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본질은 율법 준수를 통해 또는 선행을 쌓아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행위구원론’을 논박하는 데 있지 않다. 2:16은 믿음과 행위의 대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것은 바울이, 이방인 신자가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살아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던 일부 유대인 신자의 신념을 철저하게 부수는 장면이다.

후대에 이신칭의 교리thedoctrineofJustificationbyFaith,Rechtfertigungslehre로 유명하게 된 바울의 언설(2:16)이 원래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공동체 내 지위 문제 및 이방인 신자의 유대 율법 준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율법의 행위들’로 사람이 의롭다 여겨지지 않는다는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행위를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행先行하시는 은혜가 이스라엘의 존립과 정체성의 토대였다. 고대 유다이즘은 개신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신적 은혜에 기반을 두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선행하시는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당신의 백성답게 살라는 지침으로 율법을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율법을 지켰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언약백성의 지위를 유지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율법 준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얻어 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은 인간의 자력 구원의 시도나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핵심으로 두는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율법의 가치를 존중하며 그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인의 남다른 정체성에 관련된 행위, 특히 할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 규정 준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는 ‘에르가 노무’를 ‘토라로 규정되는 삶의 방식’이라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칭의’는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기반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인지적 동의(믿음)와는 상관없이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반하는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faithinChrist’에서 문제는 정확히 ‘무엇’을 믿는 것인지 이 짧은 어구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즉 ‘그리스도 사건theChrist-event’이 사실임을 인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어쨌든 ‘그리스도를 믿음faithinChrist’이라는 표현 자체는 비어 있는 기표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내심에는 믿음을 인간의 행위로 보는 것을 경계하는 지나친 신학적 염려theologicalanxiety가 있어 보인다.

‘피스티스’는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선행성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충성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피스티스’는 동어반복 같은 표현으로, 피스티스를 통해 드러난 예수 자신의 정체성(신뢰할 만한 분)과 사역(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의롭다고 여겨지는지 바울의 본문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2:16에서 바울이 반복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가아니라"고 강조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 없음을 명석판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만이 중요하다.

‘피스티스’는 능동(신뢰함)과 수동(신뢰를 받음)의 의미를 다 가질 수 있다.

‘피스티스’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보이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 주신 신실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신실한 분이자 하나님의 신뢰를 얻기 충분하신 분이며, 인류가 신뢰할 만한 분으로서 ‘신뢰하는 자들(믿는 이들)을 의로움으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 성화, 구원, 구속, 화해 등은 ‘그리스도-사건theChrist-event’이 가져온 효과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

바울은 의로움, 성화, 구원 등에 대해 말할 때 과거시제와 현재시제, 미래시제를 섞어 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여정ordosalutis’처럼 명확한 단계로 그의 역동적인 사고를 도식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의로움(칭의)은 구원/생명의 전제이자 조건이다(Rudolf Bultmann).

δικαιο?σθαι는 선언적 의미가 있으며(‘의롭다고 선포되다’) 동시에 무죄방면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Douglas Moo).

‘의롭다’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이미) 변화를 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아보시고recognize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즉 구원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라는 의미이다(John M. G. Barclay)

‘바로잡혔음rectified’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J. Louis Martyn).

칭의는 믿음이라는 명찰을 단, 새롭게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룹에 속함을 의미하는 것이다(N. T. Wright).

동사 ‘디카이오오(δικαι?ω)’는 ‘의롭게 만들다’와 ‘의롭다고 여기다’라는 의미를 다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정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께서 바르다고 여기시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문제없음’으로 유연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게 종합적인 내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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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왜 예루살렘 방문기를 이 편지에 썼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가 전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함이다

둘째, 예루살렘 방문 시 불거진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에 대해 바울 자신이 압력에 굴하지 않고 이방인 신자는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강요하다,2 자유, 종으로 삼다, 복음의 진리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이 모든 단어를 하나로 묶는 끈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공동체 내 지위 문제’이다.

일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유대적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야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루는 핵심 논증은 바울이 여기에서 간략히 서술하는 사건에 이미 들어 있다. 즉이방인의 사도가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인할례를 이방인 신자가 받아야 하는지 논쟁이 불거졌고 바울은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받으라고 강요하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다.

바울은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그들의강압적 행동에 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을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이방인 신자가 유대적 삶의 방식을 채택해야 하는가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같은 신분이므로 서로 강압할 권리가 없고, 모두가 자유롭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가 지닌 내용이다.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적 삶의 방식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종말론적 칭의와 구원에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구원론의 정수라는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론이기도 하다.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는 교회 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방인인 갈라디아 신자들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베드로만큼 대표 자격을 지닌 이상 자신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는 것이다.

바울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했으며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동일하다.

하나님과 사도들에게 이중으로 인증받은 셈이다. 그래서 유일한 복음이고 유일한 권위를 지닌다.

이방인 예수 따르미가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유대인 예수 따르미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주님 앞에서(제의적으로) 정결하고 의로운 백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faithinChrist’ 혹은 ‘그리스도의 신실함faithfulnessofChrist’에 달려 있다.

복음의 진리는 ‘마음에 믿음’ 혹은 ‘신앙’이라는 형태로 간직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걸어야 한다(2:14)

바른 견해는 바른 걸음과 분리될 수 없다. 복음의 진리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복음의)진리는 순종의 대상이다.

출신과 관계없이 모든 예수 따르미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을 가진다

신자의 믿음은 이미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변화를 받은 사람이 밖으로 풍기는 모습이다.

우리의 믿음은 바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아니,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념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은 순종을 요구한다.

칭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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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안에서 사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적당한 대용품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그리고 전적으로 율법의 가치에 부합하는 바로 그러한 종류의 행위("열매")로 이끌어준다(5:22-3)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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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고도의 윤리적인 삶의 방법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칭송하기 위해 덕목들을 사용한 반면, 바울은 그러한 목록을 영 안에 거하는 삶의 윤리성을 율법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칭송하기 위해 사용한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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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용어로 말하자면 ‘실체적 진실’은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3에서는 그가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받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상황에 따라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의 탁월한 상황 대처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가 말한 특정 내용을 문맥에서 분리해 교리화하거나 윤리지침으로 손쉽게 변환하는 작업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성서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많은 갈라디아인도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할례의 복음’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이유를 명확히 밝히기는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 특히 야고보가 ‘할례의 복음’에 우호적 입장을 취한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바울은 자신의 자리가 종속적인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왔음을 여러 번 강조하며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권위 및 독립성을 주장한다.

갈라디아서 2장 전반부(2:1-10)는 1장 후반부(1:15-23)와 함께 묶어 바울의 자전적 기술이 담겨 있는 한 단락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다.(비교적 안온한 분위기인 전반부에 비해 2:11부터는 갈등이 가득 담긴 회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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