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적 죄책은 진정한 회개를 요구한다. 하지만 결국, 죄책은 우리 외부에 있는 분의 자기 시여라는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크게 감격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내주시는 분이 큰 희생을 치르고서 우리와 연대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적 신앙이란,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자기희생으로 바뀌는 사랑-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시적으로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냥 무효화해 주시는 분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변화를 그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일종의 값싼 은혜로 듣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 얼마나 큰 값을 치르셨는지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화의 부재와 담화의 상실, 이 두 경우, 삶은 침묵으로 축소되고 만다.
신학적 침묵이 자리한 곳에서 인간의 삶은 시들어 죽고 만다. 신학적 침묵이 자리한 곳에서는 신성한 친교가 불가능하다.
그 무시무시한 침묵 앞에서 설교자는 담화를 재개하고 재연하여,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친교를 허락한다.
설교자는 처음부터 쌍방향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실로 이야기를 나누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말을 하고, 말을 듣고, 말을 걸고, 말로 대답하며, 말에 의지해 살아간다(참조. 신 8:3).
이스라엘 가운데 잠잠하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격노, 소외, 분노, 죄책 같은 짐들이 그들의 담화를 뒷받침한다. 침묵으로 움츠러들었던 짐들이 제 힘과 에너지를 충분히 발휘한다.
설교는 초대하는 것,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담화야말로 세상의 고통을 놓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담찬 믿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성실한 현존에 관해 말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선포의 순간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노예 상태를 극복하고, 유배 상태를 끝장내며, 죽음을 이긴다.
고통이 탄식 속에서 믿을 만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동경하면서도 감히 예상하지는 못하던 회중의 듣기 속에서 구출은 재현된다.
설교자의 말은 하나님의 보증 담화를 재현함으로써 회중의 소심한 동경을 넘어, 실로 강력하게 넘어, 진정한 새로움으로 나아가기까지 한다.
담찬 설교란 우리 삶의 필수 요소인 대화, 우리 가운데서 전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대화를 개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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