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만들어낸 것이 이 땅의 민중이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나‘라는 인간의 주체성을 만든 것이 나란 존재다.

고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철학은 이 땅 민중과 나에 대한 어떤 철학적 행위도 온전히 할 수 없다.

한다 해도 그것은 가짜 철학일 뿐이다. 진짜 철학은 이 땅 가득한 고난, 그 고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자해(自害)한 역사가 아니다.

수난의 역사, 당함의 역사, 억울함의 역사를 살았다.

정말 이 땅에서 이 땅 민중을 위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그 고난의 주체성 앞에 마주 서야 한다.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가능했다.

낡은 시대의 고난 속에서 가능했다. 그 고난은 죽으라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 스스로 출산해내는 과정이다.

고난은 새로운 희망을 품은 공간이며,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 품은 공간에서 새로운 질서와 정신을 출산해냄으로 가능하다.

이 땅 민중의 ‘고난의 언어‘로 민중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함으로 스스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반응하는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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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주체성은 자기반성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반성과 돌아봄, 바로 그 회상은 나와 더불어 있는 ‘너‘없이는 불가능하다.

너를 만난 ‘나‘가 진짜 나이며, 너와의 시간과 공간이 비록 지난 일이라도 지난 일이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 가운데 ‘나‘는 ‘너‘와 더불어 존재하며, 너의 고난을 ‘남‘의 고난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고난으로 두며, 고난 앞에서 더 깊게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한낱 ‘사유의 존재‘(ens rationis)가 아닌 ‘현실의 존재‘(ens reale)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때 고난 앞에서 우리는 더욱더 단단해진다.

고난의 역사는 이어진다.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은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아픔의 순간이고 슬픔의 순간이지만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고난은 희망의 시작이다. 희망은 ‘나‘의 앞에 누군가를 ‘우리‘ 가운데 ‘너‘로 부르며 시작한다.

손잡고 나갈 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는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가 되면서 시작한다.

역사 속 ‘나‘는 오직 홀로 있지 않다.

더욱 깊어지는 철학이란 그 슬픔 가운데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 기억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을 남의 슬픔으로 돌리지 않는 철학을 말한다.

‘남’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안에 ‘너’의 슬픔으로 안아주는 철학이어야 한다. 이들을 안아주지 않는 철학 앞에서 민중은 ‘철학의 부재’ ‘생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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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아직 있지 않은 나라의 정부다.

그들이 생각한 철학이 반영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국가를 위한 정부다.

아직 온전히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 속 국가에 대한 정부다.

그러나 그저 가능성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을 통해 표출된 독립에 대한 민중의 요구로 일어난 정부다.

민중이 불러 세운 정부다. 지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이란 국가가 임시정부에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적이다.

한글은 소리 문자이기에 한글이 철학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말은 민중의 언어 자체가 철학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서서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면서 ‘나‘의 생각을 담은 ‘나‘의 말을 ‘나‘의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글로 송사(訟事)를 하게 되고, 문학 활동도 이루어졌다. 당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글이 민중 사이에 녹아들어가면서 서서히 민중의 생각이 민중의 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글‘이 없는 민중은 ‘말‘이 없는 민중과 같다.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조선 전체를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글‘은 달랐다. ‘생각‘을 담은 ‘말‘을 기록한 ‘글‘은 조선 전체에 퍼져갔다.

이런 가운데 민중은 일종의 언어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하나 됨‘과 그 ‘하나 됨‘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자각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 긍정으로 이어졌고, 존재를 긍정하게 된 민중은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한국철학의 공간은 ‘민중‘이다. ‘민중의 고난‘은 한국철학을 가장 철학다워지게 만든다.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에서 철학은 ‘뜻‘있는 철학이 된다. 대학이 아니라, 바로 민중이다.

‘한국철학의 회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교요지》와 같은 서학서로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임‘은 ‘평등의 희망을 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국철학의 회임‘은 ‘한국철학의 출산‘으로 이어졌다.

‘품은 희망‘이 현실의 절망 가운데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난의 주체가 스스로 고난의 짐을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철학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순간, 부조리한 권력자의 지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동학혁명군의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지만, 동학은 실패하지 않았다.

죽은 듯 죽지 않은 것, 죽어 보이지만 죽지 않은 것, 아니 있음으로 보이지만 있음으로 있는 것이 부활이다.

동학의 철학은 부활의 힘이었다. 동학의 철학은 자기 내어줌을 통해 3·1혁명의 이념이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이 되고, 이후 한국 현대사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일어난 수많은 순간의 기본 혈맥의 시작이 되었다.

희망을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서 구한 동학의 철학은 이와 같이 제대로 한국철학의 출발점이며, ‘한국철학의 출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철학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고난 가운데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궁리로 이루어져가는 지혜의 사랑이다.

