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병행성은 주어진 본문의 문학적, 수사학적 분석을 압도하는게 아니라 조명하는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 - P39

문헌을 이해하기 위해 매도급으로 병행화parallelizing에 의존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본문에 대한 훌륭한 역사적 조사를 마비화 paralyzing하는 것이다. - P39

기독교 기원에 대해 올바르게 기술하려면 다른 문학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모두에 동일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40

한편으로, 초대교회의 신앙은 진공 상태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었다. - P40

기독교의 선포와 예배와 논쟁에 담긴 예수에 관한 담론은 그 환경에서 널리 통용되던 유대와 헬라와 로마의 경구로 표현되었다. - P40

신약 저자들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들의 기술이 주변의 문학 형태 및 문학 사조와 연결점을 가지도록 했을 것이다. - P40

오직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섬김은 추상적인 철학적 추론이나 저 위 세상에 관한 어떤 일반화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 P47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였으며, 신성divinity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존재 중 독보적이며, 지금도 미래에도 만유를 다스릴 왕이라는선명하고 생생하고 예리한 믿음이다. - P47

유대교 사상은 중간적 존재들을 수용하였으며 메타트론 같은 대천사 등의 다양한 대행자들과 에녹 같은 승귀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칭호들이 있었다. - P56

그러나 중간적 존재를 숭배하는 것과 유일한 한 분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사이에는 날카로운 구분선이 있었다. (그래서 허타도인 것이다.) - P56

그리고 이런 구분의 근거는 중간적 존재는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컴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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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그 근본에 있어 전반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두 구절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하느님 및 우리 주변의 세상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진술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하느님이 한두 명 미숙한 인간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징벌을 내린다는 것은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당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기 전이었으므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조차 모르던 상태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이야기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관한 것이며 ‘금지된’ 나무의 이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는 사실이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들에게 ‘옳음’과 ‘그름’의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로운 것이냐 지저분한 것이냐, 복종적이냐 아니냐일 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피조물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형상’은 본능에 대해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있다. 우리는 단지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욕정이 치밀 때에도 성행위를 자제할 수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서 본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물들도 힘은 들겠지만 적어도 도덕적 딜레마는 느끼지 않을 생활의 주요 부분들이 인간들에게는 문제성이 있고 종종 고통스런 영역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언젠가는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인간 뿐이다.

동물들도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저항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아무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죽음의 골짜기의 그림자 아래 살아간다.

만일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나쁜 선택도 똑같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진하여 선한 쪽을 선택하여 자신의 고결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동시에 나쁜 선택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에게 선한 일을 할 자유만 있다면 그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선한 일만 하도록 묶여있다면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 곧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은 옳은 일과 그른 일 사이에서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일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좋은 일도 선택할 자유가 없는 셈이다

왜 하느님은 어떤 특정한 진화의 단계에서 도덕적으로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피조물이 나타나도록 하였는지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했고 그 이후로 이 세상에는 수많은 고결함과 수많은 잔인함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자유란, 곧 우리가 이기적이거나 부정직하기로 선택하면 우리는 실제로 이기적이거나 부정직하게 될 수 있으며 하느님은 그것을 막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나쁜 일인지 가르쳐주고 그런 일을 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경우 일어나는 결과를 경험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거나 심지어 주변의 다른 사람을 해칠 때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고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까? 그 한가지 이유는 우리의 인간성이 서로를 해칠 수도 있도록 자유롭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 자유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느님이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를 속일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상처를 줄 수 있으나 하느님은 그 수많은 세월이 지날 동안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어찌 그리 조금밖에 배우지 못했는지 동정과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의 대답은 그 일을 일으킨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종족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하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은 그 행동이 미리 ‘프로그램’되어있지 않은 독특한 피조물이다. 인간이 선함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함은 그가 악함을 선택할 자유도 있다는 의미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성인들이 아무리 그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든, 아무리 나쁜 버릇에 깊이 길들여 있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고집하련다. 만약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만약 우리가 상황과 경험에 얽매여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본능에 얽매인 동물들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창조하고 명령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와 더불어 고난받는 하느님이라는 사상도 이 세상에 소개했다.

