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는 파동이 아닌 글자로 존재하기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감정이 전달되기도 하고 곡해되기도 한다. - P6

사랑하는 게 좋아하는 것의 상위감정이라고 믿어왔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 두 감정이 각기 다르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 P17

더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이 더 반갑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 P17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만나면 반가운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헤어져 있는 어느 때 못 견디게 보고 싶다면, 사랑일 확률이높다. - P17

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 P17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 P17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 - P17

‘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 P17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 - P17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 P21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 P21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 P21

나의 경험치와 취향, 태생적 기질 등이 빚어낸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 P21

공감은 오히려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 P48

‘미안하다‘라는 말은 말꼬리가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 P67

시간이 지나고 악플의 내용은 잊힐지언정, 아팠던 기억은 남는다. - P70

내가 친 바닥의 차가운 느낌은 선명히 떠오른다. - P70

그래서 악플은 ‘표현의 자유‘라는 알량한 말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 P70

사람이 가장 약해진 순간,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태에 숨통을 조여오기에.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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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육체도 그것이 자연법칙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법칙에 정확히 복종하기에 기적이다. 우리의 소화기관은 음식물로부터 영양을 추출한다.

우리의 피부는 땀을 발산하여 체온을 조절한다. 눈동자는 빛의 양에 반응하여 확장, 축소된다.

그러한 작용들은 대부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확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신화적인 홍해바다의 갈라짐보다 바로 이런 것이 진짜 기적이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위협적이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나 유용한 사람을 가려내 예외로 삼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로 취급하지 않는다. 총알은 악성 종양이나 제 멋대로 달리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은 도덕적으로 장님이며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휘젓고 돌아다닐 뿐, 누가, 무엇이 그 앞에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도덕적으로 장님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를 경배할 수 없다. 하느님은 정의와 공평과 연민의 편에 서 있다.

나는 왜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죽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 법칙이 그 배후에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나는 하느님이 특정인에게 특정한 이유로 질병을 ‘보낸다’고는 믿지 않는다

병이 들거나 건강한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결과인지 여부는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일이 내게 일어났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가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공평한 일들에 책임이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면 그를 도덕적 가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질문을 다른 형식으로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왜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자연의 법칙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가는 질문 대신, 왜 사람이 애시당초 고난이란 것을 받아야만 하는가를 물어보자.

우리 중 그런 식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고통은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한 꼭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원인을 돌아보지 않고 다만 통증을 멈추게 하는 약을 복용하든가 하여 스스로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심지어는 영원한 장애로 살아가게 되는 운동선수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잊어버리면 사라지겠지 하는 마음에서 경고 신호인 가벼운 통증을 무시하고 있다가 결국 응급실로 급히 실려가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고통은 하느님이 우리를 징벌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불문하고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자연의 경고가 표출된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인생은 불유쾌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생은 매우 위험하고 살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 있다. 인간만이 자기의 고통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을 의미있게 만들고, 어떤 사람에게는 공허하고 파괴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나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은 우울하고 소외당한 느낌이 들거나 단기적 미래에 큰 희망을 걸 수 없을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고를 당해 척추에 부상을 입어 반신불수가 된 젊은이의 경우 당사자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따른 합리적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몸에 대해 더 배우게 될수록, 그리고 이 세상에 내재된 자연법칙을 더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는 몇 가지 해답을 갖게 된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도 예민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그것은 마땅히 예민해야만 한다.

정상보다 상당히 비만이어서 남보다 훨씬 많은 지방과 막힌 대동맥을 통해 심장이 피를 내보내야 하는 그런 사람은 몸의 부담이 증가하여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하느님을 원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뇨나 다른 선천성 질환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매력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욥은 하느님에 대해 질문했지만 신학적인 강의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과 연민과 자신이 좋은 사람이요 소중한 친구였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었다.

내 이웃이 내게 자신의 병에 관해 물었을 때 그가 원하는 것이 생물학이나 유전자학에 관한 강의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그러나 연약하고 취약한 몸에 죽지 않는 영혼을 담고 사는 우리의 세계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불공평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 아픔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다면 세계가 유지되기 불가능할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아지든지 아니면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녀를 안가지게 되든지 둘 중 한 가지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가 앞서 고통에 관해 살펴보았듯이 필멸성은 인간의 삶에도 유익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아무에게나 설명해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우리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잔인하고 지각없는 행동이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아플 때도 우리 몸 내부에서는 방어기제가 작용하여 질병과 싸우게된다.