나는 나의 과거를 나의 기억에 근거해 스스로 복원해야 한다.

스스로 회상해내야 한다. 이것이 나라는 주체성의 초석이다.

무엇보다 나와 우리의 눈물이 시작이 되는 곳에서 나의 기억으로 스스로 돌아보는 주체성을 가진 철학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슬픈 첫사랑이라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그때 나와 나의 그 연인은 죽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란 존재의 조각이 된다.

힘들어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란 주체성의 정당한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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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허락도 없이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은 몰래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세웠다.

허락받지 않은 정당성 없는 국가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정당성의 기준은 중국이다.

그러니 중국의 허락을 받은 중국 사람 기자(箕子)의 ‘조선‘만이 정당성을 가진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조선은 바로 그 기자의 ‘조선‘에서 나왔다. 단군의 ‘조선‘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조선의 고향은 기자의 조선이다. 이렇게 조선은 중국의 변두리로 시작되었다.

‘남‘의 변두리에서 ‘남‘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의 허락을 구하는 이에게 철학은 없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더 이상 그렇게 있지 않겠다는 민중의 분노다!

더는 변두리에서 허락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있음을 긍정한 분노 가득한 철학의 외침이다.

1919년 3·1혁명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스로 있겠다는 자기 긍정의 분노 가득한 철학적 외침 말이다.

조선의 철학과 한국의 철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철학은 양반의 철학이지만, 한국의 철학은 이 땅 민중의 철학이다.

이 땅 역사를 가득 채우는 눈물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고난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슬픔을 모르는 철학은 철학다워지기 힘들다. "사람이 철학적이 되는 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고난과 슬픔 속에서 ‘나‘는 참된 ‘나‘를 돌아본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다.

나의 말과 글로 아파하는 나를 돌아본다. 이렇게 고난과 슬픔은 ‘나‘를 중심에 두고 철학하게 한다.

철학의 고향은 고난과 슬픔이다. 한국철학은 민중의 고난과 슬픔에서 시작한다.

한국철학의 주체성은 ‘서로주체성‘이며 ‘더불어 있음‘의 주체성이다.

동학에서의 주체성도 그러했고, 3·1혁명의 주체성도 그러했으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성과 세월호의 비극 앞에 선 우리의 주체성도 그러했다.

한국철학의 주체는 고난의 주체인 민중이다. 한국의 민중이란 이름의 ‘우리‘다.

반성 속 나와 더불어 있던 수많은 ‘너‘들과 우리를 이룬 가운데 있는 나. 그런 ‘나‘들의 ‘우리‘가 한국철학의 주체다.

명제 속 주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고, 그 주어에 대한 술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며, 바로 이 현실 속에 더불어 있는 주체가 우리다. 그 ‘우리‘가 한국철학의 진정한 주체다.

3·1혁명은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다. 민중의 외침이었다.

기꺼이 강요된 숙명과 다투겠다는 외침이었으며, 스스로 있겠다는 존재론적 외침이었다.

순교란 부활의 조건이다. 그 순교의 피로 대한민국이 가능했고, 그 순교의 뜻이 피어나는 과정이 뜻의 철학이 피어나는 과정이었다.

‘나‘는 우리 속에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흩어진 더미‘를 말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있다‘고 해도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순 없다. 즉 ‘우리‘로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 되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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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
월터 브루그만 지음, 윤상필 옮김 / 성서유니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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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해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에 비해 어려워서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탁월한 구약성경의 해석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통찰력 넘치는 성경해석을 통해 구약성경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 가운데 놓여 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더불어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하나님, 이웃, 제국』을 통해 성경 본문(text)의 상황(context)은 '제국'의 맥락 가운데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며, 약자의 부를 강자에게 몰아주고, 상품화 정책을 추구하며, 이러한 제도를 위해 언제든 모든 수위의 폭력을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이러한 제국 한가운데서 '대항 텍스트'(countertext)로 존재함을 브루그만은 역설한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통제하지만, 대항 텍스트는 주류 텍스트를 전복하려 하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여기서 저자는 언어유희를 통해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하는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 대항 텍스트라고 표현한다.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 subversion 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19).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해방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님은 출애굽 내러티브, 광야 체류 내러티브, 시내산 언약 등을 통해 현실의 상황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개입하신다. 우리는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저자는 호세아 2:2-23, 출애굽기 34:6-7, 예레미야 애가 3:20-22, 시편 85:10-13을 통해 정의와 은혜, 율법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장엄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신실함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이웃을 향해 나아감을 촉구한다. 더불어 이러한 관계성은 창조 세계의 회복과 관련되며, 모든 만물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살리며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할 때 참된 정의가 드러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위로부터의 정의'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대조한다. '위로부터의 정의'는 '왕의 정의'로 축재를 일삼으며, 통제하는 정의다. 이는 서민들의 삶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제물 삼는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는 자리이며, 성경은 그러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우리에게 들려준다. 참된 정의는 고갈과 축재, 독점과 폭력과 대항하여 해방이 불러오는 풍요가 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만이 짧고 불행한 축재의 삶에 맞서는 대안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한계를 초월하신다. '공통 신학'으로 대변되는 통제와 체제 정당화의 신학은 조건적인 면모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제재와 심판을 가하는 식이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당대에 만연한 체제의 신념과 세계관을 뛰어넘는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셨다. 


