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에스라」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사건이 일어난 지 200년도 더 지난 후에 기록된 문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에스라」는 과거를 지나치게 이상화해 서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에스라는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제2 이사야와 에스겔의 예언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바빌론에서 풀려나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성전 재건에 착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예언자의 메시지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형편이 몹시 곤궁했고, 궁핍한 생활을 핑계 삼아 성전 건축에 대한 무관심을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학개는 바로 이 같은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성전 건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백성이 생활고를 겪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이라 보았고, 신앙적 무관심이 계속될 경우 그들의 불행 또한 계속되리라고 보았습니다.

학개의 말은 맨 먼저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학개의 예언을 청종해 즉시 성전 재건에 착수합니다.(1:12)

예언자의 메시지는 나무와 돌로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에는 바빌론 포수 이전의 예언 정신을 특징짓는 죄와 부패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어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학개는 마치 건축물이 종교의 본질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풍깁니다

아모스, 예레미야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한계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견주어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빌론 포수에서 풀려난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에 불과했습니다. 백성들이 만든 것은 하나의 당당한 국가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였습니다

학개가 활동하던 시기에,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작은 공동체의 미래는 성전 건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국가로서의 정치적 소망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제 성전을 중심으로 민족을 넘어 인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정치적 이상이 아닌 영적 소망을 품도록 인도되어야만 했습니다.

학개의 예언으로 자극받고 고무받은 것은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학개의 말에 그들의 양심이 살아 움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제 지극히 순수하고 내면적인 곳에서 새로이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학개의 이 예언은 훗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됩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인자人子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으니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예언은 이미 과거에 성취된 셈입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는 크리스천의 영적인 성전 에클레시아에 임재함으로써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예언과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지금 성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셋째, 「요한계시록」에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21:22)라고 쓰인 바와 같이, 학개의 예언은 장차 마지막 날 ‘하나님’과 ‘어린양’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학개의 예언은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상승 곡선을 그리며 영광과 완성을 향해 솟구쳐 날아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의 메시아 예언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그것이 내포한 정치적 성격과 민족적 한계가 철저히 극복, 지양된 가운데 신약시대에 접어들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더욱 철저히, 예언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오바댜」는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 전체 21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바댜란 이름은 ‘야훼의 종’ 또는 ‘야훼를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히브리인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부모의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소망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각 민족에 대한 야훼의 도덕적 심판입니다. 심판의 주요 대상은 에돔이고, 징벌의 이유는 형제국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잔인한 처사 때문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의 날에는 에돔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remnant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었습니다.

에돔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과 증오는 이렇듯 강렬했습니다. 그 적개심이 어찌나 깊었던지, 에돔이 멸망해 없어진 다음에도 ‘에돔’은 이스라엘의 극악한 원수를 가리키는 일반적 호칭이 되었습니다.

오바댜의 예언에서는 놀라운 비전이나 위대한 사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오랜 세월 박해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억제할 길 없는 사무친 한을 대신 표현해 주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의 날과 승리의 날이 머지않아 다가오리라는,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수가 멸망하고 유대인이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심어 준 것입니다.

오바댜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과 이방 민족들을 정죄한 반면, 이스라엘만이 높이 받들어지기를 대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바댜는 흔히 편협한 국수주의적 예언자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바댜의 예언에서는 제2 이사야에게서 볼 수 있는,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 영속적인 요소는 야훼의 나라가 끝내 임하고 말리라는 예언자의 확신과 신앙에 있습니다.

