가 "율법의 행위들"이 제시해주는 구체적 행동 사항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바울이 "영의 이끄심"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설명한다.
- 김선용 해제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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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무한 - 필립 네모와의 대화 에라스무스 총서 4
에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동규 옮김 / 도서출판100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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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에 대한 명징한 정의(定義)라 생각한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앎'은 텍스트 안의 여러 개념들이 나의 언어로 소화되어 해석되고 적용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의도한 본질에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특히 철학은 고유한 개념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것이 전체 텍스트 이해에 필수적 과정이다. 


철학자의 사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의 책은 어려운 개념과 난해한 문장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여타의 책에 비해 쉽다.


이 책은 프랑스 공영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문화를 통해 송출된 방송 대담을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또한 필립 네모(Philippe Nemo, 1949~)는 레비나스의 전반적인 사상과 저서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맛보기 원한다면, 그의 사상을 조금 더 간명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먼저 읽어 보아야 할 귀한 책이다. 


#에마뉘엘레비나스

#윤리와무한

#도서출판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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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임을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나의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으로, 혹은 심지어 나와 무관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정확히 나를 주시하는 이는 나에게 얼굴로 다가옵니다. - P108

정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 이념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사이에서- 벗어남의 정신을 간직하는 경우에만 유의미합니다. - P114

원리상 나는 ‘일인칭‘으로부터 나 자신을 빼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계를 떠받칩니다. - P114

주체성은 타인에 대해 책임짐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바로 그런 움직임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면서, 타인을 대신(대속)하는 데까지 갑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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