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따라서 샌더스는 "법정적" 범주대신에 "참여적" 범주를 전면에 내세운다. - P21

다시 말해서, 그는 이신칭의 메시지보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거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게참여한다는 개념을 더 앞세운다. - P21

구원은 그리스도와 합체되는(incorporated) 사건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일이다. - P21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지속되고, 완성에 이른다. - P21

그러나 (던과 같이) 라이트도 궁극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유대인의 경계 표지"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덧붙여야할 것 같다. - P46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포로 생활 중에있다고 주장한다. - P46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영광스러운 미래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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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기독론 divine Christology은 부활 하나만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다. - P114

부활 신앙은 예수를 부활 이전의 존재와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지 않았다. - P114

예수는 그의 권능, 사명, 기원에 관해 과도한 주장을 했으며 부활은 이런 주장이 합당하다는 신적 확증livine afirmation 이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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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일이 일어날까
Harold S. Kushner 지음, 김하범 옮김 / 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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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역경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이유에 대해 질문하곤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지. 

특별하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러한 생각들은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가치관을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꼭 인과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자신에게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산학에서 다뤄왔던 신정론의 허점을 세심하게 짚어준다.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린다.

더불어 고난의 문제가 왜 발생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자녀를 잃은 저자의 실제적 고통 가운데 담담하지만 뜨겁게,

따뜻하지만 냉철하게 써 내려간 이 책을 통해,

아픔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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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건강과 수술의 성공을 비는 그런 기도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측면이 있다. 만약 기도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효과를 발휘한다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회복이나 생존을 위한 기도만큼 간절하게 드려지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첫째, 다른 사람 ─ 특히 우리와 같은 관심, 가치, 꿈, 그리고 고통을 가진 사람들 ─ 과 교감을 갖게 해주는 일이다

종교 제의는 사람들에게 자녀의 출산이나 사별, 결혼이나 부모의 사망 등의 경험을 어떻게 이웃과 나눌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기쁨을 나눌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두려움이나 슬픔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끔찍하게 외로울 때, 운명의 손가락이 우리를 가리킬 때, 어두운 구석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원망하고 싶을 우리는 자신이 공동체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기도는, 만약 그것이 올바르게 드려지기만 한다면, 사람들을 고립으로부터 구해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혼자 남았다거나 버려졌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확신시켜준다.

만약 우리가 기도는 어떤 능력이 있으며 어떤 것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비현실적 기대를 던져버릴 수 있다면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기도하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질 것이다.

야곱의 이번 기도는 더 이상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는 것도, 혹은 음식, 의복, 재물, 무사귀환 같은 긴 목록을 하느님 앞에 내미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과 도움을 살 수 있는 화폐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기도였다

야곱의 성숙한 기도는 단지 "하느님, 나는 당신께 아무런 요구도, 제안도 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께 기대할 나의 권리 이상의 것들을 당신은 이미 내게 베푸셨습니다.

하느님이 응답하는 종류의 기도이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우리의 삶을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우리 주변에 주문을 걸어 나쁜 일은 모두 우리를 비켜가 남들한테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기적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전거나 좋은 성적이나 남자친구를 위해 기도하듯 단지 기도의 결과만을 바랄 뿐이다.

용기를 위해, 감당키 어려운 것을 감당할 힘을 위해, 잃은 것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힘과 인내와 희망을 주고 우리의 영적 자원이 고갈되었을 때 그것을 새롭게 해 준다고 믿는다.

우리가 힘과 희망과 인내를 얻기 위해 하느님에게 구걸하거나 하느님을 매수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에게 돌아서서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장기간의 투병생활을 용감하게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며 동시에 가장 신적인 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힘과 희망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종종 기도하기 전에는 갖지 못했던 힘과 희망과 용기의 원천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가 단지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끊임없이 깨우쳐준다.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감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짐을 지운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운명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가 그 문제들을 해결해보려 할 때 우리는 자신이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약하고, 우리는 지치고, 우리는 화를 내며, 그 문제에 압도당해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 용기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부 어디로부턴가 오는 새로운 힘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편이며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계속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려 했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오래 전 내가 자랄 때나 신학생 시절에 믿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은 아니다. 나는 이제 그의 한계를 깨닫는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 품성의 진화와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통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다.

