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적으로 사는 삶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명은 잃을 수도 있고 왜곡되거나 연기될 수도 있다.

물고기 뱃속을 지난다고 해서 정체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요나는 소명적으로 살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탈락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일은 유서 깊고 성경적인 관습이다.

우리가 그 관습을 많이 행하는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건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가 논쟁하는 이유는 은혜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은혜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실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화는 가장 유용한 진단 도구이다. 우리 안에서 화가 터져 나올 때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이다.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악이나 무능함이나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화는 이웃의 잘못을 냄새 맡는 우리의 육감이다

진단 차원에서 화는 거의 오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믿는다. 확신을 수반하는 도덕적, 영적 강렬함이 화를 불러일으킨다

화가 날 때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걸 안다.

화는 잘못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 것인지 말해주지 못한다.

보통 우리는 잘못이 우리 밖에 있다고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요나가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다.

요나가 실망해서 뿌루퉁해진 것은 상상력의 실패, 마음의 실패 때문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구원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요나는 자신의 소명을 자기가 수행하는 일, 즉 제자리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으로 축소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대답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온다. 그런데 답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 답이 정확하다는 것을 안다. 일주일 걸려서 생각한 답보다 더 진실하다.

창조성은 깔끔하지 않다.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 창조적일 때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창조적일 때 우리가 하는 상당히 많은 일은 잘못된 것이다. 창조적일 때 우리는 효율적이지 않다.

모든 창조적인 일에는 위험, 실수, 부정 출발, 실패, 좌절, 난처함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엉망진창으로부터(우리가 거기에 충분히 오래 머물고 충분히 깊이 들어가면) 서서히 사랑이나 아름다움이나 평화가 부상한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다. 모든 회중에는(‘모든’을 강조하고 싶다) 창조가 일어난다.

진정한 창조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이고 감당치 못할 것이다.

목회는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일이다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성령의 교리가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제 삶에서 계속해서 만드시고 주신다.

창조성의 가마솥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회중을 질서정연하게 그리고 도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가난, 고통,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육 프로그램과 개혁 정책을 만든 톨스토이와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고난 속으로, 믿음과 의심의 신비로운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서 기적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찾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나 하나님을 희생시켜서 사람들을 선하고 편하게 만드는 미래와는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하늘과 땅,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가장 큰 것을 투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상력은 필수이다

상상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우리는 실재를 온전히, 그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실재에 작용하고 우리는 그 실재에 따라 산다."

잘 거론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주요 악은 상상력에 대한 조직적인 비하이다.

상상력은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 중 하나이다.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상상력은 우리를 예배와 경이로, 하나님의 신비로 몰아넣는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기독교 사역이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일 중 하나는 상상력을 회복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복음의 물질성(보고 듣고 만져진 예수님)은 복음의 영성(믿음, 소망, 사랑)만큼이나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정신적 도구이다.

영적 지도자로서 목사는 예수님의 성경적 사고방식(예배 지향, 종의 삶, 희생)의 영향을 받는다.

패러다임 전환은 더 많은 실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미 거기에 있던 훨씬 더 많은 실재에 우리가 부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패러다임 전환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더 이상 통제력를 행사하는 위치가 아니라 예배의 자리, 우리가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리는 흠모와 신비의 신성한 장소이다.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 메시아와 관리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영적 지도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람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그 전제조건은 뒤로 물러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조용히 흠모하는 눈이 열린다.

목사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흐릿해지고 잊힌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생각에서 빠져나갈 때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공동체 안에 배정된 사람이다.

목사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흐릿해지고 잊힌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생각에서 빠져나갈 때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공동체 안에 배정된 사람이다.

먼저, 알지 못할 것. 영적 지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경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기회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신앙 공동체의 핵심 사역이다.

부지런히 교리를 교수하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신비 앞에 여유롭게 멈추는 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돌보지 말 것. 영적 지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며 도울 기회가 아니다.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 거리 두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상대방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크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쓰는 방법은 우리가 참여하는 포괄적이고도 통합적인 하나님의 일과 연관해서이다. 분리되고 부분적인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면 오해가 생긴다.

목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복음의 응답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라는 중심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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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니느웨처럼 크고 유명한 도시라면, 그곳의 영광과 화려한 신들의 광채가 시민들에게까지 미친다.

요나는 종교적인 니느웨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그들의 종교를 개선하거나 종교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전복’하고 그 종교의 유효성을 의심케 한 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면하도록 믿음으로 돕기 위해서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요나는 그들을 악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와 사악함을 고발하지 않았다. 요나는 그들의 미래를 문제시했다. 요나는 그들의 현재 지향적인 종교와 안전에 집착하는 현재에 종말론을 소개했다.

40일은 개인의 삶의 실재성을 시험하는, 진실성과 진정성을 검토하는 기간이다.

서른아홉 날의 하루하루는 40일째 되는 날의 실재에 적합해야 한다는 종말론적 압력을 받는다.

종말론적 피드백의 압력을 받으면서 그날들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한 자궁이 된다.

그날들은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의 훈련 장소가 된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대한 순종을 감지하는 분별력을 분명하게 갖추도록 해준다.

40이 제대로 작동하면 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그 40을 무시하면 인생은 파괴된다.

종말론이 없는 목회는 소비자적 만족과 종교적 만족에 성수를 뿌리며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을 위해 사제직을 수행할 뿐이다.