떠돌이가 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포로생활을 하는, 자신의 한 자녀가 다른 자녀들에 대해 하는 행위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하느님

나는 그가 나로 하여금 동정과 분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근원이며, 우리가 희생자들 편에 서서 가해자에 대항할 때 하느님도 나와 같은 편이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을 하느님에게 빚지고 있으며 그를 경배하고 그가 명한 일을 할 의무가 있다.

삶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빠지게 되는 최악의 경우는 스스로를 학대함으로써 이미 당한 일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왜 하느님은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고 말할 때 그가 진정으로 요구했던 것은 ─ 신학이 아니고 동정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하느님을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요, 그들이 자기의 신학적 결함을 꼬집어 주길 바라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가 진실로 좋은 사람이요, 그가 당하는 일은 끔찍하게 비극적이고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그는 바랬던 것이다

겹쳐진 비극의 충격 속에서도 욥은 자존심을 지키고 스스로의 선함을 믿으려 했다. 그가 절대로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대한 비판이 그의 원망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그에게 일어나 마땅한 이 운명을 자초한 그의 행실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효과를 낳는다.

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연민의 감정이 필요했던 것이지, 하느님의 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체적 평안과 자기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꾸짖기보다는 감싸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내하고 타인에 대해 경건한 모범이 되라고 요구하는 친구보다는 자신이 분노하도록, 소리치고 울부짖도록 내버려두는 친구가 그에게는 더 필요했다

일이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뭔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더 행복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요소는 발생한 일, 특히 그 일이 나쁜 일일 경우, 우리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모든 재앙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순식간인 듯하다

우리 마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그 사람을 미워했기에 그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계속 믿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인가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단지 자신들이 피곤하다든지 혹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로 우울할 때면 우리의 기를 꺾곤 했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평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하고 우리 사회의 도덕적 성장과 개선에 기여하는 하나의 힘이 된다

우리의 자아는 매우 취약해서 너무도 쉽게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 느끼도록 만드는데, 우리를 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종교의 불필요한 부분이다. 종교의 목표는 사실 우리가 삶에 대해 고통스런 결정을 내릴 때에도 그것이 정직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 스스로 좋은 기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이 한 신체기관에 흠이 있다 하여도 정상적인 95퍼센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주도록 해야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죄의식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러나 어른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비록 도움이 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해도 어긋난 말 한마디가 사실은 모든 것이 내 잘못 때문이라는 식의 생각을 심화시킬 수가 있다.

이혼이나 사망이나 재난으로 상처받은 사람에게 "네가 만약 조금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렇게 나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근거도 없을 뿐더러 잔인하기조차 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조각들을 주워들고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모둔 불운은 우리의 잘못이고, 우리의 실수와 잘못된 행동의 직접적 결과라는 식의 신경증적 감정을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막강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가 저지른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우리는 만약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거기에는 거의 항상 분노가 따른다. 우리가 상처받을 때 화가 나는 것은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서로를 사랑하던 남녀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들은 상처받았기에 화가 나고, 그 분노를 가능한 가장 가까운 목표를 향해 쏟아 붓는 것이다.

질투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다. 질투는 너무나도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뿌리 깊게 닿아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고뇌와 고통은 세상에 골고루 퍼지는 것이 아니라 널리 퍼져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기란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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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 (국내에는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갈라파고스〉로 출간되었음)에서 어만은 예수의 신성divinity에 대한 믿음은 승귀exaltation와 성육신 사이를 밀물과 썰물처럼 오가는 지저분한 프로세스를 거쳐 서서히 부상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 P11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적 계시divine revelation라기보다는 교회 내에서조차 정당성을 얻기 위해 분투한 인간적인 프로세스의 산물이 되는 셈이다. - P11

이 책의 기고자들은 기독론이 발전과정을 거쳤다는 것과 후대의 신학 논쟁이 실로 지저분했다는 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발전과정에 대한 어만의 기술과 설명이 역사적으로 정확한가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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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바트 어만 지음, 강창헌 옮김, 오강남 해제 / 갈라파고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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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적 성서학자 바트 어만의 책이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는지를 논쟁적으로 그려낸다.