오바댜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국가적 명분보다는 야훼의 의를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언 사상의 본질은 역사 속에 야훼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훼는 세계를 창조한 후 손을 떼고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보며 역사 속에서 인류가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가차 없이 심판과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인, 앗시리아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는데, 이 혼종을 수도 사마리아의 지명을 따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왕국 유다는 앗시리아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기원전 597년에 정복되고, 그 뒤 약 60년 동안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많은 유대인이 유배지 바빌론을 떠나 애타게 갈망하던 조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에게는 일손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이에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돕겠다고 나섰으나 유대인이 이를 거절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러운 피가 섞인 혼종일뿐더러 잡신을 섬기는 족속(「열왕기하」 17:25?34)이라고 죄악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종교적·정치적으로 격리되어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이 세력 경쟁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서 고립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들이 나태와 탐욕의 수렁에 빠져든 것은 그와 같은 여건 속에서였습니다. 바빌론 포수에서 풀려난 후 그들은 우쭐거리며 자긍심에 차 있었습니다. 포수 기간 동안 고초를 당하면서 야훼의 진노를 경험했고, 그로 말미암아 내적인 정화를 경험했으니, 훈련과 규율에서 자부심이 싹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지도자들은 오직 그들 집단만이 참다운 ‘남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 재건 이후에 밀어닥친 좌절과 난관 앞에서 그와 같은 심리 상태는 대단히 부적합했습니다. 성전의 완성과 함께 떠오르던 무지갯빛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고, 야훼의 백성은 여느 이방 민족과 마찬가지로 흉작 등의 자연재해와 이웃 민족의 계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실망은 환멸로 이어졌고, 환멸은 종교적·도덕적 해이를 초래했습니다. 이와 같은 심리 상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사랑과 거룩함을 경멸했습니다. 성전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했고, 감히 야훼에게 더러운 떡과 흠 있는 동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페르시아인 총독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의 말처럼 "그 백성에 그 제사장"이었습니다.(「호세아」 4:9) 이 시대의 제사장도 백성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의 위엄뿐 아니라 최소한의 품위마저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율법을 경멸했고, 백성 가르치기를 중단했으며, 매사를 편파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백성에게도 경멸당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계층에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형제를 배신했으며(2:10) 간음, 위증, 사기, 빈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형편없는 도덕적 타락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로 그들의 결혼 풍습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가장 훌륭하다는 가문조차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그 고장의 토착민들과 거리낌 없이 혼사를 맺곤 했습니다.

참다운 남은 자요, 진정한 이스라엘 가문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이처럼 반이방적인 유대인 및 사마리아인 들과 거리낌 없이 혼사를 맺었습니다. 불안정한 식민지 상황 속에서 그들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부와 권력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태 역시 성전 재건 이후 반세기 동안 크게 쇠락했습니다. 이 상태로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460년경 야훼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예언자 말라기의 입을 통해 발하게 됩니다.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두고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문서 중 다른 어디에도 말라기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말라기」의 편집자가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제목이 누락됐음을 발견하고 3장 1절의 "나의 특사"(말라기)라는 말을 책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로 인해 마치 ‘말라기’라는 인물이 실재했던 것처럼 간주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 본인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예언자는 가난하고 박해받던 집단에 속했고, 당시의 지배계급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를 더 원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언자의 이름은 이 세상에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야훼 앞의 비망록"(3:16)에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를 달리 호칭할 방도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이 책의 제목인 ‘말라기’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말라기의 예언 대상은 두 부류였습니다. 첫째,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죄악에 빠져든 백성, 둘째, 불평불만 속에서 야훼를 섬기던 부류였습니다. 이 두 번째 부류인 불평불만자들은 첫 번째 부류가 향유하는 성공적인 생활을 보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는 느슨하게 나사가 풀렸고, 백성 간에는 냉소적인 태도가 만연했습니다. 이제 말라기의 예언 활동은 과거의 예언자들보다 한층 계획적이고 치밀한 논증으로 바뀔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먼저 진리가 선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첫 번째 단계에서 선포된 진리를 들은 백성의 입장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박이 열거됩니다. 여기서 종종 사용되는 말은 "그러나 너희는"입니다.

