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볼 때) 바람직한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주 반복되는 표현과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 P117

(2) 전통적인 지혜 진영(규범적 지혜)과 이들의 신학에 반발하는 진영(반성적 지혜) 사이의 대결구도로 이해하라. - P117

(3) 이 두 가지 지혜가 ‘신의 속성‘(하나님은 어떤 분인가)과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리와 주장을 펴는지를 큰 틀에서 정리하라. - P117

3장의 욥의 말은 규범적 지혜 진영을 대표하는 욥의 친구들을 자극합니다. - P118

감히 건방지게 죽고 싶다는 ‘망발‘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죽음‘과 ‘사후세계‘를 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 오기 때문입니다. - P118

욥기 1장과 2장이 잠언의 규범적 지혜가 다루지 않는 천상의 공간을 언급한 것처럼, 3장은 마찬가지로 규범적 지혜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언급함으로써 규범적 지혜의 한계를 폭로합니다. - P118

잠언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 욥기는 천상의 세계와 죽음의 공간을 논의의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 P118

규범적 지혜는 사람을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잠 6:23). - P125

하지만 엘리바스는 이 규범적 지혜를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낙인 찍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 P125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의 영혼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욥기는 잘 보여줍니다. - P125

욥의 말이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진술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무죄 주장과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 P133

하나님이 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 P133

규범적 지혜의 절대선 개념에 도전하는 욥의 주장은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독하는 교만이고 무지이고 죄악입니다. - P133

‘니플라옷‘, 즉 하나님의 인식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은 한 인간이 겪는 고통을 까닭 없는 것으로, 즉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 P135

하나님은 "까닭 없이"(חנם) 사람에게 고통을 주실 수도 있고, 의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멸망시킬 수도 있는 분입니다. 흥미롭게도 욥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화합니다. - P135

욥의 주장은 규범적 지혜의 "경외"와 "겸손"을 재해석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하나님이 패턴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패턴을 잘 알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말하는 반면, 욥의 반성적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의 패턴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반드시 패턴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P138

전통적 지혜보다 반성적 지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 P144

먼지 티끌 같은 인간이 그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뜻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 P144

그리하여 반성적 지혜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은 인간에게는 이해 불가한 것(‘니플라옷‘)이며 까닭을 알 수 없는 것(‘힌남‘)이 됩니다. - P144

하지만 엘리후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를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있다는 전통적 지혜를 동시에 주장하고 있습니다. - P144

계속 반복되는 "네가 아느냐", "누가 했느냐" 등의 표현은 단지 욥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욥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경험의 한계, 인식의 한계, 그리고 존재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의 이해가 미치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습니다. - P156

하나님의 언설 속에는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에 해당될 만한 발언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 P156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선한 존재‘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 P156

욥과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인과응보 사상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설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 P156

욥기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 해도 우리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 P180

"까닭 없는 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탄의 신학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욥의 신앙입니다. - P180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욥기는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는 태도를 취하면 안 됩니다. - P183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서도 안 되지만, 그 고통이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명 역시 ‘교만‘입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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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코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존재해야 할지라도,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 P38

이것은 그가 세상에 의하여 통제되지도 않으며, 세상을 의존하지 않는 생각과 삶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생각과 삶과 마음이 다른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8

이처럼 다른 주인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은, 이 주인과의 연합이 끊어지지 않은 채, 주인에 의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다. - P38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적이고 윤리적인 헛된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모든 상황이 포함하는 진정한 영적인 어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 P49

정치적, 경제적 문제 등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거짓과 눈가림이 아닌 사람의 도리로 이 문제에 응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앞에서 언급한 이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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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어려운 점은 문제가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일상 업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일이 유용하고 보통은 목사들이 잘 해내기 때문에, 우리는 본말이 전도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인생이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탐험해야 할 신비라고 했다.

인생은 자신의 기지로 손질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선물이다

세속화된 마음은 신비 앞에서 공포에 떤다. 그래서 목록을 만들고 사람들을 분류하고 역할을 주고 문제를 해결한다.

영적 기술자의 역할에 고정된 목사들은 그 역할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하지 않게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고쳐야 할 것들, 그리고 실제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세기에 세기를 이어가며 우리는 자신의 양심, 열정, 이웃,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살아가는 일 한가운데서 예배를 인도하고, 평일의 모순과 혼란 속에서 십자가의 존재를 발견하고, ‘평범한 것의 광채’에 주목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이 순례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기도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의 임무는 너무도 견고한 이 육신이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순수한 영혼으로 우리를 정제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좋은 생각이나 신비로운 느낌이나 도덕적 열망이 되지 않고, 육신이 되셨다.

물질은 중요하다. 물리적인 것은 거룩하다.

