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아무 맥락 없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낼 때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는 것을 기억하자. - P161

더구나 평소 속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아들이 뭔가 이야기를 꺼낸다면 아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 P161

여자들 사이에서는 고민이나 문제가 있을 때 함께 있어주면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남자들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한다. - P162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P162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그 자리에서 고쳐주되, 부드럽지만 자신 있고 당당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 P171

아들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거나 ‘아직 어린데 나중에 크면 하겠지?‘라며 넘어가서는 안 된다. - P171

화내고 소리지르며 직접적으로 인격을 비난하는 것도 나쁘지만, 한 숨을 내쉬며 ‘너를 포기했다‘는 식의 표정을 짓는 것도 나쁘다. - P179

직접 대놓고 하는 공격은 반항심을 갖게 만들고, 한숨과 표정으로 주는 메시지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무기력감은 후에 수치심으로 변해서 자아에 저장된다. - P179

아들은 ‘짧게, 요점만 간단히‘ 혼내라. 길어지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 P187

또한 억지로 화해시킬 필요도 없다. 문제가 해결되면 관계는 저절로 풀린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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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사로서 나는, 심각한 위기는 우리에게 성경을 새롭게 다시 읽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 P18

대부분의 세상이 주목하는 능력과 달리, 예수님의 권능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연약함과 어리석은 지혜의 힘이다. - P19

첫 번째로 가장 명백한 해석 가능성은 바로 언약의 집행 방식(transactional mode of covenant)이다. - P22

언약은 질서가 엄밀하게 유지되는 세상에서 ‘선한 사람은 형통하고 악한 사람은고통당한다‘라는 단순한 전제에 기초하여, 명령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 P22

순종은 보상을 받는 반면 불순종은 벌을 받는다. - P22

전반적으로 선지서에 언급되는 율법 소송‘(lawsuits)은 순종/불순종 및 축복/저주에 대한 전제를 공유한다. 선지서의 수사법에서 언약에 기초한 명령은 불순종에 대한 고발을 유발하며, 저주는 예언적 심판이 된다. 동일한 논리다. - P25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에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데, 이 특별한 전승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던 유다 왕국의 종말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5

따라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예레미야서의 관심은 분명히 신명기의 전승에 기초해서 형성되었다. - P25

두 번째 해석적 궤도는 야웨가 그분의 특정한 목적들을 실행하기 위해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권능을 행하심을 나타낸다. - P28

이 궤도는 앞에서 살펴본 언약의 집행 방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와 같은 권능을 드러내시는 데에는 동등보응에 명백하게 해당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 P28

동등 보응은 때로 암시되고 추론될 수 있으나, 명백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궤도는 야웨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심하시고 권능을 행하시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 P28

그[출애굽] 내러티브의 목표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가운데 창조세계의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 P29

출애굽 내러티브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히브리 노예 공동체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 P29

이러한 파괴의 한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괴를 가져온 재앙들은 의도적이고, 고의적행위로 추진되었으며, 새로운 역사적 백성 이스라엘의 출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않고서는 출애굽 내러티브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 P33

출애굽기와 이사야서의 이 두 텍스트는 어떤 역사적 질서체계라도 야웨의 의도를 거스르면 그에 맞서서 강력하고도 파괴적으로 행동하시는 야웨의 능력과 불요불굴의 의지를 보여 준다. - P37

사랑의 힘 이외에도, 야웨는 자신의 주권을 실행하시는 많은 도구를 지니고 계신다. - P37

엄밀한 동등 보응이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주권을 드러내는 강력한 권능을 동원하는 것 이외에도, 하나님의 파괴하시는 행위와 관련해서 세 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있다. - P38

이 세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이유나 설명이나 책임도 없이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실 수 있으며, 어떤 목적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인다. - P38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그 목적을 선포하셨으므로, 아무도 이를 취소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그와 같은 주장은 역사의 진행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치라도 결국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밝혀 준다. - P43

이스라엘과 느부갓네살이 배웠듯이, 야웨는 설명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 P45

