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이란 말하는 것을 그저 열심히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청취일 뿐이다. 그 대신 경청이란 "말하게 하는 현실적 계기와 동력을 부여"해야 한다. 즉 말하지 못하던 것, 말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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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세계에 빠진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 세계에 맞춰 이해하고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타자를 만나더라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다른 말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로 바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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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징벌과 교육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학교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은 노동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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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과 상담이 아닌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곁이 사라진 자리를 편으로 메꾸며 악몽으로 만들어간다. 곁을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편의 언어는 공격적이고 맹목적인 경우가 많다. 편의 정치는 끊임없이 적대를 창조하고 그 적대로 사람들을 몰아가며 너는 누구 편이냐고 윽박지르며 ‘곁‘을 파괴한다.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 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입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은 낯섦으로부터 설렘은 없애고 두려움과 피곤함만 남겼다.

나를 발견하고 가늠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더이상 공포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나를 방문하고 다가오는 것이 공포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고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환대가 아니라 ‘예의바름‘이 된다.

자유는 시장자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는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그 욕망이 자신에 의해 점검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보였던 많은 것조차도 사실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강요였다. 진정한 자유는 그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에서 나온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자신이 선택한 것을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에서 자유는 사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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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깐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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