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른 이가 좀 시끄럽게 굴었다고 해서 죄인 취급을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적을 용서한 바 있다. 다소 게으르고 조심성이 없고 말수가 많다고 해서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 P200

우리를 화나게 만들고 자극하는 사람을 못 본 척 넘어가는 사람은 언제라도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꿋꿋한 태도로 버텨낸다. 엄청난 타격을 받아도 미동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위대함이다. - P202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시간들은 얼마 후면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타인을 위협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 P239

엄청난 손해를 입거나 부당한 일을 겪더라도, 경멸을 당하고 비웃음을 듣더라도 덧없는 인생사를 초월해 인내하자. 세상사에 휘둘려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죽음이 다가와 있을 테니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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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 마음에 상처를 얻게 마련이다. 정말 위대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거대한 맹수와 같아서 작은 강아지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 P155

고결한 영혼은 악행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당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 당신보다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만약 상대가 약하다면 용서를 베풀고 상대가 강하다면 스스로를 다스려라.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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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전도서는 신약의 빈 무덤에 해당한다. 빈 무덤, 정경의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위대한 ‘아니오’의 경험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할 필요 없는, 사실 할 수 없는 일을 표상한다.

나는 하나님을 돌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스스로 돌보신다

나는 그분을 관리하거나 방어하거나 그분께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은 곧 이제 나는 집으로 가 내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명령을 받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그리고 목회자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은 전혀 복음의 일부가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 짐을 엄청나게 많이 짊어지고 다닌다

우리는 신앙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그것에 대해 번민한다. 그것과 씨름한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빈 무덤은 그런 태도에 반대하는 순간이다.

거짓된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그분을 마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분의 유효성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가 창조주 앞에 조아리는 피조물의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대하는 이방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은 권위 있는 치유와 가르침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통제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극단적이었기에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상황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예수님이 그런 곤경에 처하셨으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향유를 바르고 슬퍼하고 방어하는 행동을 통해 그분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하셨다.

코헬렛은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라고 말한다(12:13).

어떤 신약에는 마지막에 시편이 덧붙여져 있다. 시편은 결론으로서 너무나도 적합하다. 시편은 찬양과 간구, 믿음과 회의를 통해 은총의 경험을 우리 삶에 결합시킨다.

시편은 정직한 고백을 통해 감사와 갈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진 사람은 시편이 여러 방식으로 인격적 친밀함을 길러주고, 이로써 우리 믿음을 "아침마다 새롭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회자는 개인적 갱신과 목회 사역 모두를 위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시편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이 신약에 대한 적합한 결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서는 적합한 서문이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오해와 너무나도 많은 어리석은 감정,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요구를 가지고 있어서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그 실질적인 약속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종교라고 생각하는 내부의 소음과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산만한 경건을 버리게 만든다. 그는 잔뜩 쌓여 있는 종교적인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신앙으로 가장한 속임수를 내쫓는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코헬렛의 헤벨(hebel, 헛됨)을 신약 서문으로 삼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들리지 않게 만드는 혼란과 기만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목회적 지침을 제공한다.

"한 통에 두 종류의 음료수를 동시에 담을 수는 없다. 만약 통에 포도주를 담고자 한다면, 먼저 그 안의 물을 따라내고 통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따라내거나 내다버려야 한다."

모든 목회 사역은 교회, 즉 신앙 공동체라는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목회자는 결코 개인들을 섬기는 사적인 종교 전문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결코 군중을 상대하는 비인격적 연설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공동체에 자리 잡고 그 공동체를 세우는 책무를 맡고 있다.

목회 사역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인간성을 성취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목회자는 그들을 단세포적 유기체가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 바라본다.

인간은 관계 속의 개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부인할 때조차도, 공동체를 모를 때조차도 언제나 공동체의 일부다.

회중(카할)은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작동 단위였다. 그들의 법적 체계에서 최악의 처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추방당해 혼자서 살아가야 할 때 개인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무리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 그들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인 것처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우주 안의 고독한 단자처럼 대하는 목회 사역에서는, 그들을 성서에서 인정하는 인격체에 미치는 못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성경적 인간관은 공동체 안의 인격체, "하나님의 백성"이다.