하나님은 어떤 한계도 거부하시며, 자신을 길들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드신다. - P45

결국 참된 지식은 과학적 탐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 있으며 악을 멀리하는 데 있다. - P48

일들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일들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들의 영광이다. (잠 25:2) - P49

인간의 탐구는 "일들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호기심에 근거한 합당한 작업이고, 특히 현재의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다. - P49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잠언의 두 번째 행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합당한 일을 언급하는 첫번째 행에 상응한다. - P49

그러므로 인간의 탐구와 하나님의 숨기심은 창조세계의 경이로움과 관련해서 끝없이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이다. - P49

인간의 탐구에 존재하는 한계들은 금지의 형태인 것이 아니라 숨기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인한 것이다. - P49

그렇지만 잠언은 하나님의 숨기심이 언제나 인간의 탐구를 초월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P49

그렇기에 잠언의 가르침에 따르면, 과학은 언제나 탐구를 해 나가겠지만 결코 창조세계의 신비를 모두 다 파헤치지는 못한다. - P49

설교자에게는 이러한 당혹스러움(wonderment)의 시기에도 활용할 수 있는 놀라운 해석적 원천들이 있다. - P54

설교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설교자들이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살아가도록 위임받지 않았다. - P54

오히려 우리는 또 다른 영역, 곧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도록 부름받았다. - P54

그것은 근대주의자의 논리를 제압하며 초월한다.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통치는 계몽주의의 섬뜩한 논리를 무찌르고, 심판하고, 자비로 구원할 것이다. - P55

언약에 기초한 제재를 받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생명과 지위와 권세가 야웨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에 달려 있음을 기억한다. 그는 어떠한 계약관계로도 제한할 수 없는 야웨의 자유로운 행위를 의지한다. - P64

그 예언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좋은 옛 시절‘로 돌아가는것이나, 압제적 왕권 아래 이전의 정치 및 경제 제도로 회복되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 P77

오히려 그 표현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땅은 다시 정돈되고 질서가 잡히며, 사람들은 새롭고 신실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P77

따라서 그것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무대로의 ‘회복‘이다. - P77

하나님의 ‘회복‘은 그 특징상 새로운 은사들을 베푸심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향하고 있다. - P77

이 하나님은 회복하시고 고쳐 주시며 새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이분은 약속의 땅을 떠나셨으나 돌아오시는 하나님이다. - P77

목회 사역의 역할은 이 바이러스가 최종 권세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바이러스의 치명적인 힘마저 꺽을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 P8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간구해야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고 회개하며 야웨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에 강조점이 놓인다. - P98

곧 야웨의 목적들에 합당하게 반응하면서, 언약에 기초한 존재로서 다시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P98

이스라엘의 역할은 언약에 기초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며, 야웨의 역할은 옛 약속들을 실행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며 기도할 때 언약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 P98

전쟁과 전염병과 기근은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 P99

그분은 그와 같은 재앙들마저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바이러스도 그 힘을 빼앗길 것이다. - P99

결국 이 본문들은 재앙으로부터 야웨의 통치로 주어를 전환한다. 그렇게 바뀐 주어는 우리가 위협 아래에서 이웃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조정해 줄 것이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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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겁고 유일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참된 의미란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가? - P49

그 의미를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은 도리어 오해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바보 취급을 당한다. - P49

그 의미를 품고 살아가는 강자는 도리어 약자 취급을 당한다. 그 의미를 먹고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환자 취급을 당한다. - P49

용서, 곧 죄의 용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혼란의 해명과 해결이 갖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는 단어가 아닐까? - P63

그들의 무한한 격정은 오히려 생명이 무한함을 암시하고, 그들이 겪는 거대한 곤경은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의 거대함에 대한 지식을 전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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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이념에 매혹됐다. 그런데 인간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격정의 폭풍이 일어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극도의 무모함을 불러일으키며, 거인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가 사탄처럼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다. 매혹의 정점은 에로스로 인한 매혹이다. - P42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삶에 관한 새로운 직관"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 P38