어떤 사람이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방문한다면 그는 그 병에 전염될 위험도 감수해야만 한다.

왜 사람은 병에 걸려야 하는가? 왜 그들은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가? 왜 사람들은 죽는가?

우리가 육체를 혹사하거나 건강을 무시할 때 무엇인가 잘못될 위험부담은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러한 그의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은 건강상 무엇인가 잘못될 가능성이 평균보다 높은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게 되는 것이다.

인류는 신선한 새 출발이라는 개념이나 아기의 탄생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 자신들도 아마 결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나 부인이나 자녀를 잃은 사람에게 죽음이란 좋은 것이라 말해주는 것과도 물론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그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죽음에 대한 취약성은 인간존재의 타고난 조건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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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성서를 읽다 - 역사학자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법 유유 서양고전강의 4
박상익 지음 / 유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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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텍스트를 어떻게 분석하고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양한 층위가 발생한다.


텍스트는 컨텍스트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오래된 텍스트일수록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혹스럽다.

하지만 텍스트의 원래 의도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배경 이해는 필수적이다.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그 안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렇다면 신학자와 목회자가 아닌 다른 영역의 학자는 어떻게 성서를 파악하고 해석하는가?


이 책은 역사학자가 어떻게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모든 역사학자가 이렇게 성서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자와는 다른 결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시각으로 익숙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익숙함 안에서 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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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이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면 벌어진 일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

어떤 때는 영악하게도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추위’도 ‘열의 부재’상태, ‘어두움’도 ‘빛의 부재상태’에 붙이는 하나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어둠이나 추위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 ‘증명’할 필요가 있는데,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고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며 추위에 얼어죽기도 한다. 그들의 죽음이나 부상이 우리의 알량한 말장난으로 조금도 가벼워질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우리의 영혼이 정의를 너무나도 갈구하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공정하게 취급한다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실존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희망을 붙들어매게 된다. 이 세상 너머 어딘 가에는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리고 ‘이 세상을 일찍 하직한 사람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만나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그 어떤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혜란 우리의 생명이 사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형태로 ─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이 결국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음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하여 이 세상을 최대한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며 여기서 의미와 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비극에 대한 모든 반응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이야말로 그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왜 그가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가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어떤 대답은 하느님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다른 대답은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참다운 감정을 억압한다. 우리는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증오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지나친 처사를 한 하느님을 증오해야만 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고통은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이 하느님이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그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죄의식과 분노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는 우리의 비극을 극복하도록 도우려 하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것일 수 있지 않은가?

이 책은 하느님이나 신학에 대해 요약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연히 거창한 말이나 같은 질문을 교묘하게 반복하면서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니며 다만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은 하느님과 세상의 선함을 스스로 믿으면서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도록 돕는데 삶의 대부분을 바쳤으며, 개인적인 비극을 겪게 됨에 따라 자기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하느님의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 한 사람이 쓴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나는 언젠가 이 책을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되고 믿게 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글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나와 같이 곤경에 빠진 그 누군가를 돕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한 신앙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만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신앙을 지키거나 종교로부터 위안을 받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무조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는 이런 고통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모든 문제는 단 한가지 물음에서 출발한다. 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신학적 대화들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선한 사람이 당하는 불운은 비단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 당사자나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정의롭고 공정하며 가치가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문제로 대두된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선함, 온유함, 심지어 그 존재여부에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의 작가는, 어리석고 조급한 사람이 악한 사람의 번영과 착한 사람의 고통을 보면 악한 사람이 이익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의로운 자가 결국 사악한 자를 따라잡아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의 배경에 있다고 추측되는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이 따라잡을 시간을 늘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설명할까?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미학적 가치에 기여한다고 해서 인간의 고통을 묵과하고 한 개인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태도는, 각자가 지닌 생명의 지고한 가치에 대한 나의 종교적 신념에 비추어 볼 때에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가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린이에게 고통을 가했다면 우리는 그를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 결과가 멋지다 해도 왜 하느님이 초래한 부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가 양해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만약 잘못과 징벌이 서로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면 내가 경험한 비극과 고통은 나의 잘못된 품성을 ‘고쳐주려’ 일어난 것이라 믿는 편이 오히려 더 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욥은 하느님이 공정성이라는 개념보다 우위에 있기에 그토록 막강하고 일반적인 규칙들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하느님의 연민과 신뢰성, 공정성이지 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욥에게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존재하며 그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꼭 공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것이 저자가 하느님을 등장시켜가며 하려는 말의 전부라면 거기에 무슨 새로운 통찰이 있으며, 하느님이 욥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라면 욥은 왜 그토록 송구스러워 했을까?

