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말글 - 그래도 괜찮은 오늘을 만드는 최소한의 습관
정은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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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말과 글이라?

말과 글은 연결이 되지만...



제목을 한참 동안 본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선뜻 이어지지 않는다.



부제와 저자의 프롤로그를 보고서야 이해된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습관이라...



인생을 살다 보면 참 많은 일과 맞닥뜨린다.

외부적인 변수도 있고, 내면적인 흔들림도 있다.



저자는 삶에서 경험하는 불행의 여러 이유보다,

우리의 일상에 책임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적극적인 삶에서 중요한 도구가 무엇인가?

내가 나로 설 수 있게 되는 수단이 무엇인가?



바로 돈과 말과 글이다.

이것들과의 건강한 관계는 내 존재를 윤택하고 풍성하게 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과 다양한 경험,

책과 인터뷰 등을 통해 구체적 지침을 소개한다.



유익한 책이 곳곳에 소개되고 있으니,

여러모로 선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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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교환의 대가로 사용할 뿐이다. - P11

지금껏 돈을 얼마나 벌었고 얼마나 축적했느냐를 따지기 전에 내가 돈보다 우위에 있는지, 돈을 목적으로 착각해 돈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는지를 먼저 따져보면 좋겠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그 고민이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 - P11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말을 잘하기 바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괜히 발음이나 목소리로 트집 잡지 말고 무슨 말을 할지 그 메시지에 집중해야 한다. - P13

진심을 담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말하기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과 눈치를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 P13

잘 쓰고 싶은 마음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쓰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이 글을 쓰는 사람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삶의 균형을 잡아주며 내일의 희망까지 비춰준다는 생각이 든다. - P14

내 마음속 깊은 목소리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글과의 건강한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 P14

돈은 쓰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다. 어디에 돈을 쓸 때 내가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를 찾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 P87

같은 돈을 쓰더라도 의미 없이 쓴 사람은 허무함을 느끼고 원래의 목적대로 원하는 곳에 돈을 쓴 사람은 뿌듯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 P87

힘들게 번 돈을 무의미하게 쓰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돈의 사용처를 생각해줘야 한다. 그래야 돈을 모으는 일이 수월해진다. - P87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아껴야 하나?‘가 아닌 ‘이렇게 모은 돈으로 내게 좋은 걸 해줘야지!‘가 될 수 있다. 모든 일이 관점의 차이라지만 돈을 아끼고 모으는 일에도 올바른 관점을 필수다. - P87

내게 뭔가 부당한 일이 닥쳤을 때 참기까지 하면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상처받고 피해를 봤는데 왜 참는 것까지 내 몫인가. - P120

막상 그 부당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거나 저의 상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 P120

아마 그 사람이 저와의 관계까지 생각했다면 뒷담화가 나올 만큼 저한테 함부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 P120

저는 그 사람에게 살짝 경고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뒷담화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 P120

예쁘고 멋있게 말하는 건 그저 보여지는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 말한다. - P155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커뮤니케이션이란 화려한 언변을 필요로 하는 말하기 스킬이 아니다. - P155

그저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끔 진심을 담아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해주면 된다. - P155

한마디로 내 말을 들을 사람에 대한 배려의 크기만큼 소통이 잘 이뤄지는 셈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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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그분은 객관을 뛰어넘어 초월한 시선을 가지신 분이다. - P36

나는 틀리고 왜곡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지만 그분은 항상 옳다.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맡길 때 그분이 모든 상황을 다각도로 만지시고 치료하신다. - P36

우리에겐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든 뭔가를 떠나보내면서 힘들고 슬픈 건 당연한 거다. 잠시 멈추어 그 감정을 부둥켜안고 애도할 필요가 있다. 그건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건강한 애도는 어떤 의식과도 같다. - P56

우리가 만약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형제의 티가 먼저 보이지 않는다. - P78

나의 일은 내 눈의 티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다. 나의 약함을 깨닫는 자는 다른 이의 약함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 P78

