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가 노예에게 가해진 낙인, 즉 소유권을 명시하기 위해 만든 상처 자국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스티그마타’는 1:10에서 바울 자신이 명명한 자기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노예’와 서로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 예속됨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낮음이 있었고, 높은 신분을 지닌 주인에게 속한 노예는 여러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확하게 언급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영향력을 드러냈다.

사실 그의 모든 문장은 갈라디아인 신자들을 적대자의 영향권에서 빼어 내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다듬어진 것이었다.

은혜, 영, 하나님의 부르심, 이 세 가지가 갈라디아서의 키워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당부했듯이 갈라디아서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야 한다. 이 편지가 갈라디아인들 앞에서 처음 낭독되었을 그때 그 자리를 상상하며.

복음은 사람의 지성과 영성과 도덕성을 변화시킨다.

믿음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과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된다.

변화의 최종 목표는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참여한 사람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

흉내가 아니라 변화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존재가 그리스도-사람Christians이다.

있다. 성서해석의 옳고 그름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판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정체성, 그리스도를믿음, 그리스도인의실천, 이 셋은 하나이다.

복음은 지성의 갱신을 낳는다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재조립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뉴마’의 내주를 통해 어리석었던 정신(갈 3:1 참조)이 새롭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세세한 도덕 지침을 제공하지 않고 굵직한 방향 표시등만 제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사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체적 행동 지침 없이도 영의 인도에 따라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갱신된 정신을 가진 개인이 모인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에 바른 방향의 숙고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종교가 난립하는 종교 시장market에서 충분히 매력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제공한 담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자 개인의 오판은 ‘타락한’ 이성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갱신된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시민사회의 공공성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은 존재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갱신된 지성을 가진 사람에겐 모든 것을 분별할 눈과 귀가 있다.

복음의 핵심인 생명을 진작시키며 돈과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행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복음은 민족, 사회 계급, 신분, 빈부, 직업, 성별이 ‘이신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크게 외치고 있다.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우고 인정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와 분류 체계를 가뿐히 무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무시하시는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탐하는 것처럼 모순적인 일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인(갈 5:24)이 다시금 욕망에 휘둘리는 퇴행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은 그의 재산과 학력과 나이와 성별과 출신지가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옷으로 가려진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볼 때 그리스도라는 옷만을 보게 된다.

갈라디아서는 신자의 퇴행 가능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가 자칫 잘못하면 끊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갈라디아 회중의 특정 문제를 다루느라 위협적인 말을 곳곳에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겁을 주기 위한 시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정죄받고, 내주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라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이 깨질 수 있고, 은혜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쫓겨날 수 있으며,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수 있다

구원과 칭의는 대체로 미래의 지평에 있으며, 이는 신자의 변화와 순종의 행위를 전제한다. ‘한번 구원받으면(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그 구원은 영원히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는 바울이 실제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이 구원과 칭의를 말할 때는 늘 약간의 불확실성을 살짝 추가한다.

우리는 약간의 불확실성이 주는 긴장감이 그리스도인됨Christianness을 정의하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본다. 흠 잡힐 데 없고, 별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

스텐달의 해석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바울의 고민과 루터의 고민은 다르다! 루터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그의 양심의 갈등은 바울이 씨름했던 문제와 관련이 없다.

스텐달은 이신칭의 교리가 루터와 같이 양심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구원의 원리가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이 어떻게 유대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교회적, 사회적 차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었다고 역설했다.

‘바울에 관한새로운new 관점’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2020년 현재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지만 바울학계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신약학계의 관행에 따라, 하나의 고유명사로 써도 무방할 것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밖에서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던 과거를 버리고 오로지 그리스도께 자기를 의탁하는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강조한 반면, 케제만은 개인적 측면을 넘어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를 변화시키는우주적 차원의 하나님의 힘과 주재권을 강조했다.

두 사람은 바울 해석에 있어 이렇게 중요한 차이점을 보였지만, 고대 유다이즘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은 이해를 보였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간단히 말해 고대 유다이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한 응답이다.

단지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이 인류가 지닌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샌더스는 바울이 선택, 토라, 언약, 이 모두를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가 샌더스를 ‘새 관점’ 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지만, 샌더스 자신은 바울 해석에 있어 언약 개념과 유대적 유산을 강조하는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와 선을 긋는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편지(갈라디아서)의 청중들이할례나 음식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준수를 떠올리기 원했다.

이러한 관찰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identitymarker, 유대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 유다이즘의 배타주의, 언약에 대한 협소한 이해 때문이다

던Dunn이 보기에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지점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갈라놓는 율법의 사회적 기능에 있다.