상자 안의 자갈처럼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확장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을 강조하는 미국적 경향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성경적 전통 사이에서 목회 사역은 단일한 개인들이 아니라 ‘백성’을 다루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인적 인격체들을 구속하는 복음의 통전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개인주의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명백한 사실은, 신앙 공동체, 즉 교회는 매우 전문화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특한 공동체다. 교회와 비슷한 조직은 없다. 어떤 유비나 유사한 경험도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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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을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전통 속에 위치시킬 때 그의 목회적 중요성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흐름-제사장, 예언자, 현자-속에 자리 잡고 있다("…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줄 예언자가 있다"[렘 18:18]).

(이른 시기의) 잠언과(늦은 시기의) 집회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가 건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자리한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지혜의 타락에 대해 항의한다.

현자들이 입을 닫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욥기는 지혜를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지혜 운동 안에서 쓰였다. 이 책이 거부하는 것은 상투적인 글귀로 축소된 지혜, 성공 이야기로 선전하는 지혜다.

전도서는 "제자리를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12:9)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교사와 율법학자로서 자신의 일에 임했다.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의 신앙고백적 기초-신명기의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선포하고 순종하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마음은 영원과 맞닿아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알고자 애쓴다. 그런 마음은 단순한 대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대답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타자이시다. 기적은 하나님께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식으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차원이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신-자유롭게 새로운 일을 하시는-분이라고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적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라는 결정론적 창조에 구속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우주적인 기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 자유로우시다.

목회자는 기적을 행하시는-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길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북돋는 동시에 기적 자체에 대한 믿음-즉,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분리된 채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하는 어려운 책무를 맡고 있다.

정말로 기적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기적의 기능은 현실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존을 그 본질에 따라 바라보고, 우리가 큰 그림이라고 여겼던 표층적 일상의 이면을 보며, 감각 자료에 대한 우리의 완고한 고집이나 우리의 둔한 믿음 때문에 감춰져 있던 것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게 하고, 우리 삶을 인격적 사랑의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궤도 안으로 점점 더 이끌려 들어가게 한다.

이사異事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헌신했던 이스라엘 역시 모든 기적의 세속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겸손한 신뢰, 순종의 예배)는 그들의 예배에서 인간이 신께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삼는 모든 마술적 행위를 배제함으로써 보존되었다

전도서에서는 기적을 조달하는 이들(마술사, 신접하는 자, 점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모든 얼빠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거부를 통해 그런 마술적 행위를 효과적으로 미리 차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떤 능력을 얻어 친구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으로 우리를 영원히 감동시키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리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간다.

야훼 신앙은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 예배 형태였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호소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인간의 합리적 지성이 각성되었다.

야훼 신앙에서는 무언가-사람들에게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말-를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제사장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자와 함께 일했으며, 예언자적 말씀이 성전 예배와 결합되었다. 이스라엘이 성숙했을 때는 예언자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예배를 지배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절대로 부차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배는 인간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종교를 참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예배는 개인적, 영적, 민족적 삶을 사로잡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매개체로서 삶의 물질적인 측면(건물과 몸)까지 하나로 모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예배를 시작하고 통제했지만, 감각을 통한 참여도 배제되지 않았다.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신체적인 동작도 포함되었다. 거룩한 춤과 교창交唱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표현했다.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한 부분이었다. 그 어떤 행위도 그저 감각적 경험만을 위해 행하는 것은 없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경적 자료와 예전적 역사 속에서 예배는 개인이 경험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관계없이, 혹은 느낌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언가다.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생겨난다.

이스라엘과 교회에서는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씀은 권위 있고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고 그에 대해 순종을 요구하셨다. 예배는 그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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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삶의 공공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말의 의미와 영향력은 이례적인 방식으로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 설교자들이 더 많습니다.

