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시를 읽는 이유는 기분이 좋아서다. 뒤통수를 한 대 맞았는데 머리에서 분수가 솟는 기분이랄까.
이런 청량한 즐거움은 시가 아니면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시가 좋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좋고,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시를 읽다 보면 이런저런 사념이 든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 낯 뜨거운 고백, 아직 뜨거워 당황스러운 열망, 여전히 막막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은 여기 덧붙인 들쑥날쑥한 내 문장처럼 정처 없다.
다듬고 정리하지 않은 문장들을 그대로 내놓는 것은 시가 마음의 격동을 허락하는 유일한 문장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시 옆에 그대의 문장을 적기를.
시를 읽다 보면 마음을 뺏긴 한 줄의 문장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문장 너머로 시는 계속 이어진다. 밑줄 친 금언, 근사한 아포리즘 너머에 진짜 삶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쓸쓸하고 그래서 오기가 생기는 것처럼. 짧은 시도 끝까지 다 읽어야 그 뜻을 알 듯, 삶도, 짧고 보잘것없는 삶도 끝까지 다 살아야 비로소 뜻을 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 읽어도 알 듯 모를 듯한 시처럼 다 살아도 모를지 모른다. 그 막막함이 다시 시를 부른다. 언젠가 그 막막함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한 잔의 술을 따르고 한 편의 시를 읊자.
요즘은 시보다 소설이 인기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생긴 지 200년 남짓한 소설에 비해 사람들이 시를 즐기기 시작한 지는 수천 년이나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가 쓰인 것이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이니,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치면 시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그 말씀은 필경 시였으리라.
아무튼 시가 오랜 세월 지역과 인종을 넘어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인류의 유전자 속에 시를 즐기는 습관이 새겨져 있다고나 할까. 그러니 시를 쓰는 건 몰라도 시를 읽는 것만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시라는 형식에 문학적 조예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즐기기 위한 남다른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안에 있는 오래된 유전적 본능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즐겁거나 슬플 때 노래를 부르듯이 자기 마음속에 차오르는 감정을 따라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처음엔 생략과 비유가 많은 시 고유의 독특한 형식이 낯설고 어렵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자꾸 읽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사는 데 도움이 되고 쓸모도 있다. 시는 당신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왜냐하면 시는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혁신이란 기존의 세계를 다르게 보는 데에서 출발하는데, 다르게 보는 능력을 키우는 데는 문학, 철학, 예술 같은 인문학이 기본이 되니 그런 것이다.
시란 무엇보다 언어의 반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더 많은 언어에 능통해지려 애쓰는 것도 그래서다. 한데 시는 이런 언어를 거꾸로 뒤집는다. 언어의 반전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뒤집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틈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그것이 시의 힘이다.
시의 유용성은 투자 대비 만족도가 크다는 점에도 있다.
바쁘고 지친 삶에 시가 쉼표가 되어 줄 테니까. 아니, 쉼표만이 아니라 때론 이정표도 되어 줄 테니까.
답답한 마음에 점을 치고 술을 먹고 쇼핑도 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될 때, 그럴 땐 일단 멈춰야 한다. 멈춰서 온 길을 돌아보고 갈 길을 헤아려야 한다.
요즘 세상은 돌아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고, 우선 달리고 나서 나중에 생각하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이다. 제때 고민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가서, 기껏 달렸는데 잘못 왔구나, 뒤늦게 낭패를 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를 읽는 것은 멈춰서 돌아보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듯이 시 한 편을 읽으며 마음을 빗는 것이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나면 다시 먼 길을 갈 힘이 난다. 남들이 좋다는 이 길 저 길 기웃거리지 않고 시를 등불 삼아 오롯이 내 길을 갈 배짱이 생긴다.
시는 이처럼 힘이 세다. 특히 아프고 쓰린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시만 한 게 없다.