율법에서 저자는 제국의 법과 야웨의 율법을 대조한다.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다. 이 법은 고칠 수 없고 철회할 수 없다. 하지만 야웨의 토라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개방되어 있으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위해 열려있다. 물론 하나님의 법 가운데에서도 고대 근동의 '공통 신학'적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율법은 그 긴장 가운데 궁극적으로 긍휼과 환대라는 회복적 정의와 함께 타자(이웃)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들음으로 계속되는 제국주의(전체주의)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다. 지속된 경청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어로 돌아선다. 그리하여 '이웃'을 향한 긍휼과 환대를 베푼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함없이 생동하시며 여전히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자세히 귀를 기울인다.


브루그만은 구약의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제국적 측면을 폭로하며, 그것과 반대되는 우리 삶의 가장 적실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이끌어낸다. 그의 성경 해석은 통찰력 있고, 필체는 생동감 넘치며, 적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세계관이 해석 과정에서 녹아들어있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성경 본문으로 돌아간다. 구약의 내러티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도 꼼꼼하고 세세하게 본문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지금 현재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부차적이지만 책을 읽을 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편집과 번역의 질을 들 수 있다. 성서유니온의 책이야 믿고 읽을 수 있다. 편집의 질로 인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번역은 책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중요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번역의 질이 떨어지면 집중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 책의 번역은 매우 훌륭하다. 브루그만 특유의 문체와 느낌을 잘 살려낸 듯하다(며칠 전 읽었던 책은 매우 훌륭한 저자의 탁월한 내용이었는데,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 힘들 정도의 문체와 단어 선정이었다). 


더불어 옮긴이의 적절한 해설은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역주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해설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감춰진 사본'이나 '빈곤과의 전쟁', '자신을 방어할 권리', '뉴 짐 크로우 법'에 대한 개념을 관심 있는 독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성경 본문은 항상 상황 속에서 출현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본문이 나타난 순간이나 당대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정치와 경제는 항상 동일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와 관련된 본문의 거시 상황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 P17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 P19

출애굽의 해방 내러티브, 광야에서 증명된 풍요, 시내산 언약은 야웨의 단호하신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화를 보라. 그분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요, 제국의 우상들이 판이하게 다른 야웨이시다. 그런 분이 착취에 관심을 두실리 만무하다 - P21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 P23

야웨께서 약속하신 새 일은 이제 ‘이적/경이‘mavels, wonders와 관계된다. 이 약속은 갱신된 언약에 발맞추어 도래할 결과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며, 이는 참으로 웅장하고 독창적일 것이다 - P46

신실에 대한 가르침은 타자를 신실의 궤도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타자를 거부하는 입장은 성경에 안온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하나님, 이스라엘, 교회가 공히 드러내듯이 궁극적인 신실함이란 타자를 품고자 가까이 ‘나아감‘reach을 말한다. 이 나아감이 ‘나아갈 자‘reacher를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뛰어 넘어 창조 세계로 오시고,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나아가셔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선민이 된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 P82

그분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요, 이스라엘과 만민을 신명나게 하며 바다와 들과 나무를 춤추고 노래하고 포효하게 하는 통치다 - P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 하나님은 ‘먼 곳으로부터‘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가사의하게 등장하신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변함없는 충실함hesed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P169

이분은 예사로운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한 분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은 천상이나 성전처럼 먼 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깨진 관계를 바라보시고 친히 돌보시며 능히 한계 너머로 나아가실 수 있다. 그분이 광야로 진입하신다. - P188

통속적인 공통 신학은 은혜가 보응의 한계 너머로 흘러 나갈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로의 처지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 이스라엘은 야웨, 곧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속량하시고 관을 씌우시고 만족케 하시는‘ 분의 연민 어린 뜻이 구체적인 정책에 담길 것이라고 상상한다(시 103:3-5). - P221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 P265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토라를 말씀하고 주석하고 강조하신다. 그분은 이웃 사랑의 관점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신다. 은혜로이 품으시고 정의롭게 회복하시는 그분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정돈하겠다고 변함없이 고집하신다 - P286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묻기도 하는 상대가 되었음을 알고 벅찬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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