육체의 병도 고통당해 본 자가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연약한 존재,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상대의 죄성을 보면 같이 아파하게 된다. - P78

판단하는 자, 죄를 들추가 정죄하는 마음에는 나는 의인이며, 무죄하다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의 자리, 심판의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죄이다. - P78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믿음의 삭을 틔우는 토양이자 그분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 나의 발이 그의 걸음을 따르고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며 그의 말씀을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 P118

힘든 와중에 은혜가 있었고 그것이 생명을 아끼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보살피신다. - P121

출산은 투병처럼 긴 과정은 아니지만 단시간에 겪는 강도 높은 고통이다. - P129

생명을 얻기 위해 겪는 몸의 고통인데 우리의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유사한 면이 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그렇다. - P129

고통이 올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에 저항한다. 힘을 빼고 이완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안간힘을 쓰며 저항한다. 그러나 어떤 고통이든 그것을 피하고 밀어낼수록 그것은 우리를 더 아프고 힘들게 한다. - P129

아파도 몸과 마음을 열어 고통을 맞이 해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고통이 통과한 몸은 길을 만들어 생명을 낳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 P129

아파도 몸과 마음을 열어 고통을 맞이 해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고통이 통과한 몸은 길을 만들어 생명을 낳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 P129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신 번씩 엄마를 부르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빛이 사라진 것처럼 쓸쓸한 얼굴이 된다. 하지만 그 절실함과 그리움의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다. - P132

정말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주어야 할 때가 있고 받아야 할 때가 있고 가야 할 때가 있고 멈춰야 할 때가 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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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는 공동체적이다. 고통은 공동체의 행위가 된다.

(3장처럼) 개인적인 요소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탄원시 안으로 통합된다. 이는 애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성경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울 때 친구들과 더불어 울었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목회 사역의 전략 중 하나는 개인적인 슬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공동체가 더불어 나누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성경적 방식은 개인적인 것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초래된 고통은 한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 고통을 애도하는 것 역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회중의 몫이다.

개인적인 슬픔이 공동체적인 애도로 통합될 때 몇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는, 고통당하는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와 함께 울 때, 고통은 나의 하찮은 약함이나 이기적 상실감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 공동체는 눈물을 통해 그 고통이 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준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참여는 인간적인 환경을 보장해준다.

완고함이나 위선 때문에 홀로 슬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인격화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저 폭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인간적 공동체로서의 독특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일에 참여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다.

공동체는 애도에 참여할 때 상실을 표현하는 행위를 인준한다.

감정을 쏟아내는 행위는 감정의 정화淨化와 갱신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당화된다

목회 사역이 사적인 위로와 개인적인 위무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웃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며 회중이 모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고통당하는 이들은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애도와 항의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

그런 시기에 공동체적 애도라는 정해진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형적으로 이런저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고통을 당하신 그분과 하나가 된다.

고통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목회 사역을 행할 때 집과 예배당 사이에 난 길을 부지런히 오간다. 개인적으로 쏟아내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예배당으로 가지고 들어와 공동체의 슬픔의 일부가 되게 하며, 그것을 십자가 아래에 놓아 모든 속죄의 신학이 제시하는 구원의 능력에 내어맡긴다.

애가는 공동체적이다. 고통은 공동체의 행위가 된다.

(3장처럼) 개인적인 요소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탄원시 안으로 통합된다. 이는 애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성경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울 때 친구들과 더불어 울었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목회 사역의 전략 중 하나는 개인적인 슬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공동체가 더불어 나누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성경적 방식은 개인적인 것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초래된 고통은 한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 고통을 애도하는 것 역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회중의 몫이다.

개인적인 슬픔이 공동체적인 애도로 통합될 때 몇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는, 고통당하는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와 함께 울 때, 고통은 나의 하찮은 약함이나 이기적 상실감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 공동체는 눈물을 통해 그 고통이 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준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참여는 인간적인 환경을 보장해준다.

