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측면에서 애가가 인간의 고통에의 침잠이라면,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은 하나님의 분노와의 대면이다.

애가 전체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계속 언급하고 있고, 그에 대해 변호하지도 않으며 그로 인해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1:12; 2:1-3; 2:6; 2:21; 2:22; 3:1; 3:43; 3:66; 4:11; 5:22).

목회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룰 때 애가가 이토록 유용한 까닭은, 이 책이 하나님의 분노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삶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로 가볍게 넘기는 것이다. 이런 말은 고통을 근원적으로 비인격성 탓으로 돌린다

애가는, 고통당할 때 우리가 강력한 인격적인 무언가-하나님의 분노-를 경험한다는 성경적 관점의 정수다.

분노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바를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을 심오하고 희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오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하나님에게서 분노를 제거하는 그 순간, 고통은 탈인격화된다. 왜냐하면 분노는 인격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운명이나 추상적 법에 대한 반명제이기 때문이다.

카를 바르트 역시 비슷하게 증언한다. "…인간이 자신의 불행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임을, 자신이 그분께 죄를 저지른 것임을 깨달을 때, 따라서 그에게 하나님 외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을 때, 그제야 비로소 그에게 절대로 잠기지 않을 가능성이 열린다."

기도는 고통이 빚어낸 최선의 결과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감상적으로 설명해 넘기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그 정체를 폭로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는 구속의 문을 들어올리기 위한 지렛대로서 그분의 분노를 꽉 붙잡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잘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구속을 이루시어 모든 사람을 위해 고통당하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도우시기를 간구할 뿐이다.

하나님의 분노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고통이 주는 통찰력을 통해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번영할 때에는 사람들이 해롭지 않은 가벼운 죄라고 여겼던 것을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황폐한 상황에서는 중대한 죄로 본다.

분노는 고통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사랑의 관계를 강화한다.

분노는 무관심을 깨뜨린다. 그것은 냉담을 박살낸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망을 넘어 회개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격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분노라는 관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고통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즉, 고통은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 피조물에 대한 돌보심, 그분의 긍휼하심을 발견하도록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고뇌는 마지막 시험이다. 모든 희망이 박살나고 모든 계획이 산산조각 났을 때, 인간은 오랫동안 경멸해왔던 것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목회자는 예배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역사를 통해 구속자로 알려진 하나님과 "가시적 관계를 지닌 사람"이다.

목회자가 심방과 상담을 통해 고통의 상황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교인들은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것을 의미 있다고 선포된 것으로 변형시킨다.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성경 구절을 살펴봄으로써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진노를 뜻하는 명사들을 언약의 하나님 야훼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은 시내산 경험에 근거하고 그 경험에 의해 입증되며, 언약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가장 절망적인 곤경에 빠져 있을 때조차도 그 백성은 애가에 제시된 것과 같은 목회 사역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잔인한 악마적 힘으로서 불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통해 그분을 확실히 이해한다.

첫째, 목회 사역에서는 위대한 구원이라는 광대한 배경에 비추어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맥락을 제시한다.

그분의 분노는 지나가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hesed이 영원하다고 거듭 말한다(렘 33:11; 시 100:5; 106:1; 107:1; 118:1-4; 136:1-26; 스 3:11).

그분의 분노가 영원하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둘째, 목회 사역에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언약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제시한 다음 계속해서 친밀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동반자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분노에 직면하고 대처하며, 고통을 받아들이고, 필요하다면 회개를 촉발하고 언제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영향력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동반자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심을 확신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감정적인 폭발이나 비합리적인 격노가 아니라 그분의 끈질긴 돌보심의 한 양상임을 깨닫게 한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메시지의 중심에 두는 복음은 또한 제자도라는 십자가를 그 일상의 일부로 용기 있게 받아들인다.

어려움과 고통은 복음을 통해 그에 대한 도피 수단을 제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현실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소망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그 속에서 믿음을 나누며 사는 현실의 일부다. 목회 사역에서는 이처럼 서로를 떠받치는 삶을 설명하고 표현한다.