창조 세계가 없다면 언약은 아무런 구조도 맥락도 없고 실재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애니 딜라드는 자연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비로운 것에 대해서 가십처럼 떠들어대지 않는다. 설명을 하지도 않는다. 설명은 합리화하는 도해에 존재를 끼워 맞춰버린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아니라 신비다"라고 말한다. 딜라드는 더 큰 것을 쫓는다. 의미를, 영광을, 하나님을 쫓는다. 그리고 그림자에서 만나는 끔찍한 우둔함의 단 한 부분이라도 제쳐두는 지름길을 택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녀가 ‘사용하 는’ 진리가 아니라 살아내는 진리이다. 그녀의 성경 지식은 좌뇌보다는 우뇌에 저장되어 있다.

변증적 논쟁을 위한 연료라기보다는 기도하는 상상력을 위한 자양분이다.

성경의 폭넓은 언어적 세계 안에서 그녀는 창조 세계의 비언어적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녀가 성경을 읽으면서 키운 균형 감각에서는, 성경의 ‘특별’ 계시가 소위 ‘일반’ 계시를 포함하고 에워싸고 있다.

"자연의 침묵은 자연의 발언이다." 우리는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입을 닫은 어머니 대지로부터 삑 하는 소리라도 얻어내려 한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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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 목사는 인내한다

진짜 묵시, 거룩한 결혼 안에서 잉태된 묵시는 열정으로 인내하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건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 용감하게 헌신된 공동체를 키운다.

묵시의 양육을 받는 집단은 주로 주변부에 있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집단들이다.

성 요한은 무척이나 다급해하지만 서두르지는 않는다. 그의 책에 나타나는 서두르지 않는 긴박함을 보라.

성 요한이 인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거대한 신비와 엉망진창인 인간 조건의 복잡함을 다루기 때문이다.

신비도 엉망진창도 단순하지 않다. 엉망진창의 역사에서 거룩한 삶을 배우려면 세대를 넘나드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세기의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

묵시적 상상력은 지질학자들이 ‘깊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재능을 준다.

목사들이 일하는 환경은 인내를 약화시키고 조급함을 보상해준다. 사람들은 신비(하나님)와 엉망진창(자기 자신)을 불편해한다.

은혜의 신비와 인간의 죄의 복잡함 한가운데서, 매달 평가할 수 있고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안도가 된다.

우리 자신이나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묵시는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같이 처해 있다고 납득시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악을 해결하고 신실함을 키우는 것이다.

묵시는 긴박함을 유발하면서도 지름길과 서두름의 불은 끈다. 왜냐하면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 아니라 섭리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설명해준다.

묵시에서 충실함이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충실함은 물론이고 사람, 교구,장소에 대한 충실함이 나온다.

성 요한과 그의 회중과 함께 우리는 장소와 사람에 대한 충실함을 배운다. 그것은 엉망진창인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도덕적ㆍ영적ㆍ전례적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지에 경의를 표하는 신실한 인내이다.

목사들은 자신이 진단하고 치료할 책임이 있는 질병을 오히려 퍼트리는, 미처 감지 못한 보균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는 가장 강력한 예방책이 필요하다. 성 요한의 묵시적 기도와 시와 인내 같은 것 말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말도 못하게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거룩한 장소를 진흙 발로 오가며 지저분하게 만든다. 예배의 질서는 논쟁과 의심, 통증에 시달리는 육체와 혼란에 빠진 감정,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과 엉뚱한 일을 벌이는 부모들의 무질서에 자리를 내준다.

주일 예배 때 그토록 분명했던 목사라는 비전이 나를 자신들의 자아의 볼모로 보는 사람들의 눈에 반사되어 흐릿해지고 왜곡된다.

일요일은 중요하다. 축하의 날이고 본질의 날이다. 일주일 가운데 이 첫날은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을 규정해주고 그 삶에 활력을 주며 나머지 날들에도 부활의 영향을 미친다.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엿새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축하의 날은 아니지만 부활이 형성되는 날이기에 중요하다

대부분의 목회가 그 엿새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에 동일한 관심을 주어야 하고 살아가는 일 한가운데서 기도의 기술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소명 개혁은,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영혼 치료는 죄와 슬픔에 맞서는 끝없는 전쟁과 은혜와 믿음의 부지런한 계발을 내가 아는 한 가장 잘 조화시키는 표현이다.

영혼의 의사가 되는 것이 교회 운영보다 우선이며, 내 목회 소명과 관련해서는 동시대인보다 현명한 선배들의 지도를 받겠다고

영혼 치료가(예를 들어 병원 원목이나 목회 상담가 같은) 특수 사역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목회를 종교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중의 의무와 만남과 상황을, 기도를 가르치고 믿음을 발전시키고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시키는 원재료로 사용하는 삶의 방식이다.

