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신성의 영역, 신의 영역을 완벽한 타자이자 인간의 영역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 P30

하느님은 위쪽 하늘에 있고 우리는 아래쪽 여기 땅에 있으며, 둘 사이에는 무한한 틈이 있다고 여긴다. - P30

그러나 대다수 고대인은 신성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 P30

신성의 영역에는 다양한 층이 있었다. 어떤 신들은 다른 신들보다 "더 신성하다" 고 할 수 있으며, 인간도 때로는 신들의 계급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 - P30

게다가 신들은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올 수 있었으며 때로는 인간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정말 내려왔다. - P30

신들이 이런 일을 할 때는 흥미로운 결과가 생기거나, 불행을 겪고서야 알게 된 프리기아의 불친절한 거주자들처럼 불길한 결과가 빚어졌다. - P30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를 선재하던 신이 육화한 존재로 여기기는했지만, 신성한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 태어나는 방식은 그리스나 로마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아니었다. - P32

훨씬 일반적인 관점은, 탄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신성한 존재가 세상에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 P32

왜냐하면 신이 인간과 성관계를 가지면 그 자손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했기 때문이다. - P32

그리스 신화에서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위를 제일 많이 저지른 신은 바로 제우스였는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와 매력적인 여성과 색다른 성관계를 갖고 무척 유별난 임신을 하게 한다. - P32

그러나 제우스와 필멸하는 그의 연인들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거리용 신화가 아니다. 때로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323)처럼 실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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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비참한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무력하고 절망에 빠진 노예 상태였을 때 신이 친히 나서 주지 않았다면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집트 종교에서는 파라오를 태양신의 아들로서 초인적인 지혜와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라고 여기므로, 종교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이집트 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출애굽기」 설화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역사적 인물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모세의 인물 됨됨이를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가 그를 불러 자신의 뜻을 펴는 주역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드라마의 주역은 모세가 아닌 야훼 자신입니다.

김교신은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동족끼리의 추잡한 이전투구가 이집트 지배하의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있었음을 발견하고 우리 민족의 현실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적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기적과 크게 다릅니다. 기적이라 하면 현대인은 으레 자연법칙의 파괴를 먼저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자연관과 우주관은 대부분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우주는 시계공이 시계를 만든 뒤 태엽을 감아 놓은 상태와도 같아서 더 이상 창조주의 간섭 없이도 자체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이 뉴턴적 패러다임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진보 사상과 결합해 오늘날까지 우리 뇌리에 깊숙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인식론에도 영향을 미쳐 20세기의 논리적 실증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실증주의에 의하면 진정한 인식은 모두 과학의 경험적 방법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실증적 지식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아무런 존재론적 기반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성적 태도를 무시하고는 현대 문명을 이해할 수도, 현대사회를 살아갈 수도 없을 겁니다. 이성을 무시한다면 종교 역시 미신이나 광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에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합리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어떤 사건을 경이롭고wonder-ful 의미심장하게sign-ificant 느꼈다면, 그 이유는 "그 사건이 자연법칙을 깨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신이 임재하고 활동하고 있음이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신은 세상을 창조한 후 무관심하게 돌아앉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언약을 지키며 우주의 운행에 간섭합니다. 신은 이렇듯 항상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봄비가 온다거나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등의 ‘자연적인’ 사건 속에서도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해는 자연법칙에 따라 뜨는 것이 아니고 신이 날마다 "일어나 돌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의 종교는 대단히 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규칙적인 활동과 함께 둘째로, 구약에는 신의 권능이 개입한 비범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들을 특수한 ‘표징’signs이라고 합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기적은 신의 의도적인 활동을 나타내는 표시이긴 하지만 결코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신은 자신의 임재와 구속 의지의 표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인간의 편에서 함께한다는 믿음과 신뢰를 가질 때에만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일이 됩니다.

이 여행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광야에 들어선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로운 몸으로 신을 섬긴다는 것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 비해 썩 나을 것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집트의 고기 냄비(16:3)를 그리워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야훼의 인도와 도움의 ‘표징’을 체험했음에도, 광야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점은 『구약성서』 저자가 민족 형성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동요 또는 철저한 불신을 대단히 솔직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 민족의 결점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이 한층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에서는 역사 연구의 자료가 되는 각종 문헌(이것을 사료라고 하지요)을 취급할 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는 사료 비판 과정을 거칩니다.