끝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앞서 선포된 진리가 철저히 다져집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예언자적 방식이 취해지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예언 방식은 대단히 특이한데, 이를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마치 교사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스바냐에 의해 예언이 묵시적 성격을 취했고, 하박국에 의해 예언이 지혜서의 성격을 취했다면, 이제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은 교육적·논증적 형태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성전에 대한 경시’는 포수 이전의 예언자들이 공격해 마지않았던 ‘광적인 의식 종교’와 근본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성전에 대한 태만뿐 아니라, 지적 의무의 소홀함에 대해서도 질책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만군의 주 나의 특사’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의 말은 사제직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배격하는 데 유용합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제직의 본분이 기적적인 은사의 전달에 있다고 보는 견해와 둘째, 사제직을 신비롭게만 여기는 견해입니다.

말라기의 말처럼 모든 사제는 ‘지식의 사제’, ‘진리의 사제’입니다. 지식의 포기야말로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교적인 이웃의 유력한 가문과 혼인하려고 본처와 이혼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라기는 대단히 심원한 예언을 설파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언 가운데 매우 탁월한 부분으로서 그의 시대에 붙여진 율법주의라는 혐의를 벗기는 데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루터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필경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율법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자는 율법을 통해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파급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말라기의 가르침이 얼마나 과장되고 남용되기 쉬었는지는 그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리고 그 후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어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신랄하게 질책한 것도 바로 그 시대에 행해진 종교적 왜곡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과 신약시대의 처음은 이러한 문맥 속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전혀 진지함이 없었습니다. 성전 자체를 경시했으며, 제물을 바치는 데도 지극히 인색하고 기만적이었습니다. 요컨대 이때는 야훼를 빈정거리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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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는 파동이 아닌 글자로 존재하기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감정이 전달되기도 하고 곡해되기도 한다. - P6

사랑하는 게 좋아하는 것의 상위감정이라고 믿어왔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 두 감정이 각기 다르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더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이 더 반갑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만나면 반가운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헤어져 있는 어느 때 못 견디게 보고 싶다면, 사랑일 확률이높다. - P17

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 - P17

‘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 - P17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 P21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 P21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나의 경험치와 취향, 태생적 기질 등이 빚어낸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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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은 ‘비옥한 초승달’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고 보잘것없는 지역이었지만 대단히 중대한 지정학적 의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이어 주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국경지대에서 성장한 미가는 자연히 국제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침략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갖게 됩니다. 그것은 해안 지방이나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심리입니다.

미가는 예루살렘 주민보다 시골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을 보였고, 유다에 임박한 파멸의 근본 원인인 백성의 죄악을 정죄할 때도 고향 마을 시골 사람들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주로 도시와 궁정의 타락, 음모를 풍자·비판한 데 비해 미가는 농민을 학대한 지주들의 탐욕과 불의를 꾸짖었던 것입니다.

미가는 무엇보다도 고향 마을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학대와 어려운 처지에 진정 어린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 문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가장 중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지배계급의 사치와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 모순에서 비롯된 각종 사태가 주로 농촌에 집중된 이유는 사회적 비리와 불의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욱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자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농촌에 비해 사회의 계층과 구성이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미가는 부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금력과 권력을 쥔 부자들은 못된 일을 계획하고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해치우는 악당들입니다. 탐나는 집과 밭이 있으면 모조리 빼앗고, 집주인은 종으로 밭 임자는 머슴으로 부려먹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원수 다루듯 하고, 평화롭게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며, 부녀자들을 정든 집에서 쫓아냅니다.(2:1?9)

금력과 권력을 가진 부자들이 농민을 수탈한 주역이라면, 유다의 재판관들은 부자들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봉사했습니다.

미가는 기원전 8세기 유다의 경제 번영 이면에 가려진 부자들의 횡포와 민중의 비참한 삶을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는 ‘경제 발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던 정치 지배자들의 추악한 뒷모습을 낱낱이 들추어 정죄했던 것입니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탐욕스러운 무당, 판수로 전락해 버린 거짓 예언자들에게 앞일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황금에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미가의 예언을 볼 때 이것이 단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도덕적 사실’입니다.