목회자는 어둠의 공격자들과 씨름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의미를 실토하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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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으로 그의 선택은 그 당시 깜쁜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신학에 대한 학문적 훈련을 받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879년 말에 바빙크는 30회 정도 설교했고, 대부분의 경우 요한일서 5장 4절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이 두 본문을 동시에 설교하면서, 메모나 원고를 의지하지 않은 채 설교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빙크에게 창조주는 피조계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다양성 내의 통일성(unities-in-diversity)의 모형들을 가능하게 하시고, 그것들에 의해 드러나시는 다양성 내의 통일성(unity-in-diversity)의 원형이십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신학적 헌신과 노력으로 정통적이며 동시에 근대적인 신학자가 되려고 분투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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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의 답관체 형식은 작은 고통 하나하나에 공감하는 동시에 그 고통의 끝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는 목회 사역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답관체 형식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게 해주지만, 동시에 반복의 한계를 설정해준다.

만약 악에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다.

모든 심각한 불안과 질병, 상처, 상실은 당하는 그 순간에는 영원히 계속되고 끝없이 악화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치유나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삶이 끝나거나 고통이 끝날 그 시간이 올 것이다.

애가는 고통을 답관체 형식 안에 담아냄으로써 고통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다루는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애가의 답관체 형식은 경계를 지닌 고통에 하나의 배경을 제공한다. 간접적이며 비언어적인 수단을 통해 고통의 유한함을 전달한다.

목회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이를 행한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비극이나 슬픔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의 경험에 경계를 설정하기 시작한다.

고통의 경험을 거듭 돌아보는 시간의 꾸준한 반복으로 온전함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런 시간에는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그 말을 하는 구조("매체가 곧 메시지다")도 중요하다.

답관체 형식은 고통에 끝이 있다는 생각을 전달함으로써 목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목회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므로 시간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을 끝내고, 한계 안에 두고, 정해진 틀 안에서 이야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애가가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통의 내용 하나하나에 주목한다. 고통의 내용을 끈질기고 자세히 추적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제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악은 끝없이 계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하지 않다. 그것은 평생 우리가 주의를 집중할 만한 가치가 없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만약 너무 일찍 끝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테고, 따라서 그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무 오래 지속될 때, 목회자는 신경증적 반응에 대한 부속물, 온전함을 방해하는 삶의 불완전한 조정 장치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건강하지 않은 몸을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악을 진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목회자에게 이러한 통찰은 필수적이다.

창세기와 욥기, 시편, 이사야에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성경적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빌로니아의 괴물 라합(혹은 티아맛)은 온 하늘에서 몸부림을 치며 깊은 바다를 휘졌지만, 마침내는 결박당해 제자리에 놓인다(계 20:1-3)

악을 인정하고 악에 대담하게 맞선다. 그러나 악이 하나의 집착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악에 관해 염려하기를 그칠 때가 온다.

고통당하는 이에 대한 목회에서는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이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악을 진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목회자에게 이러한 통찰은 필수적이다.

창세기와 욥기, 시편, 이사야에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성경적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빌로니아의 괴물 라합(혹은 티아맛)은 온 하늘에서 몸부림을 치며 깊은 바다를 휘졌지만, 마침내는 결박당해 제자리에 놓인다(계 20:1-3)

악을 인정하고 악에 대담하게 맞선다. 그러나 악이 하나의 집착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악에 관해 염려하기를 그칠 때가 온다.

고통당하는 이에 대한 목회에서는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이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초현실주의적인 악몽이 아니다. 그것은 냉정한 산문으로 묘사할 수 있으며 평범한 사람이 논의할 수 있는 제재題材로부터 시작되었다.

고통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장소와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

애가에서 감정은 강렬하지만, 사실은 확고하다. 각각의 감정이 사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고통을 어느 한 순간에도 단순한 감정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절대로 불안에 독립적인 현존을 부여하지 않는다.