우리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기대 대신에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고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어쨌든 성서는 하느님이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자로 묘사되지만 어떻게 그들이 애초부터 가난해지고 과부나 고아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저주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도 우리의 자존심과 선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화를 낼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삶의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나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 연민을 하느님의 가르침, 즉 불의에 분노하고 괴로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맞선다는 느낌 대신 우리는 불의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우리를 통해 일하는 하느님의 분노와 일치시킬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울부짖을 때에도 우리는 아직 하느님 편에 서 있고 그는 우리 편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살인이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모독적이며 그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범행 무기로부터 하느님의 지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태초에…."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땅은 아직 형태를 이루지 않았고 모든 것이 어둠을 덮고 있어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하늘로부터 땅을, 바다로부터 마른땅을 구분해 낸다. 이것이 바로 창조작업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잡아내는 것이다.

혼돈은 그릇된 것도, 악의적인 것도 아닌 단지 고약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규칙하게 비극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함을 믿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녀가 무언가를 잘못한다고 벌을 주면서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해주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책임감 있는 부모의 모습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교훈의 일종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켜야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때 하느님은 그 혼돈으로부터 사물을 정리하고 예전에는 불규칙성만이 존재하던 곳에 질서를 불어넣어 자신의 마술적인 창조작업을 시작한다.

의로운 사람들 중 일부는 그것을 성취하기도 전에 죽고 만다. 혹 다른 사람들은 처음 고통의 기간이 나중 혜택의 기간보다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아, 세상이란 시편 저자가 우리에게 믿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긴 안목으로 상황을 살펴본다면 악인은 잡초처럼 말라죽고 의로운 사람은 마치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번성하리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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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에게도 종교의 핵심은 정신과 마음이었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2:13 전반)는 말씀에서 그의 예언 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금식과 굵은 베옷의 효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회개와 참회는 결국 마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요엘의 신앙은 야훼에 대한 신앙이 외적·물질적 축복과는 무관하다고 한 욥의 신앙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외적 축복과 내적 축복이 모두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요엘의 예언은 그다지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요엘은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2:2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야훼의 영Spirit이 부어진 결과는 도덕적 신생, 내면생활의 쇄신, 야훼에 대한 깊은 지식의 획득 등 도덕적·내면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야훼의 신은 다만 ‘영적 도취 상태’만을 초래할 뿐이었고, 요엘은 이 도취 상태가 다가올 ‘야훼의 날’에 대한 예고이자, 전조라는 점을 중요시했을 뿐입니다.

모세와 예레미야에게 있어 야훼의 영은 모든 백성에게 야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부여해 그들이 선지자들처럼 도덕적·종교적 진리를 충분히 지니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요엘의 예언에서는 도덕적·내면적 변화가 전혀 부각되고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에게는 영적 깊이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엘은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탁월한 시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요엘」 1장은 『구약성서』 중 가장 훌륭한 문장에 속하며, 요엘의 뛰어난 표현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야훼는 영원한 주권자임에 틀림없으나 야훼의 절대적 주권은 아직 이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그것은 장차 다가올 ‘야훼의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저하게 실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엘 역시 자신이 목격한 메뚜기 재앙을 통해 ‘절망’을 경험하고 ‘야훼의 날’에 온 희망을 걸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요나의 행동에서는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대단히 모순됩니다. 즉 이방인인 뱃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사람이 야훼가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인 개개인에게 사랑을 베풀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 전체, 니느웨 백성 전체에게는 격렬한 증오심, 적개심만을 품었습니다. 오직 야훼의 진노와 심판만이 내려지기를 원했습니다. 실로 기묘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문제, 계층 문제, 통일 문제 그리고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된 인종 문제 등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고귀한 삶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는 태도, 내게 속한 원자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문제의 시작도 끝도 결국은 인간 문제, 개인 문제인 것입니다.

김교신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김교신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共有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 가며’ 성경을 연구했다.

‘땅의 것’이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방식을 사랑함이다. 물질과 지위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에 지식인의 나약함이 끼어들면 신념을 포기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워진다.

김교신 역시 최재서 못지않게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주 예수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땅의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사적 그리스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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