둘째,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인간적 업적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의 섭리를 의식하는 가운데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훼의 백성’이란 말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신명기」 27:9, 「사사기」 5:11 등)으로, 유대교의 ‘회당’ 및 그리스도 이후 기독교의 ‘교회’(회중會衆) 개념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70인역 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회당synagoge 또는 회중ekklesia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이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 교회"로 표현되어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시절은 그들이 마땅히 돌이켜야 할 ‘황금시대’였으며, 그들의 현재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야훼 예배를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오기 이전에 야훼 예배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종교 인물인 모세에 의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신앙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택과 계약, 이 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신 야훼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 개념이었습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첫째 이야기는 둘째 이야기의 준비이며, 둘째 이야기의 신학적 근거는 첫째 이야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신에게 선택된 백성으로, 신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존재로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한 가지 유념할 점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설화와 전승들은 일관되게 이스라엘 민족을 ‘비겁하고 은혜를 모르는 반역적인 백성’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을 언급하는 성서의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의 선민 됨이 이스라엘 민족의 어떤 공적의 결과임을 말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공로 없이 과분하게 얻은 야훼의 은혜로 간주하고 있지요.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야훼의 계명에 순종해 살기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야훼의 은혜에 응답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계약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이질적인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정부나 국가기구에 의해 통일된 적이 없었음에도 약 200년 동안이나 극도로 불리한 환경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하게 살아남아 한 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견지했습니다.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한 가지 공동 체험의 기억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 체험의 기억은 거기에 참여했고 또 이스라엘의 핵심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의 영도하에 놀라운 방법으로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들은 이 출애굽 사건을 야훼의 자비로운 간섭에 의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훼는 새로운 신이었으며, 모세는 그 신의 이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후 시내로 옮겨 가 그곳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고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계약으로 인해 전에는 존재한 적 없던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 공동체는 혈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체험과 도덕적 결단에 의거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사건을 체험한 집단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도입되면서, 계약에 의해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부족 동맹이 형성되면서 출애굽 사건과 시내 계약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규범적 전승이 됩니다

평등 계약은 호혜적(서로 도와 이익이 된다는 뜻)이며 계약 당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쌍무 계약을 맺습니다. 반면 종주권 계약은 종주국의 우두머리인 대왕great king과 속국의 우두머리인 봉신vassal이 주종 관계에서 맺는 것이기 때문에 편무 계약이 됩니다.

모세가 맺은 계약은 평등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대등할 수 없는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었습니다. 야훼의 거룩함과 장엄함이 백성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천둥과 번개로 표현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계약은 야훼에게서 일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야훼와 인간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야훼의 계획initiative에 의해서였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복종 서약("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에게 주의 말씀과 법규를 모두 전하니, 모든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했다."(「출애굽기」 24:3)은 야훼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였으며, 야훼의 은혜로운 계획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은 야훼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며, 야훼가 베푼 구원이야말로 그들의 복종의 근거였습니다.

『크리스천과 역사 해석』, 『기독교와 역사』 등의 저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1900?1979)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상상 없이는 신에 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시내 계약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 중, 히타이트의 종주권 계약이 야훼와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 준다고 판단해 그 개념의 틀을 빌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계약 양식은 족장 시대의 계약과 현저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9장 1?17절에서 신이 노아와 맺은 계약 또는 「창세기」 17장에서 신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은, 미래를 보장하는 무조건적인 약속을 근거로 하며,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그 약속을 믿을 의무밖에는 없습니다.

이 계약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상관없이, 신이 인간을 상대로 맺은 영원한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계약은 이미 실행된 야훼의 은혜로운 활동들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무거운 의무가 수반됩니다.

후대의 일부 예언자가 모세 계약을 중요시해 백성이 야훼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신이 그 때문에 계약을 파기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계약에 대한 두 가지 입장(무조건적인 계약과 조건적인 계약)은 그 후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어 나가게 됩니다.