‘그리스도-사건theChrist-event’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동안 지녔던 가치 체계와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던에 따르면 종종 ‘언약에 대한 오해’를 모두 뛰어넘은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음faithinChrist’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칭의의 근거로 작용한다.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유대인처럼 사는 것’과 ‘이방 죄인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자 ‘유대인이 나머지 인류로부터 구분되어 하나님의 백성에 속했다는 상태를 보장받는 것’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해 그의 백성을 재정의하셨고, 따라서 ‘율법의 행위들’이 하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역할은 이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언약이 유대인과 유대 문헌의 기저에 있는 확신이어서 어떤 유대인이 어떤 주장을 하든 이미 언약 백성이라는 지위를 전제로 한다는 샌더스의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바클레이는 선물이 수혜자의 가치와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unconditioned, 그렇다고 선물 받은 사람이 되갚을 답례의 의무가 없다unconditional는 함의가 반드시 따라오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행위들’이 지닌 문제점은 선물의 수혜자가 지닌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에 ‘유대인의 민족적 특권’이라는 또 다른 가치 규범을 더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왓슨은 바울 신학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무조건적 약속’(창세기)과 ‘(조건부 약속으로서의) 시내산 율법’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토라)에 존재했던 것이고, 바울의 신학은 구약에 존재하는 양극성과 화해시킬 수 없는 긴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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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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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배우는 곳 대부분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글의 생명력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는 어떠해야할까?

자신의 글쓰기와 글쓰기 모임을 통해 경험한
글을 통한 치유와 회복.

새해에 그럴듯하고 근사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건 어떨까?

이 책이 그런 분들에게 용기와 힘을 선물로 줄 것 같다.

#당신이글을쓰면좋겠습니다
#홍승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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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쓰다[동사]
1. 부지런하게 나를 개방하는 일
2. 용기의 도미노에 참여하는 일
3. 우연, 타자,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
4. 한계에서부터 다시 무엇인가 되어가는 일 - P226

경험을 해석한다는 말은 모든 경험에 이름표를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 P231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뚜렷하게 정해진 답이나 결말은 없다. - P231

우리는 다만 시간과 사건의 끝없는 연속성 안에 존재하고, 순간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품을 수 있을 뿐이다. - P231

그러니까 글도 서둘러 끝낼 필요 없다. 유독 마무리하기 힘든 글 앞에서는 잠깐 멈추는 게 좋다. - P231

급하면 익숙한 길로 빠지니까. 한 가지 이정표만 기억하면 된다. 익숙한 방법으로 쉽게 닫지 말고, 차라리 마침표를 열어두자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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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후반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육과 영의 대조는 5-6장이 단순한 도덕교훈 모음집이 아니라 3-4장에 기술된 신학적 논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영이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율법은 살리는 힘이 없다는 바울의 언명(3:21)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새로운 생명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 정체성은 단순히 참 생명뿐만 아니라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의 새로운 삶에서 구현된다.

생명은 죽음의 극복만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다

구체적 모습을 가지지 못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은 반드시 새 창조로 이어진다(6:15).

새롭게, 영에 따라, 영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이 새 창조이다.

구원의 확신만으로는 새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체현되지 않는 ‘믿음’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삶(6:14)으로 연결될 수 없다.

삶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으로 실현되지 않는 믿음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영 안에서 영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갖추어 살아나갈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은 율법을 통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5:1)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5:6)이, 그리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5:13)와 "이웃 사랑과 율법의 성취"(5:14)가 더 구체적인 공동체 안의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를 6장에서 보게 된다.

‘영적인 사람들’은 "온유의 영"(영의 열매 중 하나)을 가지고 범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수해야 한다.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같은 잘못을 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 따르미들은 영의 열매인 온유한 태도로 공동체 일원의 잘못을 교정하고 보수하며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사건’은 언약과 동일한 기능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사소한 불순종이라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제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법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극한 긴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이해되었는데, ‘예수의 가르침’, ‘이웃 사랑의 계명’,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되고 성취된 율법’,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새롭게 제정된 규범적 삶의 패턴’이 그것이다

믿음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며,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사건’ 자체가 일종의 규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1:4),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는 사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현해 내는 것이 당연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이러한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분별력을 발휘하여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받은 호의에 최선을 다해 감사로 보답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경제 윤리이다.

바울은 자발성과 호혜성互惠性을 강조한다.

구약은 물론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과 신약성서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공평과 정의의 신이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틀 아래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는 자비가 자리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이 세계가 나에 관한 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나도 세상에 관한 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세상과 ‘나’ 사이에 서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세상과 ‘내 자아’가 단절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합체는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작업은 당연히 ‘온 세상을 다시 만듦’,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짐’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온 세상에 대한 당신 주권의 재천명의 빛에서 볼 때 사실 이 편지 대부분을 채운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태생을 고려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신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바울은 이름 짓는다.

복음은 우리 삶의 규범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영에 맞추어 살면서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걷고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바울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올바른 잣대, 즉 그리스도 안의 규범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고, 1장 8-9절에서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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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1-4장의 신학적 논증과 분명히 구분되는 윤리적 권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갈라디아서 연구자들은 이 두 부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1-4장의 농도 짙은 신학적 서술이 5-6장의 윤리 지침에 토대를 제공하고, 이 윤리 지침은 신학적 사실을 실제적인 삶 가운데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은 바로 전 단락의 결론이자 새로운 권면을 시작하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 두 절(5:1-2)은 할례와 노예를 연결한 이전의 논증을 더 강화한다.