완고함이나 위선 때문에 홀로 슬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인격화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저 폭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인간적 공동체로서의 독특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일에 참여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다.

공동체는 애도에 참여할 때 상실을 표현하는 행위를 인준한다.

감정을 쏟아내는 행위는 감정의 정화淨化와 갱신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당화된다

목회 사역이 사적인 위로와 개인적인 위무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웃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며 회중이 모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고통당하는 이들은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애도와 항의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

그런 시기에 공동체적 애도라는 정해진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형적으로 이런저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고통을 당하신 그분과 하나가 된다.

고통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목회 사역을 행할 때 집과 예배당 사이에 난 길을 부지런히 오간다. 개인적으로 쏟아내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예배당으로 가지고 들어와 공동체의 슬픔의 일부가 되게 하며, 그것을 십자가 아래에 놓아 모든 속죄의 신학이 제시하는 구원의 능력에 내어맡긴다.

그 순간에 만약 누군가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그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함께 나눠준다면-우리를 있는 그대로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를 존중하고 있음을 표한다면-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상실과 상처에 관한 최악의 감정은 그로 인한 외로움과 거절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상실은 행복한 설교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애가는 미숙한 위로를 막아주며,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렘 6:14-옮긴이) 것을 막아주는 보험이다.

멸망의 때에는 구급약 같은 위로로 심판의 상처를 덮으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심판의 고통과 진지하게 씨름하지 않는다면 위로가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치유자, 모든 목회자는 미숙한 위로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애가를 익힌 목회자는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는 사역에서 느긋하게 일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답관체 시는 서둘러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여유 속에서 인내심을 기를 기회를 얻고, 그 인내심으로 고통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에 일종의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폐허가 재앙이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는 더 이상 폐허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치유하려고 할 때는 서두를 수 없다.

애가에서 고통은 피해야 할 불길한 재앙이 아니라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할 치유의 과정이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치스러운 죄, 우리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이런 태도로 다룰 때 구속의 온전함이 삶 전체에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경건을 더럽히는 죄를 뜯어내시고, 사귐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 받아 마땅한 죄를 구속하신다.

애가의 대부분은 비탄시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비탄시의 한가운데에 빛이 깃든다. 고통의 혼돈이 물러가고, 피조물의 모습 속에 구원의 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길을 내어준다.

고통이라는 혼돈과 어둠은 세상 첫날의 빛이 된다. "야훼의 자비는 끝이 없고, 그분의 긍휼은 다함이 없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로우며, 주님의 신실하심이 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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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반응보다 목회 사역과 인본주의 전통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간섭하거나 그것을 조작할 권리가 없다.

고통은 우리가 특별히 은총에 쉽게 노출되고 하나님의 여러 차원과 깊은 자아의 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다.

고통을 하나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은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인접한 문명권과는 달리 애가에서는(성경에서는!) 신적 분노의 결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기교’를 습득하려는 태도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다

고통을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은 훈련이나 기질에 의해 행하는 사람, 고치는 사람들이다.

애가에서는 고통을 마주한다. 고통을 대면한다

고통에 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답을 주지 않는다. 치료제를 제공하지 않는다.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애가에서는, 목회 사역의 피할 수 없는 일부인 고통에 대해 "도우려고" 노력하는 대신 고통스럽고 끈질기게 그것을 대면하는 일을 목회 사역의 기초로 삼는다

목회자로 하여금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확실히 익히게 함으로써 애가에서는 목회 사역에서의 "오래 참음"을 권면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의미와 존엄성을 부여하고, 치유하는 일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맡긴다.

애가의 권면을 따를 때 목회자는 고통에 관해서 훨씬 덜 하면서도, 목회 사역에는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것이다.

목회자는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치라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목회 사역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거짓된 겸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치는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더 모욕적인 행동은 없으며, 단호하지만 고요하고 신실한 태도로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아침을 기다리는 그 시간 내내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보다 고통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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