아라비아, 코카서스 고원지대, 소아시아 등지에 사는 수많은 고대 민족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지정학적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두 문명 사이에 낀 이른바 ‘육교’ 신세로서, 열강의 끊임없는 투쟁 무대가 되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이 좁은 땅덩어리를 놓고, 작은 나라들은 생존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강대국들은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거칠고 잔인한 혈투를 벌였습니다.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 역시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 힘겨운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신앙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은 ‘농사지을 수 있는 땅으로의 인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 사건’과 ‘약속의 땅 정복’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분리가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고대인의 관념에서 낙원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성서 기자는 팔레스타인을 낙원처럼 풍요로운 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옥한 초승달 지역 중에서 팔레스타인이 가장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은 과장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불모의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척박할지언정 가나안 땅이 낙원이었을 겁니다. 굶주림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하잘것없는 음식일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구약학자 폰 라트는 「신명기」 26장 5?9절을 모세 6경의 요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클라이맥스가 ‘야훼께서 약속한 땅을 주셨다’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모세 6경의 역사에서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야훼가 이스라엘에 땅을 선물했다는 것, 즉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영토를 획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침략당한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정복 활동은 매우 억울하고 편파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오만한 국수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후대의 예언자들마저 (다른 민족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스라엘이 영토를 획득한 사실을, 야훼의 은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합니다.

모세 6경, 그중에서도 가나안 정복을 다룬 「여호수아」는 편협한 신관 때문에 많은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후대 예언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많은 부분 제거되거나 수정되고 구약 사상은 새롭게 발전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종교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진정한 보편성을 얻기에 이릅니다.

모세 6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체류한 사실이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대부분을 가데스바네아(카데스바르네아)Kadesh-barnea라고 하는 사막 지대에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은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불모지 네겝(네게브) 광야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모세의 추종자 집단 내부에서는 각각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했습니다. 구심력이란 공동의 계약에 대한 충성심을 뜻합니다. 계약 공동체라는 생각이 그들을 굳게 결속시켰습니다.

이러한 구심력을 저해하는 원심력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부족 간의 갈등, 지도권을 둘러싼 경쟁, 기아와 갈증, 신앙의 결여 등 인간적인 요인이 그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계약을 토대로 이루어진 결속과 유대는 광야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분열의 원심력으로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다른 민족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겁니다.

구약 종교는 역사적 종교입니다. 역사란 결국 시간과 공간을 무대 삼아 전개되는 것인 만큼 공간, 즉 지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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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고유한 ‘영혼의 결’을 갖습니다. ‘자아’라고도, ‘개성’이라고도, ‘달란트’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입니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도덕적 행위와 미래의 운명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세계 속에 도덕적 질서가 있고, 인간의 현재와 미래 사이에 도덕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도시 우르는 한때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던 선진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시와 복잡한 법률 개념 그리고 당시에 이미 정교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종교 이념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종교의 창시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땅에 대한 약속’을 최초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계약 개념은 매우 독특한 사상으로, 고대 근동에서 그와 비슷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특별한 은총에 기인한 순종의 언약’에는 역사상 최초로 윤리적 하나님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언약에 입각해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일종의 인자한 입헌군주였습니다.