그의 책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은 혁명가도 아니고 평화주의자도 아니며, 특별히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도 아니고 순교자나 성자도 아니며, 탐미주의자나 개혁가, 혹은 철저하게 회심한 사람도 아니고-"오로지" 한 사람, "삶에 관한 새로운 직관"을 얻은 한 사람이다. - P38

그는 여전히 그의 본성이 지닌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새로운 직관의 심판과 약속 아래에서,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삶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 P38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저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 명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한 명의 죄인으로 인해 더 많은 기쁨이 있다. - P38

여인의 아름다움은 모든 논리적·윤리적 인과관계를 무너뜨리고, 그 밖의 모든 납득할 만한 연관성을 뛰어넘어 폭발하듯 도드라진다. - P43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매혹과 도취의 가능성과 함께 그보다 나은 가능성, 즉 마법에 저항하고 유혹에서 벗어나며 경계선을 거룩하게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 요컨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도 주어져 있다. - P44

그러므로 카라마조프 가문의 비극적인 소용돌이 안에도 어떤 깊은 의미, 최종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알료샤의 믿음은 결코 허무맹랑한 믿음이 아니다. 카라마조프 가문의피가 흐른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불능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은 아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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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 - ‘칭의’의 의미를 살피다
김서령 지음 / 좋은땅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칭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주요한 논점은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칭의'와 인간의 반응으로서 '믿음' 혹은 '순종'을 어떻게 연결하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한 삶'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행위'를 어떻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결부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 연구에 관심이 많은 평신도로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는 이 문제로 17년간 씨름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의 의미를 다각도로 살핀다. 결국 칭의는 그동안의 도식처럼 여겨졌던 '믿음 대 행위'의 문제가 아님을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하고, 그간 성경을 연구하며 정리한 '언약과 의'에 대한 주제를 풀어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팔머 로벗슨(O. Palmer Robertson, 1937~), 브루스 데머리스트(Bruce Demarest, 1935),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로부터 N.T 라이트(N.T Wright, 1948~)와 제임스 던(James D.G. Dunn, 1939~ 2020), 김용규까지 그야말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저자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료의 취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자신이 선택한 결론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노아 언약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노아 언약의 역사성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들여 진지하게 논의한다. 더불어 '창조, 타락, 회복'의 구원사관보다는 '창조, 타락, 새 창조'의 구원사관에 동의함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놀라운 점은 저자가 어떤 노선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폭넓고 깊은 주제 연구를 통하여 도출된 결과를 통해 자신만의 결론을 주장한다. 때로는 그것이 개혁파의 입장이 될 수도 있고,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전제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성경에서 사용된 '언약'뿐만 아니라 '언약'을 이해하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개념들을 명확하게 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죄', '죄 사함', '속량', '칭의' 등의 단어의 개념과 용례들을 구체적으로 밝히며, 이 단어들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칭의론', '해석학', '언약과 의', '칭의론의 역사' 등 '칭의와 언약' 안에 논의될 수 있는 여러 질문들을 아우른다. 성서신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의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주어진 질문에 세밀하게 접근한다. 칭의와 언약,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성경의 핵심적 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분이라면 많은 통찰을 얻을 것 같다. 


언약은 소망과 믿음과 순종이 사람의 이해와 인격 안에서 ‘어떻게’ 결부되는지를 드러내는 개념적 장치다. 사람이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부의 상태에 이르는데, 하나님은 그 상태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 언약은 의가 사람의 이해와 인격에 입체적인 의미와 실체로 짜여져 들어가도록 고안된 개념적 장치다. 언약은 하나님과사람의 그런 관계가 ‘왜‘ 진정한 것인가를 밝혀 주는 개념적 장치다 - P26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던 조약의 구성을 당신의 언약에 반영하셨을까? 아마도 양쪽의 차이점이 유사점을 압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형식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내 언약"을 쉽게 이해하면서도 내용의 차이 앞에서 경외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P59

성경이 서술하는 언약백성의 역사는 교리집을 계승하는 역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의에 관한 성공과 실패와 회복을 반복하는 역사다 - P61