역사적 자료로부터 단절될 때, 고통은 마치 기체가 방을 가득 채우듯이 사방으로 퍼져버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함락 전에 수세기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수세기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배경에 있었으며, 전경前景에 해당하는 미래에는 메시아가 있을 것이다. 애가는 우주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다.

목회자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만날 때, 목회 사역의 첫 단계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과 더불어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다음 책무는 정서적인 잔해를 치워내고 역사적인 기초를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무언가에 의해 촉발된다. 고통의 행동 배후에는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고통은 삶을 내파하며, 유산탄처럼 아픔을 흩뿌린다. 그 순간에는 상실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점차 여전히 견고하고 안정된 많은, 아주 많은 것들, 사람들, 영역들을 인식하고 접촉할 수 있게 된다.

특정한 역사 속에서 터전을 유지하는 데 실패할 때, 고통은 헬륨이 가득한 풍선처럼 우리를 땅에서 끌어올려 감정이라는 기류와 호르몬 분비라는 기압에 따라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다니게 만든다.

역사라는 버팀목이 없을 때 슬픔은 불안이 되고 마침내는 정신병이나 정서적으로 쓰라린 마음으로 변하고 만다.

역사가 필요한 것은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다.

애가에서 역사의 기층을 드러내고 개별적인 고통의 경험 속에서 그 기층을 노출시키려고 하는 이유는,(고통당하는 이가 소망하고 목회자가 기도하는) 구원 자체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결코 역사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신비한 황홀경이나 영지주의적인 각성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선포는 역사적이다.

고통이 역사와 분리된다면 선포되는 메시지를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고통의 사례-죽음, 우울증, 이별, 거부-에 대해서는 실제적이며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역사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애가에서 애통함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 아니라 예루살렘 함락이다. 이처럼 애통한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인류의 타락이라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침공에 따른 포위와 기근, 강간, 살인이라는 구체적인 조건이다.

역사로부터 단절될 때 고통은 그 원인에 비해 더 크게 부풀려진다.

사건으로부터 분리될 때 고통은 지적인 장난(고통의 문제에 관한 철학들)으로 변해버리거나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는" 정신병에 이르게 한다.

역사에서 동떨어진 고통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만든다

주변 상황과 단절된 고통스러운 감정은(이런 경우에는 어떤 감정이든지)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하고, 정서적으로 혼란하거나 감각적으로 퇴폐적인 온갖 증상을 초래한다.

애가의 시가 계속해서 역사라는 제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목회 사역에 유익하다

역사에 흠뻑 잠겨 있는 애가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목회자는 가용한 모든 비역사적 심리 요법으로부터 목회 사역을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다.

목회자는 슬픔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공감과 대결, 긍휼과 증언을 결합함으로써 그 슬픔을 이미 일어난 일의 일상적 실체들과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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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손을 맞잡았다가도 한쪽에서 손을 놓아버리면 쉽게 끝나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어려운 만큼 가볍고, 소중한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다. - P13

그러니 누군가를 곁에 두려 붙잡지 말고 내게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된다. - P13

무엇보다 먼저 나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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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도 목회 사역은 고통을 가장 인격적이며 친밀한 방식으로 대하겠다는 결단이다.

목회 사역에서는 고통을 최소화하거나 피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을 설명할 방법을 찾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고통을 치유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목회 사역에서는 고통에 참여한다

그것은 고통의 경험 속으로 뛰어드는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행위다

그런 결단은 목회 사역을 만들어낸 성경에서 기원하며 성경 안에서 그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다.

성경 계시에서는 고통을 설명하지도 않으며 제거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나누시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은 거기에 있으며, 고통당하는 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해로부터 그 자체에 대한 정의를 발견하고 그 지침을 얻는 목회 사역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대단히 분명히 인식한다.

더 나아가 그에 대한 인식을 고통에 대한 목회적 반응의 방향성과 그에 대한 관점으로 삼고, 목회 사역을 고통의 경험을 나누는 일로 이해한다.