나는 더 이상 병이나 사고나 자연재해를 두고 하느님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데 그것은 그런 일로 하느님을 비난할 때 얻는 것은 너무 적고 잃는 것은 너무 많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숭고한 이유에서이든 아이들을 고통받게 하고 죽게 하는 하느님을 경배하기보다는, 고난을 미워하지만 그것을 없애지는 못하는 하느님을 훨씬 마음 편하게 경배할 수 있다.

우리의 불운은 하느님이 초래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운이 없어 일어나고, 어떤 것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며, 어떤 것은 우리가 인간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유연하지 못한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런 일들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벌도 아니요 하느님의 어떤 원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니다

비극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에 비극을 당했다하여 하느님에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에게 돌아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도와달라 할 수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하느님도 분명히 우리만큼 노여워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삶에 나쁜 일이 벌어지는 바로 그 당시에는 그 일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비극들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는 미래에 초점을 두기를 원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조사 ─ "누구의 불찰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 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범인을 찾아내려 하거나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외로운 사람을 더욱 외롭게 할 뿐이다. 그의 결론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사는 것이지 무엇에 대항하여 사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과거와 고통에 초점을 맞춘 질문을 극복해야 하며 ─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 대신 미래를 향해 열려 진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 이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그녀의 책 《고난》에서 죌레는 "고난에 대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무엇에 봉사하는 것이냐’이다

그들을 하느님을 위한 순교자가 되게 하느냐 아니면 대적하는 순교자가 되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죽었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

삶과 죽음의 현실이란 중립적인 것이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응이다.

병마와 사고, 인간적 비극들은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것들이 삶과 신앙마저 죽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만약 가까운 사람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 자신의 힘과 사랑과 마음의 폭을 넓혀준다면, 만약 그것이 우리가 예전에는 몰랐던 위로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부정이 아닌 긍정을 위한 증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가지 일은 우리의 절망과 불신앙으로 그를 ‘악마의 순교자’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과 생명의 증인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선 첫째, 하느님은 나쁜 일 보다는 훨씬 좋은 일이 많이 벌어지는 이 세상을 창조했다.

우리가 천재지변에 대해 경악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고통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예외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만약 어떤 비극으로 충격을 받았다면 그 순간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온통 그 비극뿐이다. 시간과 거리만이 우리에게 총체적인 삶과 인간사의 맥락에서 그 비극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비극을 부인하는 것과, 비극을 총체적인 삶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이미 잃어버린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을 풍요하게 해준 것에까지 마음과 눈을 둘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극을 일으키지도, 방지하지도 않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한다.

나는 하느님이 재앙을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인내를 준다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은 심장마비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친 스트레스에 대한 자연의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기 수련과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에 대해 찬성한다.

인명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 그리고 물이 빠져나간 이후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결단 등은 하느님의 행위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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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병행성은 주어진 본문의 문학적, 수사학적 분석을 압도하는게 아니라 조명하는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 - P39

문헌을 이해하기 위해 매도급으로 병행화parallelizing에 의존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본문에 대한 훌륭한 역사적 조사를 마비화 paralyzing하는 것이다. - P39

기독교 기원에 대해 올바르게 기술하려면 다른 문학과의 유사성과 차이점 모두에 동일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40

한편으로, 초대교회의 신앙은 진공 상태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었다. - P40

기독교의 선포와 예배와 논쟁에 담긴 예수에 관한 담론은 그 환경에서 널리 통용되던 유대와 헬라와 로마의 경구로 표현되었다. - P40

신약 저자들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들의 기술이 주변의 문학 형태 및 문학 사조와 연결점을 가지도록 했을 것이다. - P40

오직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섬김은 추상적인 철학적 추론이나 저 위 세상에 관한 어떤 일반화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 P47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였으며, 신성divinity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존재 중 독보적이며, 지금도 미래에도 만유를 다스릴 왕이라는선명하고 생생하고 예리한 믿음이다. - P47

유대교 사상은 중간적 존재들을 수용하였으며 메타트론 같은 대천사 등의 다양한 대행자들과 에녹 같은 승귀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칭호들이 있었다. - P56

그러나 중간적 존재를 숭배하는 것과 유일한 한 분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사이에는 날카로운 구분선이 있었다. (그래서 허타도인 것이다.) - P56

그리고 이런 구분의 근거는 중간적 존재는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컴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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