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성공했어도 성과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견디지 못하는 심리적 불안감은, 외부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내면 기반이 취약하거나 삶의 다양한 측면을 유연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성장통이란 다르게 표현하면 ‘창조적 마찰‘입니다. 새로운 자신을,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이지요.

곡선형 사고란 질문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질이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의 질을 결정합니다. 색다른 답을 찾으려면 이제까지 제기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작은‘ 것입니다. 다른 길에 대한 ‘거창한‘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뭔가 거창하지 않으면 의욕이 안 생기니까 변화는 더 멀어지니다. 하지만 실상 그렇게 큰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인생은 딱 내가 가진 실력만큼 꾸려갈 수 있습니다. 종종 나보다 빨리 뛰어가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나도 좀더 속력을 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입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할 때 속도를 올리고, 돈을 더 벌고, 성과를 더 올리는 것도 평상시에 자기 페이스를 충실히 유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속도는 남과의 경쟁이지만 밀도는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속도는 빨리 가는 방법에 관심이 많은 반면, 밀도는 내면의 결핍된 욕구를 채우는 데 더 의미를 부여합니다.

밀도는 만족감, 행복, 충만함, 꿈을 향해 걸어가는 가슴 뛰는 여정에서 느끼는 의미심장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실제 불안에 잘 대처할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안해하던 일이 막상 터졌을 때는 허둥지둥 당황하고 좌절감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벌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게 됩니다.

긴긴 마라톤코스에서처럼, 우리 모두는 인생행로 곳곳에서 깊은 절망의 나락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싸워야 하고, 나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적을 제압하는 싸움이라면 오히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자신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공력과 기예를 총동원해야 하는 한 편의 예술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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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당신이 무언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심지어 기도를 할 때도 당신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하셔야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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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고 싶은 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이 일에 대해서 제 마음과 신경을 집중시켜 당신께 기도했고, 신경을 잔뜩 곤두세워 "오 하나님, 제발"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바른 방식으로 당신께 간구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소 체념하는 자세로 구하려고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덜 열광적으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열광이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영적 신뢰에서 나오는 자세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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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찌모찌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모찌모찌 2019-12-24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감사드려요~~^^ 즐거운 크리스마스되세요~~
 

실제적 죄책은 진정한 회개를 요구한다. 하지만 결국, 죄책은 우리 외부에 있는 분의 자기 시여라는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크게 감격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내주시는 분이 큰 희생을 치르고서 우리와 연대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적 신앙이란,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자기희생으로 바뀌는 사랑-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시적으로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냥 무효화해 주시는 분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변화를 그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일종의 값싼 은혜로 듣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 얼마나 큰 값을 치르셨는지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화의 부재와 담화의 상실, 이 두 경우, 삶은 침묵으로 축소되고 만다.

신학적 침묵이 자리한 곳에서 인간의 삶은 시들어 죽고 만다. 신학적 침묵이 자리한 곳에서는 신성한 친교가 불가능하다.

그 무시무시한 침묵 앞에서 설교자는 담화를 재개하고 재연하여,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친교를 허락한다.

설교자는 처음부터 쌍방향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실로 이야기를 나누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말을 하고, 말을 듣고, 말을 걸고, 말로 대답하며, 말에 의지해 살아간다(참조. 신 8:3).

이스라엘 가운데 잠잠하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격노, 소외, 분노, 죄책 같은 짐들이 그들의 담화를 뒷받침한다. 침묵으로 움츠러들었던 짐들이 제 힘과 에너지를 충분히 발휘한다.

설교는 초대하는 것,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담화야말로 세상의 고통을 놓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담찬 믿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성실한 현존에 관해 말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선포의 순간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노예 상태를 극복하고, 유배 상태를 끝장내며, 죽음을 이긴다.

고통이 탄식 속에서 믿을 만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동경하면서도 감히 예상하지는 못하던 회중의 듣기 속에서 구출은 재현된다.

설교자의 말은 하나님의 보증 담화를 재현함으로써 회중의 소심한 동경을 넘어, 실로 강력하게 넘어, 진정한 새로움으로 나아가기까지 한다.

담찬 설교란 우리 삶의 필수 요소인 대화, 우리 가운데서 전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대화를 개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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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과 경제성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삶이라는 건 대단히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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