미가는 야훼를 거스르는 유다 지배계급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 말한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미가는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 출신 예언자’인 동시에 포악한 부자들과 맞서 싸운 ‘농민의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그린 메시아는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에서 출생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미천한 출생의 노동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의 조상은 목자였고,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은 목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여러 비유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풍모는 시골의 들판과 가축, 외양간에 잘 어울립니다. 하인과 장터의 아낙네, 광야의 목자와도 잘 어울립니다. 유다의 가난한 농민들은 메시아가 자신들과 같은 신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미가의 약속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얻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는 로마 제국에서 주로 노동자들과 노예 하층민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입니다.

헌신적으로 의무를 이행하고, 타인을 선의와 성실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이전에 ‘신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핵심입니다.

전반적으로 스바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유한계급을 질타했으나 결코 빈민의 입장에는 서지 않았고, 아모스나 미가처럼 빈민의 고통에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같은 경향은 스바냐가 왕실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고 설명하면 쉽사리 납득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유다는 아직 명목상 앗시리아의 속국이었지만, 요시아는 앗시리아의 세력 약화를 틈타 다윗 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음이 분명합니다

스바냐의 예언 사상은 ‘야훼 날의 임박’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주제는 4단계로 나누어 제시됩니다.

매우 젊은 나이에 활동하다가 요절한 것으로 보이는 스바냐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격렬하고 가차 없는 분노를 보였습니다. 『구약성서』의 다른 어떤 책도 「스바냐」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파멸당하는 것입니까? 스바냐에 따르면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본이 흐트러졌다면 개혁은 해 보았자 헛일이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스바냐는 그의 개혁 운동을 비관적으로만 보았을까요? 우리는 비단 스바냐뿐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연하의 예레미야 역시 요시아에게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요시아의 개혁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그 개혁 정책의 진정한 목적은 고작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합시켜 위대한 왕국을 건설하고자 한, 정치적 개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히브리 종교의 신은 밀실에 숨어 있는 소시민적 부류들을 등불로 찾아내어 그들을 기어이 광장으로 끌어내고자 합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모든 사람에게 공적인 영역, 즉 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나훔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낙관적인 애국자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백성이 받은 모진 박해와 굴욕이 그의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품고 있던 감정을 대변해 준 인물이었습니다.

나훔 시대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아 오면서 야훼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엷어져 가는 종교적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백성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었던 앗시리아가 속히 멸망하리라는 예감이 들자 나훔의 감정은 반전되었습니다.

나훔은 군국주의를 반대했습니다. 「나훔」은 무력에 의한 전제적 폭압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위치를 점합니다.

나훔은 야훼가 전능한 도덕적 심판자임을 드러냅니다. 강대한 앗시리아를 멸망시키는 분은 다름 아닌 약소국 유다의 신 야훼였습니다. 나훔은 회개의 필요성은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죄악에 대한 도덕적 심판만을 말했습니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인간적인 복수심, 증오심만을 만족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도덕적 정의와 심판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훔의 예언은 적의 멸망에 대한 환희인 동시에, 야훼의 정의에 대한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는 야훼 편에 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언을 선포했으나, 하박국은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서서 야훼에게 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야훼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할 경우 주어질 야훼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들과 달리 야훼를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대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정의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견디며 인내했던 데 반해 하박국은 정의가 이스라엘에서 시행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엄청난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채워 놓은 이가 바로 야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야훼에게 불평, 불만이 뒤섞인 질문을 퍼부으며, 부당해 보이는 야훼의 처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에게 의문을 제기하긴 했으되, 야훼를 거역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다만 현실 생활에서 솟구치는 의문, 즉 야훼는 정의로운데 어째서 세상의 불의를 방관만 하는지에 관해 솔직히 궁금증을 피력할 따름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사용한 ‘믿음’이란 말은 바울이나 루터가 사용한 ‘믿음’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믿음’의 원어인 히브리어 ‘에무나’Emunah는 『구약성서』에서 흔히 육체적인 견실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는 공적 임무의 성실한 수행을 뜻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진실성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진실한 증언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박국이 사용한 ‘에무나’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것보다 그 범위가 자못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faith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마도 ‘신실함’faithfulness이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싶습니다.

