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세기가 바뀌면서 국가들 사이에서 생각하는 것과 노력하는 것에 눈에 띄는 흐름의 변화가 있습니다. 혁명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혁명이 약속했던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눈앞에 매달려 있던 낙원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실망과 불만족이 도처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문화에 대한 만족이 부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상태에 대한 불만과 쓰디쓴 불평이 늘어난 삶에 지쳐버렸습니다

요한은 믿음이 사람 안에 삶의 새로운 원리를 심어준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시민, 영생의 상속자가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강력한 능력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생명을 주신 분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강권합니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이 사랑 때문에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올곧게 지켜 행하려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부과하는 계명들은 무거우며 세상을 섬기는 일은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의 계명들이 온종일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분의 멍에가 쉽고 그분의 짐이 가볍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장 4절과 5절에서 심지어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확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생명을 주신 분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강권합니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이 사랑 때문에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올곧게 지켜 행하려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부과하는 계명들은 무거우며 세상을 섬기는 일은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의 계명들이 온종일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그분의 멍에가 쉽고 그분의 짐이 가볍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장 4절과 5절에서 심지어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확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요한은 믿음에 반하는 모든 것, 곧 믿음이 겪게 되는 모든 반대들, 믿음이 분투하는 것에 맞서 적대하는 모든 힘을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요약합니다

"세상"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실제로 "보석"[또는 "장신구"]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세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그 형태와 색상, 조화로운 질서와 규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The Greeks)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인 세상에 경탄했습니다.

성경 역시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정하지 못한, 시야의 범위 너머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불러 존재하도록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며,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고 당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며 매우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타락 이후에도 강력하고 경건한 언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큰 물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지면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발자취가 풍요로움으로 흘러넘칩니다

여호와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고, 그분의 이름은 온 땅 위에 영화로우며, 그분의 자비는 행하신 일에 충만합니다.

성경은 그저 심미적 세계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광대한 창조사역과 그분의 미덕을 널리 알리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찬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이 시도하는 자연의 신성화 작업과는 크게 다릅니다.

성경은 창조된 피조물들에 대하여 구별된,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고 신적인 의의 요구에 따라 모든 것을 시험합니다.

세상은 타락했으며 그 이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섬기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세대와 가족들과 언어와 사람들, 역사의 모든 시대들, 발전하고 확장되는 모든 세기들, 전투와 승리, 문명화와 쇠퇴, 국가와 제국의 설립까지도 바로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의지로 말미암아 세상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이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온 피조물이 탄식하며 지금까지 고통 가운데 노동하고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피조 세계 전체가 허무함에 굴복되었는데, 그것은 그 허영심에 복종한 한 사람의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왜냐하면 죄가 온 세상을 손상시켰고 세상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소위 단하나의 목적 즉 창조주이시자 주님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게 만드는 단하나의 원리로 살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세상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 지으신 분과 지음 받은 대상,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자체로는 존재조차 없는 먼지와 재 밖에 안 되는 무능력한 피조물 사이의 이 반목과 혐오, 분쟁과 전쟁의 상태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의 토대로 존재하지 못하며,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통해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생명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며 그 능력과 힘, 그것이 존재하고 소유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대항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죄는 세상이 어두움의 군주를 그 사령관으로 두고, 사악함 가운데 놓이게 하며, 불의한 상태로 살게 하고, 죄와 부정의 나라를 형성하게 하며, 폭력과 속임수로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과 왕국을 이기려고 분투하게 만듭니다.

명백하게 이를 통해, 죄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은사들이 그 일을 섬기게 하며, 세상은 막강한 힘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을 섬기는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이와 관련하여] 기꺼이 스스로를 속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존재의 중심으로는 세상을 대항하여 하나님 편에 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사람들인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안에 가장 강력한 증거들과 죄의 전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원해서 기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들을 사용하여 죄를 섬깁니다. 우리는 아무런 이의 없이 죄의 방향을 따릅니다. 우리 모두는 온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면전에서 범죄하고, 부정하며, 부패하고, 정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부인할 수 없는 권세로 존재합니다.

죄는 그 지배권을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시킵니다. 실로 누가 비참한 인생들인 우리를 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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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 P18

몸에 좋은 것을 챙겨 먹는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을 멀리하려는 마음. 좋다는 걸 잘 아는 만큼 그게 어렵다는 것도 너무 잘 알겠어요. - P18

내 마음 안에 있는 ‘나’ 중 가장 현명한 ‘나’는 늪에 빠진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내가 본인의 존재를 알아차리면 그제서야 고개를 내밀고 웃으며 손짓하네요. - P52

고민하고 고민할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뼘 자랄 거라는 걸 잘 안다는듯이. - P52

정답없는게 인생이라도 나만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줘요. 늘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네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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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사람이 지닌 ‘섬세함’은 성격상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타고난 기질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 P5

보통 사람들은 읽어내는 정보가 적기 때문에 섬세한 사람처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곁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세심하다’, ‘너무 신경 쓴다’고 완벽주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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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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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가기 위해 펼쳤는데,

질문하게 만드는 책.