서양 정신사를 이루는 두 기둥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헬레니즘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시작으로 그리스인이 창출해 낸 수많은 고전에 면면히 흐르는 사상을 말합니다.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태동한 사상을 이르지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성서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히브리 종교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히브리 종교가 역사종교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공부할 때 「출애굽기」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히브리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서아시아로의 지리적·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자연종교에서 역사종교로의 수직적 비약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나긴 방황을 거치며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확립하고, 나아가 종교 민족으로서의 사명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사의 모라토리엄이요, 정체성 위기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먼저 읽고 「출애굽기」를 읽는다면 그것은 책을 거꾸로 읽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세 이전의 시대는, 모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탄생시킨 출애굽이라는 중대한 사건에 비추어서 회상되고 또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언제, 왜 재조명되었고 또 어떻게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경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단군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한 최초의 역사서는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와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입니다. 왕의 이름이 ‘충’忠으로 시작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충렬왕은 몽골 지배하의 고려왕입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역사서는 고려 말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족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단일민족으로서의 자각과 민족의 시조에 대한 관념이 강해진 결과, 단군신화를 중요 기사로 다루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인 아브라함에게서 그들의 역사적 기원을 찾았고,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이주한 이야기에서 그들의 선민 된 자격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출발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무엇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히브리인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풀려나는 출애굽 사건이 있기까지의 서막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현존하는 사료에서는 그들이 당대가 아닌 ‘과거’에 관심을 가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사후에 얻을 평판에만 지극히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리엔트 지방을 배경으로 ‘과거’에 무척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압도된 한 민족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 온 여러 증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 기록을 시작한 바로 그때, 이미 그들은 이 역사적 기억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는 여러 가지 전승, 즉 다양한 사료가 복합되어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정설입니다. 이 점에는 프로테스탄트 학자, 가톨릭 학자, 유대교 학자가 모두 의견 일치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승과 사료는 모두 한 가지 역사적 기억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았기에 그들이 지녔던 공동의 역사 인식은 남달리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과거의 사건에 이토록 강하게 감사의 마음을 지닌 채 산 민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의 ‘터줏대감’을 버리고 서아시아 ‘모래밭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신’을 떠나 ‘역사의 신’을 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히 『구약성서』 기자記者들에게 출애굽은 철저히 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정치적 예속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신이 그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신의 계시와 현존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설화는 우리가 말하는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역사입니다. 성서 기자들에게 역사를 쓴다는 것은 곧 역사 속에 나타난 신의 위대한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란 뜻으로서의 역사입니다

둘째, 탐구의 의미를 갖는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가가 제시하는 사건에서 해석만 떼어 내면 순수한 과거의 사실만 남게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역사가는 취사선택을 해 가며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선택하는데, 이 경우 선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를 대변하는 성서 기자들에게는 출애굽이 완전히 신적인 사건으로 비쳤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적 예속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신이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신의 활동이었으며, 신의 계시와 현존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핵심을 이루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신이 역사 속에 개입해 들어온 사건입니다. 이는 영원의 일부가 인간의 차원으로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출애굽은 영원의 빛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색깔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었습니다. 신은 출애굽이라는 정치적인 사건 속에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순간은 영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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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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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포인트』, 『아웃라이어』, 『다윗과 골리앗』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올해 새롭게 선보인『타인의 해석』.
글래드웰은 특유의 세심하고 평이한 문체로 전문적인 연구들과 실제 사례들을 흥미진진하게 해석하고 있다.

자칫 제목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물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 독자라면 부제와 원제를 살폈을 것이다.
부제는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인데 원제인 ‘Talking to strangers‘에 더 어울린다 하겠다.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 맺어야 하는 현대인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낯선 사람을 만날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낯선 사람과 관계한다.
하지만 우리가 맺는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매우 서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서툼을 인정하고 타인을 겸손하게 대해야함˝을 강조한다.
매우 명료한 결론이다. 이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저자의 섬세함과 탁월함이 이 책의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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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와 내면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우리 기대에 부합한다. 그들의 의도는 행동과 일치한다. 태도와 내면이 불일치하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예측하기 어렵다. - P220

우리가 우리 사이에 있는 낯선 사람에 관해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확고하지 않다. - P311

아만다 녹스나 제리 샌더스키, KSM에 관한 ‘진실‘은 우리가 깊숙이 땅을 파면서 열심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캐낼 수 있는 어떤 단단하고 반짝거리는 물체가 아니다. - P311

우리가 낯선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은 단단하지 않다. 생각 없이 밟으면 뭉개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서 두 번째 주의표시가 나온다. - P311

우리는 낯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탐색에 실제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절대 진실의 전부를 알지 못할 것이다. - P311

온전한 진실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올바른 방법은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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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1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의 책입니다. 살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모찌모찌 2020-08-14 13:04   좋아요 0 | URL
거의 다 읽어가는데, 이분의 책을 읽으셨다면 아마 전체적인 문체와 흐름은 짐작하실 것 같아요^^
책 제목 때문에 단순한 심리학이나 처세술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긴한데.

처음 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왜 그러한 해석을 하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분석하고 있네요..
흥미롭긴한데, 주제에 대한 관심유무가 포인트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