‘의인은 신실함으로 산다’는 무슨 뜻일까요? 설사 신앙을 혼란케 하는 불의와 무질서를 경험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 야훼에게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레스 같은 위대한 정복자가 정치적으로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유대 민족의 문제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베풀었다는 것은 일견 기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칙령은 그가 시행했던 전반적인 관용 정책의 한 사례에 불과했을 뿐, 결코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관용’은 이를테면 고레스의 등록상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명에 따라 바빌론은 물론 바빌로니아의 다른 모든 도시가 페르시아군에게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고향’이나 ‘조국’ 같은 향수 어린 감정 외에 포로들을 끌어들일 만한 요인이 없었습니다. 도시는 황폐해졌습니다. 성전은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상당한 부를 축적한 유대인은 동포의 귀환을 물질적으로 기꺼이 도와주려 했지만(「에스라」 1:6), 자신이 직접 모험에 참여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처럼 그들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597년 또는 기원전 586년에 맨 먼저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기나긴 포로 생활을 겪는 동안 대부분 기원전 538년 해방되기 이전에 죽었습니다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에 살았던 유대인 중에서 고향을 간절히 그리워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려면 오랜 시간 동안 대단히 힘겨운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대규모의 집단적인 귀환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헌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기회가 닿는 대로 이따금 작은 집단을 이루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스가랴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다리우스 왕 2년, 즉 기원전 520년이었습니다.(1:1) 학개의 예언이 기원전 520년 6월부터 9월까지 3, 4개월 동안 진행된 데 비해 스가랴는 학개보다 두 달가량 늦은 기원전 520년 8월에 등장해 기원전 518년 9월까지 2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로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불안정한 정국이었습니다. 간절한 그들의 눈에는 제국 전역에 발생한 거대한 반란의 소용돌이가 세계와 우주의 대파국으로 비쳐졌고, 그 파국은 메시아가 출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조로 간주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스가랴가 예언 활동을 할 동안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해 가고 있었습니다. 캄비세스 사망 후 발생한 혼란은 종말론에서 말하는 ‘재난의 시작’(「마가복음」 13:8)이 아닌, ‘일시적인 위기’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스가랴는 먼저 백성에게 야훼의 예언자인 자신에게 귀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옛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도 이를 거역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에게는 과거에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은 전력이 있음을 깊이 유념하고, 스가랴의 예언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이 역사적 상황의 궁극적인 변화와 메시아의 강림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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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아모스는 네 가지 이유로 『구약성서』 예언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첫째, 아모스 이전에도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등 예언자로 불릴 만한 인물이 여럿 있었지만, 정작 예언 내용을 성경의 독립된 한 책으로 만든 것은 아모스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문서 예언의 효시’라고 불립니다.

둘째,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예언 활동을 전개한 몇 안 되는 예언자에 속합니다. 『구약성서』에서 북왕국을 상대로 활동한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둘뿐이었습니다(호세아는 북왕국 출신, 아모스는 남왕국 출신이지요).

셋째, 7장 10?17절에는 베델 제사장 아마샤와 극적인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모스는 실로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인물이었습니다.

