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교리 자체를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이해하게 되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P12

교리는 하나의 숙제이지, 최종 산물이 아닙니다. - P12

교리는 신학자들의 지적 과업이지, 가보나 한 줌의 재산처럼 이전 세대들로부터 수동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닙니다. - P12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살아 있는 전통에 영향을 미친 근본 현실들을 탐구하고 경험하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 P12

교리는 결코 그리스도교 역사의 마지막장이 아닙니다. - P12

지금은 새롭게 교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규범성과 충실성에 대한 제한을 느슨하게 할 때입니다. - P13

우리는 성급하게 규범성으로 돌진하기 전에, 제한적이고 편협한 지적 유산들에 잘못 규범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도록,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져야 할 교리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표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P13

개별 신학이 교리를 정의하는 방식과 교리 연구를 위해 제시되는 방법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저마다 다르고, 다양한 역사 시기별로도 제각기 다르다. - P26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규정하는 특정한 설명들에 대한 헌신이 여기에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 P26

이전 세대들의 교리를 전유하는 신학적 작업, 동시대인들과의 대화, 교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는 일, 교리를 오늘날 필수적인 문제들과 관계 맺게 하는 일에는 언어와 실재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전제가 상정되어 있다. - P27

아주 오래된 탐구인 신학은 신학자들이 대학과 교회의 대화 상대와 대화하는 가운데 자기 시대에 발생한 사건과 절박한 사정에 비판적이고 건설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든다. - P29

신학은 초월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철저히 특정 시공간에 자리한 학문이다. - P29

신학은 개인의 필요와 사회적 위기로부터 나오지만, 이것들 너머의 진리를 살핀다. - P29

신학자의 연구는 늘 반드시 주변 세계에, 하늘과 땅에 열려 있어야 한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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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죄종은 죄를 ‘수직적‘이고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반면, 잠언 6장은 죄를 ‘수평적‘이고 ‘관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잠언을 읽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 P80

하나님께 순전하려는 우리의 신앙심이,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잠언의 목소리를 때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 P80

하나님이 창조하신 패턴/규범을 잘 알고 따르는 지혜자(=의인)에게는 신의 보상이 따르고, 그렇지 못한 무지한 자(=악인)에게는 징벌이 따른다는 권선징악의 원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냅니다. - P82

규범적 지혜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선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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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0장 27절은 "주님의 등불은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사람의 속을 더듬어 살핀다"는 뜻입니다. 즉, 숨을 쉴 때 공기가 뱃속으로 들락거리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 P72

반성적 지혜 또는 삐딱한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패턴‘에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그런가?‘ - P26

반성적 지혜는 규범적 지혜의 ‘패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패턴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언제나 적용되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 P26

고대 이스라엘의 과거지향적 세계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잠언의 내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P48

고대인들의 언어적 특성을 이해하고, 그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문화적 독특성을 파악한 상태에서, 우선 그들의 시각과 가치관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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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깊어져야 한다. 좋은 설교에는 시간이 배어 있고, 좋은 독서도 마찬가지다. - P93

성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힘겨운 시간을 버티는 힘이 성공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과정과 원칙이라는 두 가지를 훈련시킨다. 하지만 감동적인 스토리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이 과정이 어떤 이에겐 무명의 시간이고 연단이고 고난이다. - P100

과거가 치유되지 못하면 성장이 멈추게 된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져도 그들은 덩치만 큰 아이일 뿐이다. - P119

그래서 크고 작은 일에 상처받고 또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 P119

이것을 반전시키려면 고통은 아픔과 상처를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P119

사실 지혜는 넘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설 때 얻어지는 신의 선물인 것이다. - P119

나아가 다단계 회사나 신천지 같은 이단에 빠지거나 극좌나 극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 가지 해석만 신봉할 뿐,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려 하지 않는다. - P124

삶이 불확실해질수록 익숙한 생각에 집찹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다르다는 것이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P124

다름이나 다양성은 공동체와 직격되기에 중요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도 점점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개인들의 집합체로 변하고 있다. - P124

내가 틀릴 수 있다면 상대도 틀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어야 용서도 받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이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 P153

문학은 소중하지만 작아서 안 보이는 삶의 조각들을 찾아낸 뒤 그것들을 통해 삶이 뭔지를 배우게 한다. - P153

어느 시대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긴 했지만, 깨어 있는 자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묻곤 했다. - P153

착하고 충성된 종의 인생을 살려면 ‘복음은 선포되지만 동시에 관찰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 P186

세월이 수상하다 보니 요즘은 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메신저를 보면서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그들이 무엇을 듣는가를 눈여겨보게 된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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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의 표면적 언어 너머를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앞에 쳐놓는 기독교 언어의 이면을 보는 것이지요. 외부인들에게 미국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영성이 아니라 물질주의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을 쫓아오지 않습니다. 부와 안락을 약속하는 것으로 그 복음을 해석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전복적인 사람이란, 적어도 겉으로는 문화적 색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전복적인 일은 조용히 숨어서, 인내하며 하는 것입니다.

전복적인 사람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비밀 메시지를 지니고 다니면서, 문화가 궁극적이라고 제시하는 것 너머에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심습니다.