하나님은 당신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양보하여 언약에 담으시고, 반면에 내 실존을 언약으로 확장하신다. 언약은 하나님의 양보와 인간의 확장으로써 실존적 만남을 이루는 개념적 인격적 장치다 - P80

노아 언약에서 의는 ‘세상이 윤리적 죄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 준거‘가 된다. 노아는 언약으로써 세상의 ‘윤리적 타락‘을 정죄하지 않고 ‘믿음과 순종이 없음‘을 정죄한다. 세상은 아마도 노아의 윤리에 무관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에는 너무나 관심이 많아서 떠들썩하게 조롱했을 것이다. 홍수의 날에 세상은 자신들에게 없는 근본적인 것이 ‘어떤 높은 윤리‘가 아니라 ‘믿음과 순종‘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윤리적 불의를 심판하실 때 세상으로 하여금 노아의 언약적 의를 보게 하신다. 언약적 의를 보게 하신다. 언약적 의가 윤리적 의보다 상위에 있다. 언약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있어서, 윤리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P93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언약의 의도는 믿음과 순종의 철저한 결부다. 그 철저함 때문에 우리는 그 결부의 이면적 의도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언약은 믿음과 순종의 해리(풀려서 떨어짐)를 막고자 한다. 언약은 우선 말한다. 인격 안에 둘 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 인격 안에 하나만 있으면 안 된다. 이 둘은 서로를 통해서 자기 본질에 이르기 때문에 하나를 잃으면 남은 것은 본질을 잃는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본질을 잃은 채로, 홀로 있는 믿음이나 홀로 있는 순종은 거짓이다. 둘 다 없으면 그저 없는 것이지만 하나만 있으면 거짓이 있는 것이다. - P102

하나님의 구원은 언약적 구원이다. 언약적 구원은 다음과 같이 양상을 보여 준다.
ㄱ)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과 명령으로 언약을 세우신다.
ㄴ) 하나님은 사람을 품으시고 소망과 믿음과 순종에 이르도록 기르신다.
ㄷ) 하나님은 그렇게 기르신 사람에게 ‘너는 의롭다‘고 하신다.
ㄹ) 하나님은 언약 백성과 자신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권위, 능력, 돌봄, 신실로 통치하신다.
ㅁ)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약속을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
한 사람의 구원을 넘어선 공동체의 구원은 아브라함 언약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 맺은 언약 관계로 시작해서 그의공동체가 함께 맺는 언약 관계로 확장한다. 이 언약에서부터 공동체적 소망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 P156

속량은 서사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속량되는 사람은 옮겨지고 소유권이 이전된다. 출애굽은 속량의 서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출애굽을 통해서 ‘건져 냄, 옮겨짐, 들어감, 소유됨‘이라는 목표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속량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이미지를 대표한다 - P395

속량(구속)‘은 좁은 의미로서는 죄 사함을 함의하고 넓은 의미로서는 ‘구원‘을 함의하는 말이다. 속량은 ‘언약- 죄- 죄 사함- 속량-새 언약-칭의- 약속된 것을 받음‘이라는 흐름 속에 위치함으로써, 구원이 언약적 서사‘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의 피, 속전(속량)의 피, 언약의 피다.
"
- P409

율법의 행위는 율법의 본래적 무능이나 인간의 본래적 무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의의 율법(롬9:31)’을 죽이는 조문으로 전락시켜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음을 비판하는 말이다. 즉 약속, 소망, 믿음을 상실한 인간이 율법을 하나님의 속량이 벌어지지 않는 조문으로 타락시킨 것이다.
"
- P437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과 명령으로써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이 방식을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명령에 순종해야만 믿을 수 있는 약속, 약속을 믿어야만 순종할 수 있는 명령, 이 공교한 이중결부. 이 기이한 지혜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을 당신의 신성을 향해 확장하신다. 그렇게 그분은 인격적인 관계를 넘어서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사랑을 위해 언약으로 당신을 축소하시고 언약으로 인간을 확장하신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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