끝으로, 아모스에게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점은 그의 신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신의 윤리적 성격을 처음으로 뚜렷하게 부각시킨 예언자였습니다

아모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란 독립된 인격으로서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설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힘을, 진정한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임을 공언하면서 직업 종교가나 종교 조직 따위에 자신의 삶을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 땅에서 발을 뗀 채 남의 등에 업혀 살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선포한 만인사제주의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모스의 설득력 있는 설명 방식은 기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야훼 신의 성격에 대한 철저한 인식,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비범한 통찰 그리고 주변 정세와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아모스의 예언은 ‘내용이 형식을’, ‘사상이 문체를’ 결정했다고 봐야 합니다.

아모스는 예언자로서 부름 받기 전에 이미 당대의 정치 문제와 사회 현실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정신적인 일, 사상적인 일을 하려면 먼저 충분한 노력을 투입해 인문학적 식견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인간을 모르고서 어찌 신을 알겠습니까. 신의 계시란 인간의 노력과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1861?1930)는 『전도의 정신』에서 전도자는 다방면의 세상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나타내 보일 직책에 있으므로 이 넓은 우주에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경제학과 사회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이며 사회를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 갈 책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둘째,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이를 배우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째, 인문학, 특히 역사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역사학은 인류 발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환히 나타내 보이는 학문입니다. 역사학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합니다. 역사학은 국민은 인류보다 작으며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민의 발전보다 긴요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전도자는 역사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인류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끝으로,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고 싶다면 성서의 원어를 비롯해 성서 자체를 충분히 연구해야 합니다. 성서를 연구하지 않고 전도에 나서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아모스는 결코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 인류, 각 민족을 동등하게 보고 동일한 윤리적 척도로 판단하는 보편주의자였습니다. 야훼를 전 인류의 신, 전 우주의 신으로 파악함으로써 아모스는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유일신 개념을 확립한 예언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정의는 야훼의 성격에서 핵심적인 요소였습니다. 야훼는 추종자들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야훼는 다른 민족에게는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이스라엘에는 낮은 기준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린다면 그들에게는 그만큼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이 적용됩니다

아모스가 제시한 정의는 법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직, 공정, 성실, 순수, 자비, 동정 등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며 초보적인 도덕률이었습니다. 특히 시민적 도리, 상도의, 이웃 사랑 등 사회정의를 강조했습니다. 아모스에게 압제와 부정은 단순한 도덕률 위반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신에 대한 범죄행위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로운 행위는 그 자체로 야훼에 대한 참다운 예배의 일부였던 것이지요.

아모스는 예레미야보다 150년이나 앞서 이스라엘 종교의 정신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모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신은 우리에게 희생 제물이나 곡식 제물, 십일조 따위가 아니라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여러 특징은 아모스와 비교함으로써 한층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예언자는 먼저 출신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아모스가 남왕국 유다 출신인 데 반해, 호세아는 북왕국이 배출한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호세아가 북왕국 출신임을 말해 주는 분명한 증거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예언자가 사마리아 왕을 "우리 왕"이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7:5) 둘째, 「호세아」에는 전편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동정이 흘러넘치는데, 이것은 동족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이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의 문장은 강직·단순하고 절제된 퓨어 스타일로 유명하지만, 호세아는 이 점에서도 그와 대조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호세아의 문장에는 분노와 슬픔, 부드러움과 심각함이 교차합니다. 야훼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실망, 좌절이 아무런 논리적 구조 없이, 그때그때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걷잡을 수 없이 휘감겨 들어갑니다. 논리가 있다면 그것은 ‘감성의 논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세아의 문체 또한 그 사람됨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야훼는 일찍이 아직 어린 이스라엘에 사랑을 베풀어,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끌어올린 바 있습니다.(11:1) 마르지 않는 야훼의 사랑이 멸망이 임박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할 것인지에 대해 호세아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즉 야훼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논리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심정의 사람이었고, 설교자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아모스」처럼 잘 짜인 논증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자유로운 필치로 서술한 것이었습니다.