평범한 기독교적 행위들입니다. 희생적 사랑, 정의, 소망의 행위들이지요.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개발하고, 이러한 일들을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핵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키웁니다.

전복적인 사람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터를 준비하고 믿음과 소망의 방향으로 조금만 분위기를 바꿔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게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복음의 이미지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성장의 이미지들입니다

미국에서 목사라는 소명이 실현되는 방법을 관찰하고, ‘목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어조와 맥락을 들어보면, 내가 그 단어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매우 다름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용례에서 보자면 그 단어는 힘이 없고, 패러디에 자주 등장하며, 기회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사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명사를 분명하게 해주는 형용사 세 가지를 제안한다.바쁘지 않은, 전복적인, 묵시적인.

바쁘다는 말은 헌신의 낌새가 아니라 배신의 낌새다. 헌신이 아니라 변절이다.

목사 앞에 붙는 ‘바쁘다’라는 형용사는 마치 ‘간음하는’ 아내나 ‘횡령하는’ 은행가라는 말처럼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스캔들이고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다.

투르의 힐라리우스Hilary of Tours는 목사가 바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고 하는 신성모독적 불안irreligiosa Sollicitudo pro Deo’이라고 진단했다.

허영심 때문에 바쁘다. 나는 중요한 사람, 비중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꽉 찬 일정과 일에 시달리는 것이 중요성의 증거가 되는 사회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래서 일정을 채우고 일에 시달리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본다면 나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고, 그러면 나의 허영심이 만족될 것이다.

게으르기 때문에 바쁘다. 나 스스로 단호하게 결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나태함이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목사란 모호한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과 선한 뜻에 관련된 것들과 어렴풋이 연결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종교적이거나 뜻이 좋으면 바로 목사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C. S. 루이스는 게으른 사람만이 열심히 일한다는 주제를 즐겨 사용했다.

결정하고 지휘하고 가치를 확립하고 목표를 세우는 핵심적인 일들에 대한 책임을 게으름 때문에 다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서 해준다.

허영심 때문에 눈에 띄는 활동으로 내 하루를 채우거나 다른 사람들의 고압적인 요구들로 내 하루를 채운다면, 내가 정작 해야 할 일, 내가 부름 받은 일을 해야 할 시간이 없다.

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잔잔한 물가의 조용한 장소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면 어떻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발하고 싶다.

기도의 삶을 발전시키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안다. 따로 떼어놓은, 훈련된, 의도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보다 하나님께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요란한 내 자아보다 하나님께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그렇게 하려면 일상의 소음에서 일부러 벗어나야 하고, 만족을 모르는 자아로부터 의식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설교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나는 성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언어와 리듬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성경에 흠뻑 젖어야 한다. 성경공부에 푹 잠겨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붙잡고 곰곰이 생각하고 성경의 의미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씨름해야 한다.

주일마다 우리 교회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의 권위를 느끼고, 그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의 현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되는, 그러한 설교를 하고 싶다. 괜찮은 개요와 산뜻한 예화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듣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주중에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러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그들의 말을 정말로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있어서 그들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짐작해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너무도 많은 심방이, 가서 출근 도장 찍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바쁘게, 밥값하며 제대로 일하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 되어버렸다.

목회에서 듣는 행위는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한 여유로운 분위기에서만 사람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존엄하게 그리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음을 안다.

누군가의 말을 들은 횟수가 누군가에게 말한 횟수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으려면 메시지를 전달할 때보다 언제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바쁘면 들을 수가 없다. 일정이 꽉 차 있으면 들을 여유가 없다. 다음 약속을 지켜야 하고, 다음 회의에 참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하루에 여백을 둔다면, 들을 시간은 충분하다.

물론 남들보다 먼저 그 달력을 챙기는 것이 요령이다. 나는 기도, 설교, 듣기 같은 창조적인 일들이 나올 수 있는 기도, 독서, 여가, 침묵과 고독을 위한 시간을 미리 표시해둔다.

예약 달력은 목사가 기도, 설교, 듣기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여유를 얻을 수 있는,(성 바울이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령께서 주신 선물이다.

약속을 적어두는 예약 달력이라는 도구가 있으면 바쁘지 않을 수 있다.

본질적인 것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면, 나는 바쁜 목사가 되어서 지치고 불안해하며 불평하게 된다.

아무도 내게 처방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직접 처방해야 한다.

아무도 내게 처방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직접 처방해야 한다.

목사들은 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또한 그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다. 양심의 부추김, 옛 분노에 대한 기억, 성경적 명령의 도전이 이 세상이라는 무법 상태의 바다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러한 세상에서 소음은 불가피하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배에 작살을 꽂을 사람이 없다면 그 추격은 제대로 끝을 맺을 수 없다. 혹은 작살을 꽂을 사람이 자신의 임무는 제쳐놓고 노를 젓느라 지쳐 있다면, 창을 던져야 할 때 제대로 정확하게 던지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노 젓기를 자청하는 것이 언제나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도덕적 대의를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며, 영원한 결과가 있음을 아는 싸움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일이 더 호소력이 있다.

누군가는 작살을 던져야 한다. 누군가는 작살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역하는 삶에 사용하신 은유는 단일함, 작음, 조용함의 이미지들인데, 그것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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