즉 초기 기독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조직신학자나 성서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신앙의 견해가 아닌 역사가의 관점으로 성서와 다른 자료를 활용한다.

그리하여 독창적이고도 신선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좋은씨앗, 2016)에서 구체적으로 반박된다.

두 책을 함께 보면 다양한 견해와 층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지점에서 자신이 서 있을지 알아보는 기회도 될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신성의 영역, 신의 영역을 완벽한 타자이자 인간의 영역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위쪽 하늘에 있고 우리는 아래쪽 여기 땅에 있으며, 둘 사이에는 무한한 틈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대다수 고대인은 신성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신성의 영역에는 다양한 층이 있었다. 어떤 신들은 다른 신들보다 "더 신성하다" 고 할 수 있으며, 인간도 때로는 신들의 계급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 게다가 신들은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올 수 있었으며 때로는 인간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정말 내려왔다. 신들이 이런 일을 할 때는 흥미로운 결과가 생기거나, 불행을 겪고서야 알게 된 프리기아의 불친절한 거주자들처럼 불길한 결과가 빚어졌다.
"

- P30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를 선재하던 신이 육화한 존재로 여기기는했지만, 신성한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 태어나는 방식은 그리스나 로마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아니었다. 훨씬 일반적인 관점은, 탄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신성한 존재가 세상에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과 성관계를 가지면 그 자손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위를 제일 많이 저지른 신은 바로 제우스였는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와 매력적인 여성과 색다른 성관계를 갖고 무척 유별난 임신을 하게 한다. 그러나 제우스와 필멸하는 그의 연인들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거리용 신화가 아니다. 때로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323)처럼 실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 P32

"고대적 사고방식에서 인성과 신성은 하나의 수직적 연속체이며, 이 두 연속체는 때로는 높은 차원에서(고급스럽게) 때로는 낮은 차원에서(저급하게) 통합된다."
- P51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해 지난 200년간 현대 학문이 중요하게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예수 생전에는 추종자들이 그를 하느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교사나 랍비, 심지어 예언자로 보았다." - P57

"유대교 안에도 신성한 존재와 신성한 권력에 속하는 연속체가 존재한다고 이해했으며, 이들은 여러 면에서 이교의 신성한 존재들과 비섯하다. 이것은 엄격한 유일신론적 저자들에게도 진실이었다." - P69

"성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때로는 하느님으로 그려지고, 때로는 인간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난다. 신성한 모임을 구성하는 천사들은 신들이라 불리지만 필멸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다른 천사들은 지상에서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더 중요하게도 일부 유대교 문헌은 죽어서 천사가 된 인간이나 천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인간에 대해 말한다." - P77

"필론에게 로고스는 하느님 밖에 존재하는 무형의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사유 능력이다. 때로 로고스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알 수 있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처럼" 나타나는 하느님의 실제적 모습이다. 어떤 의미에서 로고스는 하느님과 다른 신성한 존재이지만, 또 다른 하느님이기도 하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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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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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겸 방송인 김이나의 글 모음집이다.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왠지 매우 순수하고 맑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녀의 작품도.


이 책도 동일하다. 따뜻한 언어가 넘쳐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답답한 하루. 온갖 스트레스로 머리가 아픈 요즘.

참 따뜻한 책을 만났다.

"인간의 언어는 파동이 아닌 글자로 존재하기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감정이 전달되기도 하고 곡해되기도 한다.
"
- P6

"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
"
- P17

"사랑하는 게 좋아하는 것의 상위감정이라고 믿어왔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 두 감정이 각기 다르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더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이 더 반갑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만나면 반가운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헤어져 있는 어느 때 못 견디게 보고 싶다면, 사랑일 확률이높다.
"
- P17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나의 경험치와 취향, 태생적 기질 등이 빚어낸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
- P21

"공감은 오히려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 P48

"‘미안하다‘라는 말은 말꼬리가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 P67

"시간이 지나고 악플의 내용은 잊힐지언정, 아팠던 기억은 남는다. 내가 친 바닥의 차가운 느낌은 선명히 떠오른다. 그래서 악플은 ‘표현의 자유‘라는 알량한 말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약해진 순간,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태에 숨통을 조여오기에."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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