야훼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이지理智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의 야훼’를 전 존재로서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는 야훼의 사랑을 어린 자식을 애지중지 보살피는 부모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고, 사랑 관계에서 기대되는 충성, 헌신, 친절, 경건, 은혜, 신실 등을 뜻합니다. 호세아는 ‘야훼를 아는 것’을 말할 때 머리로 하는 단순한 지적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전 존재가 던져지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훼를 아는 것’은 신을 한낱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야훼에게 충실한 사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이 관계를 통해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친절과 성실로써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호세아가 본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도덕적 의무로 결합된 사랑 관계입니다. 그것은 법률적 정의의 규범을 초월합니다. 야훼의 긍휼과 이스라엘의 성실한 충성 및 이웃에 대한 친절에 의해 성립되는, 경건에 기초한 결합입니다. 야훼와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 공동체의 결합 매체 또는 사회적 통합의 원리가 곧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야훼에게서 이스라엘로 향할 때는 은혜, 긍휼이고 이스라엘에서 야훼께로 향할 때는 경건, 충성이며 이스라엘 백성 서로에게 향할 때는 친절, 사랑, 배려입니다. 히브리 정신에서 이 세 가지는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야훼를 사랑하는 것’과 ‘야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4:1, 6:6)

이스라엘에 대한 아버지 야훼의 하염없는 사랑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라 보고, 신앙상의 모든 문제를 여기에 집중시킵니다. 요컨대 그는 안에서 밖으로의 접근 방식을 통해 모든 신앙 문제를 생각합니다.

아모스는 도덕의 토대 위에서 종교를 세우고자 한 반면, 호세아는 종교에서 도덕을 끌어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모스는 도덕적 논리의 관점에서 신앙 문제를 생각한 반면, 호세아는 야훼의 깊은 은혜에 대한 내밀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도덕적 진실을 도출한 것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두 신앙생활의 건전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을 그 ‘행위’라고 보았습니다.(「아모스」 8:7, 「호세아」 4:9) 이스라엘은 행한 바에 따라 야훼 앞에서 심판을 받게 마련이며, 이스라엘이 저지른 부패, 압제, 범죄 등은 이스라엘이 야훼를 떠났음을 보여 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였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보편적 도덕률을 파기한 행위 자체에 심판을 가했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야훼에게 진실하지 못한 결과 보편적 도덕률을 위배한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의 문제 이전에 ‘그들과 야훼의 관계’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음을 통찰한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오직 신의 대지에 성실히 뻗어 내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히브리 종교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행위는 믿음의 결과요 종속변수일 뿐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에 힘쓰는 일’(무본務本)이야말로 헤브라이즘의 본령입니다.

호세아는 특히 야훼가 이스라엘에 베푼 ‘첫사랑’에 주목합니다. 야훼는 마치 광야를 여행하며 기갈에 허덕이던 길손이 뜻하지 아니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듯 민족 형성 초기의 이스라엘을 심히 반갑게 여기며 사랑을 쏟았습니다.(9:10)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한 죄로 야훼에 대한 청순한 첫사랑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아침 안개, 새벽이슬처럼 그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6:4)

호세아는 항상 야훼에 대한 에브라임의 태도와 향배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이스라엘 죄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죄의 뿌리를 한층 더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 한 어떠한 의식도 야훼 앞에서 무의미하다고 선언했습니다.

호세아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철저히 인격적인 관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듯 둘의 관계를 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할 경우, 예언자에게는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할 여지가 생깁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아들로 선택한 것입니다.(11:1)