인간으로서 고통에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점과 고통을 기피하라는 문화적 압력에 직면해 고통에 대해 성경적, 목회적 반응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원천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뚜렷한 입장을 견지하고 활기찬 반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예레미야애가는 고통에 참여하는 사역에 특히나 적합한 문서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예배 행위-아빕월 제9일에 행하는 금식-를 통해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억함으로써 공동체의 삶 속에서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새롭게 경험했다.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 경험을 하나님의 거부로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인도 미워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목회 사역의 책무는, 절대로 죄책감이라는 인간적 현실을 피하거나 심판이라는 신적 현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 애가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며, 그렇게 할 때 심판이 비인격적이지도 않고, 신경증 환자의 죄책감도 아니며, 그저 일반적인 불운도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고통은 긍휼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애가에서는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맺도록 돕는 목회적 공감을 형성한다.

그런 결단은 목회 사역을 만들어낸 성경에서 기원하며 성경 안에서 그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다.

성경 계시에서는 고통을 설명하지도 않으며 제거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나누시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은 거기에 있으며, 고통당하는 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해로부터 그 자체에 대한 정의를 발견하고 그 지침을 얻는 목회 사역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대단히 분명히 인식한다.

더 나아가 그에 대한 인식을 고통에 대한 목회적 반응의 방향성과 그에 대한 관점으로 삼고, 목회 사역을 고통의 경험을 나누는 일로 이해한다.

인간으로서 고통에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점과 고통을 기피하라는 문화적 압력에 직면해 고통에 대해 성경적, 목회적 반응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원천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뚜렷한 입장을 견지하고 활기찬 반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예레미야애가는 고통에 참여하는 사역에 특히나 적합한 문서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예배 행위-아빕월 제9일에 행하는 금식-를 통해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억함으로써 공동체의 삶 속에서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새롭게 경험했다.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 경험을 하나님의 거부로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인도 미워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목회 사역의 책무는, 절대로 죄책감이라는 인간적 현실을 피하거나 심판이라는 신적 현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 애가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며, 그렇게 할 때 심판이 비인격적이지도 않고, 신경증 환자의 죄책감도 아니며, 그저 일반적인 불운도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고통은 긍휼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애가에서는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맺도록 돕는 목회적 공감을 형성한다.

애가의 형식은 그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책의 문학적 형식은 그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애가는 각 행의 첫 글자가 히브리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는 답관체踏冠體, acrostic로 구성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하는 가장 흔한 방식 중 하나는,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 그럴싸하게 그것을 설명해버리고 지름길을 통해 그것을 지나쳐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반대쪽에 이르려고 한다. 애가는 그런 태도를 확실히 막아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특히나 그 감정이 고통처럼 아픔과 당혹감으로 가득하다면, 남자와 여자들이 느끼는 모든 것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답관체는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구조다.

끝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집중하는 태도는, 애가가 답관체 구조의 시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답관체 형식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통해 강조된다.

애가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다섯 번-한다.

첫 시는 바깥에서 볼 때 시온의 고통이 어떤 모습인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시는 안으로부터 그 고통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울부짖어 이야기함으로써 마무리된다.

이런 울부짖음은 연민의 마음으로 위로하는 태도에서 고통을 공감하는 태도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2장에서는 고통의 범위를 하나님의 진노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분노보다 더 불쾌하며 더 대면하기 어려운 감정은 없다

답관체 형식은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를 유지하게 해준다. 생각할 수 없던 것도 하나씩 나열하게 해준다.

감추거나 피하거나 에둘러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것이 거부당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그 결과로 파괴된 도시를 대면해야만 한다.

3장은 세 행으로 이뤄진 연의 각 행이 같은 글자로 시작하게 함으로써 답관체를 더욱 강화시킨다.

더 이상 바깥에서 방관자처럼 애도하지 않는다. 이제 안으로부터 애도가 시작된다.

답관체라는 장치는 고통을 계속해서 탐구하게 하지만, 이제는 고통을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첫 단계다. 비유는 고통을 손잡이를 달아 그것을 쥐고 하나님께 건네드릴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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