책 읽기 즐기는 분, 

글쓰기와 가까이하셔야 하는 분이라면. 



흥미롭게 묘사된 글과 그림을 통해

오랜만에 웃을 수 있는 책.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정말 다양한 표현과 그림들.



깨알 같은 재미들이 많으니,

찾는 재미도 쏠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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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 특히 교회의 회원들은 여기서 반드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겸손이란 올바르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항상 어울리는 옷입니다.

겸손은 반드시 우리의 집에서, 여행지에서, 결혼식에서, 장례식에서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말씀 아래 침묵하며 고요히 앉아있는 것이 그들의 강점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생각에서 그것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당신이 손으로 행한 일로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며,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고 있는지 무엇을 성취하고 있는지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가는지,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은 상실되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공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적으로는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가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때 온 세상이 그것을 듣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회중의 회원들에게 집을 떠나 단순히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를 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 설교가 [교회 예배의] 가장 고상하며 유일한 특징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함께 섬기고 신자들로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사랑과 예물을 올려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늘어나는 과실에 대한 회중들의 책임이(시대 정신의 영향으로)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회중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더 중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설교자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분명하게도 설교가 유일한 예배의 요소는 아니며 심지어 우리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는 신자들의 제사장적 사역이다-도 아니지만, 확실히 설교는 제사장적 모임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상당 부분이 설교에 좌우되는데 특히 우리의 종교 예식에서 설교는 가장 위대하며 고상한 부분입니다.

로마 교회를 미사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개신교 교회들은 말씀의 교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영광스럽고 훌륭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읽거나 노래 부르는 말씀이 아니라 입으로설교된 말씀의 방편으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들음에서 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그분의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회중들이 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로 말미암음이요, 이는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언약의 표와 인과 관계된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은 거룩한 믿음 안에서 더 강해지고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은 순결함 안에서 보호 받고, 전투 가운데 격려를 얻으며, 고난 가운데 치유 받고. 신앙 고백 안에서 굳게 세워집니다.

양떼는 설교를 통하여 교회에 머무르게 되며, 교회는 그 양떼와 함께 권위와 존경과 예배가 더욱 흥왕하게 됩니다.

설교의 중요성은 쉽게 간과할 수 없으며 설교자라는 직무의 가치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감추심으로부터 나누어주는, 곧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verbi divini minister)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직책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따라서 책임과 부르심은, 전달하는 사람에게도 막중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그의 다른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그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최신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일에 실패하는지요! 그들은 재능을 낭비하고 오용합니다. 그들의 설교에는 종종 그 용어와 어조가 상투적이고 진부하며, 부정확한 어투와 조악한 표현들, 그리고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와 손짓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열정적인 준비와 단순성과 진실이 결핍되어 있고, 속도와 사상, 믿음과 영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숙함과 기름 부으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작금의 설교가 시의적절하지 못하며 그 필요를 채워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강단이 다시 한 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개선될 터인데, 그런 일은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로 돌아갈 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성경 연구는 설교자에게 가장 근본적이며 일차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주석 없이도, 필요하다면 명석한 관찰, 기도하는 마음, 경건함, 잘 수용하는 영혼, 그리고 거룩하고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성경을 체계적이며,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회중은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고 더 분명히 경험해야 하며, 그 유기적이며 일관성 있는 통일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불신앙과 관련된 이론들과 의심들을 대적하여 회중들이 더욱 확고하게 서게 할 것이며, 경건함을 수반되는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젊은 세대들이 멀어지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런 요구를 실천에 옮긴다면, 설교를 손상시키는 모든 결함들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회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설교자들에게 교훈을 제공하십시오. 하지만 그들의 배를 그저 덧없는 세상 견해나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만 채워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힘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음식과 충분한 영양소를 제공하십시오.

성경에서 나온 그 내용은 점점 건강해지고 생명력 넘치게 되며 신선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연구한다면, 그는 모든 교만함과 오만불손함, 그리고 헛된 철학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화법은 성령에 의해 형성될 것이고, 성경의 화법과 하나가 될 것이며, 최고의 설교자요 유일한 교사이며 교회의 의사이자 보혜사이신 성령님(Doctor et Consolator Ecclesiae)의 화법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회중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열어 선포해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가 보잘 것 없는 논리가 아니라 단순함과 능력 가운데, 그들 자신의 언어 안에서, 선명하고 명료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갈망며,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설교를 고대합니다.

회중들의 설교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설교한다면, 그들은 감사를 모르는 냉담한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순결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진실하게, 믿음 안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일은 자유 교회(De Vrije Kerk)의 존재와 성장을 보존하고 보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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