이스라엘이 야훼와의 계약을 위반할 경우 야훼는 아들이라는 이스라엘의 특권을 취소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들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오직 그가 야훼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동안, 다시 말해 도덕성을 유지하는 동안으로 한정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야훼의 아들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가 부자 관계를 강조한 것은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 시절, 야훼가 친히 교육을 베풀던 시기를 언급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하염없는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신을 여실하게 표현하려면 부자 관계 이상의 긴밀한 관계, 즉 부부 관계의 비유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남편인 야훼와 아내인 이스라엘이 결혼했다는 비유, 다시 말해 남편으로서의 민족신 개념은 호세아가 처음 창안한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하는 개념도 아닙니다. 아버지로서의 민족신 개념과 마찬가지로 남편으로서의 민족신 개념 역시 그 뿌리는 이방 종교에 있었습니다. 이미 이방 종교에서도 신과 백성은 종종 남편과 아내로 이해되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방 종교의 결혼 비유는 지극히 조야한 육체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었을 뿐 전혀 정신적인 내용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 역시 이방 종교와 같은 수준으로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전의 어떤 예언자들도 얻을 수 없었던, 다시 말해 외부에서 오는 기계적인 계시로는 얻을 수 없었던 중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즉 야훼의 본질은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착잡한 감정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즉 죄와 부정을 보고 한때 증오가 타오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아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8)라는 예수의 말처럼 고결한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의 청순한 사랑으로 야훼의 심정, 야훼의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까지 근동 사회에서 장성한 아들은 그 집의 노예와 마찬가지로 천한 일을 맡아보았고, 아들과 노예는 가장 앞에 설 때 모두 조신하게 삼가는 자세를 취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정한 사랑을 표시하는 대상은 ‘어린 아들’뿐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아들에 비유한 것도 어린 시절에 국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려고 야훼를 버리고(4:10), 야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9:17), 미련한 아들처럼 행동했다는 점(13:13)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이에 야훼는 예언자를 보내 돌이킬 것을 타일렀고(12:10), 수만 가지 율법을 기록해 주었건만, 그들은 이를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습니다.(8:12)

행위의 열매 이전에, 야훼에 대한 충성스런 사랑이란 ‘뿌리’가 선행한다는 것을 간파한 호세아는 더욱 위대한 사랑의 예언자이며, 신앙의 본질을 통찰한 믿음의 예언자입니다.

야훼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서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야훼의 심정이 인간의 심정과 닮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호세아의 견지에서 볼 때, 신의 의義는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인격적인 의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33년에 아람, 유다, 이집트, 앗시리아 등과 정치·군사적으로 복잡한 국제 관계에 휘말립니다.(7:9)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에게 돌아오지 않고 이집트, 앗시리아 등을 기웃거리며 외세에 의존하려 합니다.(7:11)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호세아는 귀머거리가 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맙니다. 사막에 몰아치는 죽음의 열풍과도 같이 앗시리아가 나타나 마침내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1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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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신성의 영역, 신의 영역을 완벽한 타자이자 인간의 영역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 P30

하느님은 위쪽 하늘에 있고 우리는 아래쪽 여기 땅에 있으며, 둘 사이에는 무한한 틈이 있다고 여긴다. - P30

그러나 대다수 고대인은 신성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 P30

신성의 영역에는 다양한 층이 있었다. 어떤 신들은 다른 신들보다 "더 신성하다" 고 할 수 있으며, 인간도 때로는 신들의 계급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 - P30

게다가 신들은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올 수 있었으며 때로는 인간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정말 내려왔다. - P30

신들이 이런 일을 할 때는 흥미로운 결과가 생기거나, 불행을 겪고서야 알게 된 프리기아의 불친절한 거주자들처럼 불길한 결과가 빚어졌다. - P30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를 선재하던 신이 육화한 존재로 여기기는했지만, 신성한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 태어나는 방식은 그리스나 로마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아니었다. - P32

훨씬 일반적인 관점은, 탄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신성한 존재가 세상에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 P32

왜냐하면 신이 인간과 성관계를 가지면 그 자손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했기 때문이다. - P32

그리스 신화에서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위를 제일 많이 저지른 신은 바로 제우스였는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와 매력적인 여성과 색다른 성관계를 갖고 무척 유별난 임신을 하게 한다. - P32

그러나 제우스와 필멸하는 그의 연인들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거리용 신화가 아니다. 때로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323)처럼 실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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