종말론이 없으면 끈은 느슨해지고,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거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고귀한 부름심의 상으로 당겨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니느웨에서 목회 소명을 지키기 위해 성경의 종말론을 보충 학습해야 하는 목사들에게 계시록은 필수이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세기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용하려면(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본다) 요한이 자신의 회중에게 했던 것처럼 종말론적으로 사는 목사들이 우리 회중에게 필요하다

계시록이 특별히 탁월한 이유는 목사의 위치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분별력 있고 진실하게 신앙을 살아내도록 도울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사람들을(종교적 대의에 따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존엄하게 대하고, 이 시대를(고통을 부인하거나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고, 복음을(하루를 헤쳐나가기 위한 ‘해결책’으로 축소시키지 않고) 대단한 상상력을 가지고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하는 상상력을 요한에게 맡겨, 예배하고 믿는 회중 안에서 개혁이 일어나게 하고,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시련과 평범화라는 전 지구적인 상황을 늘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목사들은 회중이라는 현장에서 정확하게 그 메시지를 살아내기 위해서 적절한 소명적 종말론을 시급하게 습득해야 한다

기독교적 ‘삶’이 속속들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잔인한 시련을 당하고 형편없이 하찮아진 세계 상황이 1세기 말의 교회 현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강할수록 우리가 종말론적 목사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리가 없는 종말론은 종교 과학 소설로 전락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충격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소망과 믿음은 무시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해서 이윤과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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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거룩한 땅인 회중 앞에 경의에 찬 외경심을 가지고 서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회중의 종교를 잘 분별하여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비판적 분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명석한 눈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회중은 다시 금송아지 숭배에 빠져버린다.

종말론은 우리가 굳은 흙을 부드럽게 하고 잡초를 뽑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목사에게 종말론은 농부의 쟁기와 써레, 괭이와 삽과 같다.(그러나 개발자의 불도저나 땅 고르는 기계는 아니다.)

우리는 이 표토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유지해야 한다. 비와 바람을 맞히고, 심고, 고르고, 가꾸고, 돌보고, 추수 때 일을 마친다. 완성telei?son이다.

목회는 종말론적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갔고 현장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것에 자신을 담갔다. 그러나 설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요나는 그 풍경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흥미롭게도 종말론적인 내용을 외쳤다.

진실하고 진정한 목회는 그 핵심까지 종말론적이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은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회 선언이다.

종말론은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영역이다. 미래는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졌느냐이다.

우리 언어에서 ‘끝end’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끝, 즉 종결이라는 뜻이 있고 목표, 즉 목적이라는 뜻이 있다. 이 두 의미는 깔끔하게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성경과 목회에 지배적인 것은 후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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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대한 이해는 또한 종교적 암을 영적 성장으로 오인하는 것을 막아준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경제 속에서 우리는 생각 없이 숫자의 관점에서 진보를 평가한다

우리는 성장이 산술적 은유가 아니라 생물학적 은유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생물학에서 성장은 시기, 수동성, 기다림, 비율, 성숙과 연관이 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크기가 있다. 비율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성장이라는 과정은 매우 복합적이고 신비롭다

모든 회중은 자신에게 알맞은 비율과 균형, 크기가 있다. 장소와 조건이 다른 회중은 비율과 크기도 다르다. 그 크기를 바깥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할 수 없지만, 지혜로운 목사라면 그 한계를 생각하고 존중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적절한 크기가 있다. … 넘어서는 안 되는 단위가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는데, 유명한 그리스어 ‘메덴 아간meden agan’은 도를 넘지 말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단위에 대한 감각, 말을 조심하고 자신의 경계를 아는 것에 대한 감각을 우리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의식할 때에만 강하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의 독수리에게 간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지금은 하늘의 독수리도 없고, 프로메테우스도 없다. 대신에 우리는 암에 걸린다. 암은 선진 문명의 주요 질병이다.

말을 조심하는 것, 즉 한계에 대한 건강한 존중은 목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대한 열정은 인간의 한계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강렬하게 활동하실 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해야 하고 말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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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를 미워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먼저 그의 존재 자체를 존경하지 않으면 결코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사람이 될 때까지 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성급함은 그를 아예 죽여버릴 것이다."

게다가 회중은 목사의 계몽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멍청이가 아니다. 잘난 체하는 태도는 적대적인 태도보다 더 나쁘다.

회중은 표토이다. 죽음을 흡수하고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에너지와 유기물로 부글거리는 표토이다.

그것을 대하는 유일하게 성경적인 자세는 외경심밖에 없다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때 목사들은 회중의 쉐키나 앞에서 신을 벗는다.

모든 교구가 다르다. 각 영혼이 다른 것보다 더 다르다. 교구는 영혼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효과가 있는 것을 이쪽에서 쓸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야심은 가득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불경하기 때문에 회중에 대해 불경하다.

삶이 더 지역적일수록 더 강력하고 다채롭고 풍성하다는 통찰로 이끈다. 거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는 경계이고 장소를 규정해준다. 어떤 것이 내 것인지를 알면 내 것이 아닌 것도 알고 그래서 이웃으로 살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우리의 임무가 된다.

우리가 교구에만, 우리 회중에만 머물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면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목사는 ‘행동’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도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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