평일에 하는 목회 본질의 회복은 이 시대의 세속화된 기대와 긴장 관계 속에서 시행되어야만 한다

협상, 토론, 실험, 대립, 조정이 있어야 한다. 영혼을 인도하는 일에 헌신한 목사는 자신에게 교회 운영을 기대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영혼의 그 거대한 영토를 되찾는 일을 자신의 중요한 책임으로 삼으려는 목사라면, 목회 현장을 떠나 재교육을 받는 것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계속해서 사역하면서 그것을 해내야 한다.

소명의 회복이라는 임무는 신학 개혁만큼이나 끝이 없다.

영혼의 치료는 하나님이 이미 주도권을 쥐셨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정의하는 전통 교리는 선행先行이다.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주도권을 쥐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운을 떼신다. 선행은 내가 등장하기 전에, 여기에 내가 할 일이 있음을 인식하기 전에, 하나님이 부지런히, 구속적으로, 전략적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확신이다.

영혼의 치료는 인간의 무기력함에 무관심하지 않고, 회중의 고집스러움에 무지하지 않고, 신경증적 완고함에 부주의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하는 모든 것―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첫 일, 하나님이 개시하신 행위에 대한 반응이라는 훈련된, 단호한 확신이 있다.

영혼을 치료할 때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이 인생에서 내가 분별할 수 있는 은혜의 흔적들은 무엇인가? 이 집단에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사랑의 역사는 무엇인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고 현 상황을 기본 데이터로 삼으면 실재를 오해하고 왜곡하게 된다. 옴짝달싹 못하는 인간 조건에 맞서 시간을 아끼며 그것을 바꾸려는 대신에 하나님이 선행하신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제때에 제대로 된 방식으로 거기에 참여할까 분별한다.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셨다. 회의에 늦은 사람처럼, 나는 하나님이 이미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고 결정적으로 행동하신 복잡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꼭 그 사실을 선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그에 적합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영혼의 치료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는지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그 일에는 설명하는 언어나 동기부여의 언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동기부여의 언어는 무엇을위한 언어다. 일을 해내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명령하고 약속하고 요청한다. 그러한 말은 사람들이 자기 주도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성에 더 본질적이고 믿음의 삶에 훨씬 더 기본적인 언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인격의 언어다.

영혼의 치료는 사물의 중심에서, 가장 자기다운 곳에서, 믿음과 친밀감의 관계가 개발되는 곳에서부터 일하겠다는 결심이다

목회의 임무는 인간성의 가장 기본 차원에 적합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동기부여 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발적인 언어, 즉 외침과 감탄, 고백과 감사 같은, 마음이 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영혼 치료에 사용하는 일차적 언어는 대화와 기도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인격적 유일성이 강화되고 개인적 존엄성이 인정받고 존중받는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고 강요되지 않고 들뜨지 않는 언어다. 친구와 연인들의 여유로운 언어이며, 또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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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 목사는시인이다. 성 요한은 기독교 교회의 첫 주요 시인이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해서 우리 눈앞에서 진리를 만들어내고(그리스어로 시인을 뜻하는 poetes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귀에 새로운 울림을 준다

목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목회에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복음은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창조 세계를 있게 하셨다

우리 구세주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시인은 정보 전달이 우선 목적이 아니라 관계를만들고, 아름다움을이루고, 진리를형성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 말은 모든 목사가 시를 쓰거나 운을 맞춰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으로 말을 대하고, 하나님 말씀뿐 아니라 평범한 말 앞에서도 경외심을 가지고, 언어에도 거룩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임무는 복음 앞에서 기도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이 하나님은 너무도 크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반면, 믿고 사랑하고 소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너무 위축되어 있어서 능력 있는 그 말을 듣고, 활력 넘치는 그 이미지를 보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을 해석하는 책임을 맡은 목사들이 시에 그토록 무관심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시를 재발견해야 하고, 목사는 그 일에 앞장서야 한다.

시는 목회 소명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시는 근원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말은 창조적이다. 인지, 관계, 신앙 등 전에는 없던 것들을 존재하게 한다

침묵의 심연에서 소리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그 소리 때문에 외로움이 사랑으로 변한다. 텅 빈 심연에서 은유를 통해 그림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그 이미지 때문에 익명에서 사랑으로 변한다

말은 창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한다. 우리의 말은 그 창조에 참여할 수 있다.

산문으로 몇 년간 이야기하다보면 우리의 말은 진부해져버린다.

그때 묵시는 우리의 말을 멈추게 한다.

믿음을 창조하는 말의 능력, 악의 합리주의에 저항하는 상상력의 힘, 예배와 증언을 통해 인격적으로 말하고 들을 사람을 만들어낼 필요성이 우리를 멈추게 한다.

묵시의 긴박함은 언어의 뿌리까지 흔들고 우리는 시인이 된다. 핵심 언어, 인격적 언어, 성경적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같다. 목사가 말로 해야 하는 일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교제다.

단순히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만드는 말. 전례와 이야기와 노래와 기도는 시인인 목사들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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