교회의 번영과 회중들의 모임에 이런 현상이 엄청난 위험이 된다는 것은 모순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쇄된 글이나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회중으로 모인 모임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말씀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삶과 가족과 사회에 주어지는 복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언약의 인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 죄의 용서 그리고 영생의 원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다른 그 어떤 모임도 이 자리를 대체하거나 그 모임의 상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우리 시대에, 주어진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룩한 부르심이 복음 선포를 위해 허락된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모든 단순성과 진리와 권세가 자신들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양심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멋진 장식과 효과적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진실하고 아름답고 부요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복음을 제시하고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충실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이 무기들을 숙련되게 사용한다면, 여러분의 능력은 배가될 것이고 영향력은 더 광범위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관계된 다른 모든 은사들은 더 강력하고 열정적인 표현으로 제시될 때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종 즉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이름은 매우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성경은 혀와 말의 거룩한 사용에 대한 의무를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말하기를 잘 하는 것은 단순히 강단이나 법정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사회적 품행에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연신론을 직접적으로 배격하고, 처음부터 만물의 원리를 맹목적인 충동의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라, 자의식적이며 인격적이며 독립적인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소유하신 지혜를 통하여, 곧 만물의 첫 열매(prwtotocoj thj ctisewj)이신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재창조하십니다.

이 절대적이며 신적이며 근원적인 말씀의 능력을 보십시오. 다른 모든 말에서 나타나는 능력은 이 말씀에서 비롯되며, 바로 그 안에 이 능력의 기원과 형상이 있습니다.

말씀이 모든 피조물 중에 맏아들이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에 걸쳐 어떤 특정한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물에는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사상과 언어와 음성과 소리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발화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됩니다.

만물이 말을 합니다. 각각의 피조물들은 그 고유의 언어와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웅변적(eloquent)입니다. 죄는 그 노래의 유일한 불협화음입니다.

인간이 피조 세계의 대표자이기에 피조적 언어의 정점은 인간에게서 발견됩니다. 만물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그[인간]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특히 그의 언어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이요 빛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칼이나 폭력보다 강력한 힘입니다

말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상징도, 상투적인 소리도, 헛된 예술 작품도 아니요, 적극적인 이해를 통해 "수고롭고 부지런히" 추구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모든 생물들처럼 살아있고 열망하며 정화되고 성장하며 퇴보하고 아프며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그의 존재 자체로부터 발생한 것이지, 아리안주의(Arianism)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의지로 인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 곧 가장 깊고 내밀한 그의 존재를 보게 됩니다.

말을 통해 사람은 빛으로 발을 들여놓고 은밀함과 침묵에서 나와 자신을 나타냅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서가 형성되고 산관(birth canal)의 어둠 속에서 영과 혼의 자녀가 출생합니다.

이 무익하고, 무가치하며, 쇠약한 말, 곧 이 공허한 말(cenoi logoi)에 반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모든 무익한 말을 해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선호는 곧 거짓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존재와 반대되는 것을 향한 사랑, 곧 공허한 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거짓말은 사탄적입니다.

무익한 말의 근원은. 인간이 형식도 공허한 무도 다 탈피한 채 그저 표면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데 있습니다.

말을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온전히 존재해야 합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웅변의 근원은 논리적인 지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의 행동이나 결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의 마음에 있으며 생명이 흘러나오는 그의 정신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웅변의 생명입니다.

"위대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Les grandes pensees viennent du coeur)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말에 임하게 되면 웅변이 태어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감동을 받고 영혼의 생명의 파동이 너울거린다면, 우리 정신이 이끌려 활기를 띄며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면, 잠겨 있던 진정한 웅변술의 근원이 우리 안에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깊은 내면의 감정이 연설의 원리입니다.

흔들리고 아연실색하는 그것이 바로 영혼의 감수성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웅변술의 창조를 위해서는 강력한 감정 상태, 감동 받은 정신, 감명 받은 마음,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부인할 수 없는 충동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서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권위 있는 자로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웅변적이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의한 것이며, 고찰이나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 통한 것이고, 사람의 부름이 아니라 신적 권위(droit divin)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웅변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본성이었고, 예술이라기보다는 은사였습니다.

여전히 웅변술은 단지 하나의 은사로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예술입니다.

성경 말씀에 관한 한, 은사는 어떤 영역에서도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기술을 요구하고 필요로 합니다

재능은 웅변을 탄생시키거나 그 흐름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기쁨의 강으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웅변은 "열정적인 이성"(la raison passionnee)이라고 올바르게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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