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은 내게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하고 싶은 일‘과 ‘보상이 좋더라도 하지 않으면 더 좋은 일‘을 구분할 지혜를 주었다.

중년은 노년의 앞 페이지에 살짝 끼워진 부록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지혜롭게 삶을 바꿀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청년처럼 다급하지 않게, 노년처럼 마음과 몸의 거리가 너무 많이 멀어지지 않게. 결코 내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겐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눈물과 흐느낌을 담아낼 마음속 비밀의 화원이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노래를 불러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정원을 가꾸어도 좋다. 마음속 비밀의 화원을 가꿀 용기의 씨앗이 싹트는 곳에서 우리의 찬란한 마흔은 꽃필 터이니.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력은 부지런히 갈고닦되 내 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아마추어처럼 순수해야 한다. 아마추어의 본질은 ‘미숙함‘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다. 최고의 장인처럼 일하고, 처음 일터에 나가는 신입사원처럼 해맑은 ‘첫 마음‘으로 내 일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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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 낼 뿐이다.

지금까지 내게 사랑의 본질은 감정의 영역에 국한되었던건지 모른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등의 조용한 감정들・・・・・・ 그러나 사랑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정신이고 그럴 때 정신은 행동한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하강. 그러나 생은 쌍곡선 운동이다. 어딘가에서 하강할 때 또 어딘가에서는 상승한다. 변곡점이 곧 다가오리라. 거기서 나는 새의 날개가 되어 기쁨의 바람을 타고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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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계시되고 인간의 삶 가운데 체험된 인격적 존재이다.

곧 그분은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불의와 정의, 전쟁과 평화,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고 혼재된 우리들의 삶 속에 나타나시어, 목마르고 상처받은 영혼의 귓가에 속삭여주시며 정의와 평화와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는 이신론의 틀에 갇혀 원리와 법칙과 이성으로서 계측되는 하나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우주에는 중력Graviational Force,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 강력Strong Force, 약력Weak Force이라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연 우리 인류의 기술문명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앞으로 1천년 혹은 1만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문명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핵전쟁이나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나 신종 바이러스, 소행성의 충돌이나 지질학적 격변 등이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요인들이다.

인류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인간에 의한 요인이 더 많다. 또 자연적인 위협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려면 인류의 선한 의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인간이 성취한 놀라운 과학기술은 한편으로는 문명의 이로운 도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공할 파괴력을 행사한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지의 기간 여부는 이런 지적 생명체가 상당한 수준의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존속 기간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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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함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쉐키나(임재)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을 가를 수 없다. 그러나 제도화된 종교는 거룩을 권력으로 치환하곤 한다. 그들은 가르고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들의 특권을 강화한다.

예수님은 ‘거룩함‘이라는 척도가 지배하는 유대교 사회적 세계에 새로운 척도를 제시했다. ‘자비‘가 그것이다.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 타자의 약점까지도 품어 안으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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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호흡지간의 일이다.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시면 세상 만물은 살고,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잠시 허락받은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이다. 우리가 떠나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지 않을 때 마음은 각박해지고 남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지 못한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생명 세상을 이룰 수 없다.

참다운 발전이란 국내총생산GDP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가는 것이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가는 것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존경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느라 깊이나 높이를 지향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지혜를 소중히 여기면 그것이 우리를 높일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느끼고 생각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자기를 온전히 비웠기에 예수는 모두를 마음에 품을 수 있었다. 참된 자유의 비결이 자기 비움임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세상에서 무력해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 승리는 진리 편에 있다. 하나님의 뜻을 살기로 작정하고, 그 뜻을 굳게 붙잡은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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