5:2은 갈라디아의 예수 따르미들에게 심사숙고하고 유용한 선택을 하라는 권면의 효과를 가진다

유익, 그것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유익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행동은 어리석다.

이어지는 3-4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점층법을 사용한다.

먼저 바울은 할례받는 사람은 율법을 전체적으로 준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한껏 부담감을 준 다음, 4절에서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여 청자를 극도로 두렵고 부담스럽게 만든다.

바울은 유익과 의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쉬운 선택지를 갈라디아인 앞에 제시하고 있다. 두 단어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이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분의 부르심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복음 안에서 받은 복이 모두 취소된 것이다.

칭의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고, 따라서 그러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5:6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 담고 있다.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미 했기 때문에 할례받는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결론은 쉽게 가능하다. 이 구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할례받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효력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곤경에 빠진다.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반대한 이유를 유대민족 중심주의 혹은 유대인 언약 우월의식에서 찾기 때문이다. 할례받지 않는 것도 의미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유대민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도출될 수 없다.

할례나 무할례 모두 ‘새 관점 학파’처럼 민족적 가치로 환원해서 해석하기보다는 인간이 구축한 가치 체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기존 가치 체계의 철저한 부정은,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도 볼 수 있듯, 지고至高의 가치가 뚜렷할 때 가능하다

최고의 가치는 그 외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한다

바울은 이 지고의 가치를 "사랑을 통해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라고 말한다

신앙과 행위는 일치해야 한다.

믿음에 부응하는 행동만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바울은 선한 행위 일반을 가리키지 않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특정해 부각한다.

‘그리스도-사건’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1:4, 2:20), 이 사랑을 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 따르미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모습인데(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복음의 진리를 향해 바르게 걷지 않았다고 바울이 책망한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적대자들은 갈라디아인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핵심을 방해했으니 이 적대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5:8-10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다.

5:1이 4장의 끝마무리를 다시 명확하게 했다면, 5:13은 ‘부르심’과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앞의 논증 전체와 이 단락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엮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토록 빨리 저버린"(1:6) 갈라디아인들의 결정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을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는 점을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3:24-25, 4:9, 22-31).

5:13의 내용 중 현대 독자들의 피부에 확 와닿지 않는 것이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명예의 획득과 유지가 오늘날 21세기 사회의 돈에 맞먹는, 가치 추구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명예라는 당시 최고의 가치에 도전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다.

모두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최고의 가치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노예는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신분, 즉 명예와 대척점에 있는 것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아브라함의(진정한) 후손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획득한 갈라디아인에게 노예 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나 거북하고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전복적 삶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충격량을 잃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4장에서 주로 복음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신자의 정체성을 다루었고, 이제부터는 그 정체성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이자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자연스레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치 빛이 그 본성상 외부로 발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자의 믿음은 그 사람의 행동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방식을 바울이 ‘사랑’으로 압축해 표현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5:6).

사랑이 무엇일까? 15절 이하를 보면, ‘육신에서 기인하는 일체의 행동’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으로 효력을 드러내는 피스티스"(5:6)는 타인에게 종노릇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5:13), 자신을 아끼는 만큼 타인을 아끼며(5:14),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5:19-20).

부족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을까? 바로 ‘영의 일들’을 해야 한다

5장의 많은 문장이 명령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5:5을 해설할 때 ‘영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5:16부터 바울은 ‘영으로(πνε?ματι)’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영으로 걸어가는(살아가는)" 삶이 참 인간이 영위해야 할 삶이다.

바울에게 욕망의 제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욕망은 5:13의 ‘육신의 기회’라는 표현을 연상시킨다.

"영에 이끌린다면"(5:18) 영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 영의 열매들 안에 "자기 통제"가 있으므로(5:23) 육신이 "욕망하는" 것(5:17)을 제어할 수 있다.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현주소이기 때문에 바울은 13절과 16절에서 명령법을 사용한다. 5:24-25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주제는 2:19과 3:12에 이미 나온 적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신자는(2:19)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2:20),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만들어진 인간은 욕망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신앙과 행동은 하나다. 그러나 신자가 손 놓고 있으면 이러한 욕망의 제어를 실현할 수 없다.

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기술事實記述이다.

복음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정체성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지만, 너무 급작스럽고 세상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신자 자신도 충분히 깨닫고 체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울은 평서문과 명령문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령이 더 많이 활동할수록 사람의 의지는 더 고무되어 모든 일을 충분하게 생각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며, 고된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생활 습관을 개발하고, 반대로 나쁜 습관, 때로는 강요된 것이 명백한 죽음의 습관을 제거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선물이며 … 여기서 자유란, 노예 상태에서 책임의 상태로 해방되는 것으로, 마침내 스스로 도덕적인 근육을 선택하여 훈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며 성령도 그 안에서 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내가 하는 그 일을 하나님 자신이 하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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