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본 도시가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췄던 성전의 지성소처럼 완벽한 정육면체라는 것은 놀랍다.

지성소는 작은 공간이었고, 대제사장 한 사람만 그것도 매년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도시 전체가 지성소다.

도시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만 2천 스타디아인 정육면체다(21:16). 다시 말해, 약4천 제곱킬로미터로 요한 당시 알려진 세계 전체의 넓이다.

핵심은 분명하다. 새 창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집중되는 특별한 곳이 없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거룩한 건물이 없을 것이다.

전체가 성전이다. 이런 까닭에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거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완전하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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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메시지는 이러한 세상 질서와 뚜렷이 대조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서열과 우열을 가렸다. 예수는 그들을 나무라셨고 하나님 나라는 어린이들, 즉 지위, 권력, 특권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베풀라고 말씀하심으로 후견의 원리를 허무셨다. 선물을 줄 때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황제를 아버지로 모시는 로마 제국이라는 가족의 관습이었다.

예수는 청중에게 예속과 의무의 관계로 움직이지 않는 대안적인 가족 관계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의무감을 버리고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어 쓰기를 바라셨다.

예수는 로마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시고, 신들의 보살핌 아래 예속와 의무에 기초한 당대의 생활 세계 대신 감사하지 않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고와 감정과 믿음과 행동의 본(패턴)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메시지는 마음가짐과 행동뿐 아니라 ‘세상 질서‘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관해서도 로마의 정치 질서와 사뭇 달랐다.

개념적으로 예수의 모습은 이사야서가 그리는 대로,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종의 모습에 가깝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라고 가르치셨고 스스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섬기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자기보다 남을 위하라는 메시지를 실천하셨다.,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 의의를 설명할 때 명확히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는 현대의 경향은 필연적으로 ‘죄의 용서‘와 ‘민족의 회복‘을 구분한다. 이는 시대착오다.

제2 성전 유대주의에서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었고 예수도 용서받는 문제를 꺼내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해 말씀하실 수 없었다.

복음서가 기록하듯이 그분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이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에 바탕을 둔 윤리를 가르치고 실천하셨고, 로마와 유대의 종교적·정치적인 생활 세계와 관습을 전하는 자들을 반대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을 지키고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는 삶, 의인으로서 고난을 받고 죽음으로써 구원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는 삶을 상징하는 죽음을 맞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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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란 그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 곧 신자가 하나남과 관계 맺는 내적인 삶, 우리로 하여금 변화되고 행동을 취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경건 생활과 훈련,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축을 말한다.

복음주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보다도 십자가로부터 비롯되고, 감사함으로 십자가에 반응하며 겸손하게 십자가를 본받는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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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강조하시고(삼하 7:9-11), 다윗보다 훨씬 위대한 미래의 왕을 말씀하신다(11-16절). 언약의 미래가 이 미래의 왕에게 달린 게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을 통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새 출애굽, 새 언약, 새 민족, 새 예루살렘, 새 성전, 새 왕, 심지어 새 창조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델을, 부분적인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리켰던 것을, 실물을,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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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다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상황이 눈앞에서 자행될 때는 떨쳐 일어날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권력이 남용되고 가난한 이들이 모욕당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비겁이다.

오늘의 교회가 무력하게 변해버린 것은 정의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제사장적 위로는 넘치지만 예언자적 외침이 잦아든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삶은 신비이다.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실패처럼 보이던 일이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를 세워준 계기가 될 때도 있고, 성공처럼 보이던 일 때문에 우리 삶이 어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씁쓸한 실패의 기억과 달콤한 성공의 기억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우리 인생이라는 피륙을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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