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세요. 내 몸이 머물렀던 공간, 시간, 대화, 움직임을 따라가며 써주세요. 그러면 글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어요. - P116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 글을 쓰는 나의 자리로 옮겨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써보는 거예요. - P116

상황을 뭉뚱그리지 않아야 나도 글을 쓰면서 그때의 나와 타자를 이해하거나, 위로하거나, 정확한 대상을 향해 분노할 수 있어요. - P116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P117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 P174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 P174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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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율법을 폄하하는데, 그가 제시하는 이유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나 일관성이 없다.

대신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처럼 상황에 적응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바울 해석자들은 대개 바울이 논쟁이나 논증을 할 때 당대의 유다이즘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대인들이 치열한 논쟁 상황에 있을 때 활용하는 수사 기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바울은 필요하다면 여느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의 믿음과 율법 이해를 공정하게 제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너무 순진하다.

사회의 모든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 3:27-28은 현대인이 듣기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모든 가치 체계와 분류를 무시하신다는 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규정짓는 정체성은 그리스도뿐이라는 말이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느냐, 이방인으로 태어났느냐는 하나님의 눈에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성을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다.

‘약속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따르미들에게 주신 새로운 정체성이다.

4장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은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πνε?μα)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고(3:2-5, 6:15 참고) 자유롭게 하신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강압적으로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업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 14 참고).

결국 갈라디아 신자들이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자아(‘하나님의 입양아’)의 눈으로 율법의 무능력과 한시성을 직시하며 이전의 허탄한 종교생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內住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정교한 논리나 객관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 아래 사는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바울의 주장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의 수사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 역시 바울의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의 요지와 바울의 주장에 담긴 목적을 알 수 있다.

‘하갈이 현재의 예루살렘과 같고 이 예루살렘이 노예의 상황에 있다’는 말은 논리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단언이다.

바울의 사라와 하갈 해석이 갈라디아서 전반에 흐르는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노력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본문의 단순한 스토리에 몇 가지 알레고리의 겹을 쌓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을 편다. 그의 재해석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바울은 4:21에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 재해석의 청자를 "율법 아래 있기 원하는 사람들"로 한정한다.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그의 대적자들과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는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급진적 해석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대조를 골격으로 하고, 이 대조는 육체와 약속의 대립 관계로 이어진다.

‘내 목적과 이익에 적합한’ 해석을 가능한 한 다 끌어다 사용하고, 심지어 문서에 없는 내용까지 추가하면서도, ‘내 이익에 반하는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 모습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과 고대 유대인들의 문헌 해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구멍이 많은 바울의 ‘다시 이야기하기’는 사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수사학자들이 알레고리의 장점으로 꼽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키케로Cicero는 "명확한 것들을 뛰어넘으며 말이 안 될 정도의 억지스러운 것들을 택하는 것"이 청중으로 하여금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말했다(deoratore, 3.160).

구멍을 메우도록 청중의 상상력을 북돋우면 청중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알레고리가 특히 청중에게 ‘위협’을 가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OnStyle, 99).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어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알레고리 사용은 지금껏 우리가 관찰해온, 반복되는 저주 모티프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의 기술 사용과 일맥상통하며, 바로 그 맥락 안에서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새롭고 진정한 생명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난해한 표현 역시 신자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행동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결국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매우 강력한 권고인 셈이다. 무려 ‘성서’의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더 이상 신이 아닌 것들에 노예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박해하는 이들’을 공동체에서 내쫓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자유로운 신분의 소유자라는 정체성은 지고의 명예이다.

늘 그렇듯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우므로 바울은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라Bewhatyoualreadyare!’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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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실천의 적지 않은 기능과 가치에도 불구하고 결국 글은, 혹은 글쓰기는 삶의 결핍과 어긋남을 드러내는 표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P7

우리가 쓰고 있는 논문은 다른 여러 형태의 글과 공정한 경쟁관계에 있지 않다. 이미 우리에게 하나의 강박으로 군림하고 있는 논문은, 글을 쓰는 학자의 삶과 경험 그리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대상의 성격과 층위에 따라서 주체적이고 탄력성 있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 P28

논문이 우리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강박증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허위의식이 명백한 병증으로 진전되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 P33

의식과 언어의 관계는 일단 특정 시대와 장소의 문화사적 역학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것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통제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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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들이 바울 복음과 다른 메시지를 전했으므로 저주의 대상임을 암시하는(1:8-9) 동시에 ‘사악한 눈’의 저주를 내리는 자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의 두려움을 건드려, ‘할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불신하도록 유도한다.

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인간 안에 내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바로 ‘영’이라는 것이다. 오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갈라디아인이 도저히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은, 그들이 듣고 믿어서 ‘영’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 시작한 갈라디아인의 새로운 삶은 ‘영’ 안에서 영위되어야 하고 ‘영’으로 마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이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와 같이 ‘육’에 의지하는 것은 틀렸다고 바울은 지적하는 것이다.

3장과 4장을 아우르는 뚜렷한 주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3:7에서 바울은 "피스티스에서 비롯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못을 박는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책에 기록된"이라는 살짝 다른 표현을 덧붙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자체보다는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율법의 완벽한 준수 없이는 모두 저주에 떨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당대 유다이즘의 보편적 신념을 통해서도 확증될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갈라디아 신자들을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설득에 있어 사람의 감정, 특히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바울의 논증이 지니는 정합성 자체보다는 바울이 청중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유대인 출신 예수 따르미이자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개진한 저주 모티프를 이어가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려고 가장 적절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 ‘영의 약속을 피스티스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 바울만의 새로운 해석이다. ‘영의 약속’은 ‘약속, 곧 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곧 ‘영을 받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사건’을 고대의 묶는 주술에서 자주 쓰인 ‘주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표현한 점(1:4), 이중으로 저주 걸기(1:8-9),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정죄당한 일(2:11),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을 악한 주술사로 묘사한 것(3:1)이 차곡차곡 쌓인 가운데 3:10에 이르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주 모티프는 갈라디아 청중의 두려움을 겨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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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는 그러한 분에 신뢰를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 그리스도를 계시하셨고, 신자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4:19),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실제 연합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다이즘이 지닌 흠결을 굳이 찾자면 유다이즘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바울의 눈에 보인 유다이즘의 유일한 흠결은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세한 논리 전개가 생략되어 있어서 현대인의 귀에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지만 바울은 빈번하게 이와 비슷한 흑백논리를 전개하곤 했다. 그의 단호한 흑백논리 역시 회색지대 따위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극단적 대조는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 두루 등장한다(자유와 노예, 영과 육). 바울복음을 따르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든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말이다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복음이 가져다준 효과이자 혜택이라면, 율법을 통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러한 혜택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대 유다이즘은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통해 ‘다가올 세상’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 내는 종교체계가 아니라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선행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기반을 둔 ‘은혜의 종교’였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을 자력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 일체로 확장해서 해석하는 전통은 바울이 실제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이유를 당대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서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다.

‘새 관점’에도 다양한 결이 있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것은 유대인 신자들이 지닌 유대민족 중심주의나 배타주의를 겨냥한 것으로서, 이방인 신자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신학적 논거와 논리가 탄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저주 모티프 등 갈라디아 신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여러 방편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적대자의 영향권에서 빼 내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바울은 ‘must not’이라는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must not’을 주장한 것은 신학적으로 도출된 필연적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자식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른 선교사 그룹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사회적’이며 실리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명료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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