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3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율법을 폄하하는데, 그가 제시하는 이유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나 일관성이 없다.
대신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처럼 상황에 적응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바울 해석자들은 대개 바울이 논쟁이나 논증을 할 때 당대의 유다이즘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대인들이 치열한 논쟁 상황에 있을 때 활용하는 수사 기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바울은 필요하다면 여느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의 믿음과 율법 이해를 공정하게 제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너무 순진하다.
사회의 모든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 3:27-28은 현대인이 듣기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모든 가치 체계와 분류를 무시하신다는 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규정짓는 정체성은 그리스도뿐이라는 말이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느냐, 이방인으로 태어났느냐는 하나님의 눈에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성을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다.
‘약속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따르미들에게 주신 새로운 정체성이다.
4장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은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πνε?μα)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고(3:2-5, 6:15 참고) 자유롭게 하신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강압적으로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업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 14 참고).
결국 갈라디아 신자들이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자아(‘하나님의 입양아’)의 눈으로 율법의 무능력과 한시성을 직시하며 이전의 허탄한 종교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內住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정교한 논리나 객관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 아래 사는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바울의 주장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의 수사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 역시 바울의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의 요지와 바울의 주장에 담긴 목적을 알 수 있다.
‘하갈이 현재의 예루살렘과 같고 이 예루살렘이 노예의 상황에 있다’는 말은 논리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단언이다.
바울의 사라와 하갈 해석이 갈라디아서 전반에 흐르는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노력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본문의 단순한 스토리에 몇 가지 알레고리의 겹을 쌓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을 편다. 그의 재해석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바울은 4:21에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의 청자를 "율법 아래 있기 원하는 사람들"로 한정한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그의 대적자들과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는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급진적 해석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대조를 골격으로 하고, 이 대조는 육체와 약속의 대립 관계로 이어진다.
‘내 목적과 이익에 적합한’ 해석을 가능한 한 다 끌어다 사용하고, 심지어 문서에 없는 내용까지 추가하면서도, ‘내 이익에 반하는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 모습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과 고대 유대인들의 문헌 해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구멍이 많은 바울의 ‘다시 이야기하기’는 사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수사학자들이 알레고리의 장점으로 꼽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키케로Cicero는 "명확한 것들을 뛰어넘으며 말이 안 될 정도의 억지스러운 것들을 택하는 것"이 청중으로 하여금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다(deoratore, 3.160).
구멍을 메우도록 청중의 상상력을 북돋우면 청중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알레고리가 특히 청중에게 ‘위협’을 가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OnStyle, 99).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어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알레고리 사용은 지금껏 우리가 관찰해온, 반복되는 저주 모티프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의 기술 사용과 일맥상통하며, 바로 그 맥락 안에서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새롭고 진정한 생명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난해한 표현 역시 신자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행동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결국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매우 강력한 권고인 셈이다. 무려 ‘성서’의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더 이상 신이 아닌 것들에 노예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박해하는 이들’을 공동체에서 내쫓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정체성은 지고의 명예이다.
늘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우므로 바울은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라Bewhatyoualreadyare!’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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