겨우 일 초! 라고 우습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단 한 줄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내 마음이 바뀌었다면 그게 우스운 일일까? 단 한 줄의 시를 읽기만 해도 밖으로 향하던 내 마음이 안으로 향하여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겨우’ 일 초가 아니라 ‘무려’ 일 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니까.
시는 말수가 적다. 너도 나도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압축과 생략으로 이루어진 시는 그 자체로 침묵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말이 없으면 불편하듯이 시도 그래서 서먹하고 친해지기 힘들다. 수수께끼와 비밀이 많은 시를 이해하려면 궁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성가실 때도 있다.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나 많고 내 좋은 스승은 이제 여기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보다 작아진 몸으로도 태산 같은 가르침을 주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괜찮다. 괜찮아야 한다. 괜찮고말고…….
그 경계가 나와 너의 사이, 안과 밖의 사이, 우리와 그들의 사이이기도 한 것은 몰랐다. 그 사이에서 꽃이 핀다는 걸 몰랐다.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 아니었으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만날 편 가르기나 하고 보초나 서면서, 온 세상 꽃들이 다 시들도록 전전긍긍 호시탐탐 늙어 갔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진짜 재미없고 참기 힘들 때는 소리 내 말하는 거야. 구름이 놀라 달아날 만큼 큰 소리로.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소리치다 보면 아마 넌 웃게 될 거야. 눈물이 글썽해지도록.
"아, 누나! 왜 이렇게 늙었어?" 왜 이렇게 늙었느냐고? 너만큼이나 정직한 시간 때문이지 뭣 때문이겠니!
그래도 견딜 수 없어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쓰기 시작했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무정한 사랑에 대해 썼지. 그 사랑의 역사를 시작부터 끝까지 복기하듯이 써 내려갔어. 한참 쓰다 보니 눈물이 마르고 팔이 아프더군. 허리도 쑤시고 다리도 저렸어. 그래서 밖으로 나갔지. 세상이 참 예쁘데.
큰돈을 벌지도 못하는데 왜 글을 쓰느냐고 누가 묻더군. 나는 대답했어. 사랑 없는 세상을 견디기 위해서.
오래전 일기를 보며 그때를 그리워한다. 질문을 두려워 않던 나를, 나아감을 믿었던 나를, 아직 젊던 나를.
봄날은 가물어서 비가 오면 반갑지만, 그 빗줄기에 우수수우수수 꽃잎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런데 ‘채울수록 가득 비었다’고, 떨어지는 봄꽃에서 먼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읽다니! 한 편의 시가 흩날리는 저 꽃잎처럼 말문을 막는다.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많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별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시간 여행을 하라고 등을 떠민다면, 그래, 삼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 껌처럼 씹고 버린 청춘에 절망하는 대신 짝짝짝 불량하게 껌을 씹으면서 남은 젊음을 만끽하고 싶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거짓말 같구나. 오래 보지 못한 너에게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쓰는걸.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타인의 연민을 얻고 싶다면 자기 연민부터 버리라던 몽테뉴의 충고를 떠올렸다. 오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란 얼마나 변함없는 존재인가, 새삼 놀라면서.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될 줄 알았다. 집안일도 회사 일도 다 엉망이 될 줄 알았다. 심지어 술자리조차 내가 없으면 김빠진 맥주처럼 싱거울 줄 알았다. 아니더라! 그냥 살짝 가면 되는데 그걸 몰랐다.
살면 살수록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구나 깨닫게 된다. 떠날 날을 통고받은 사람의 마음도 그중 하나. 떠나고 싶지 않은데, 아직 떠날 때가 아닌데 떠나야 한다고 떠밀리는 그 마음을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자신이 떠난 뒤, 비가 오면 창에 물구슬발水簾을 드리우는 자신의 방을 찾아올 사람에게 그녀는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쉬다 가라’고. 그것은 떠나는 이가 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유언이자 짧은 생을 마감하는 자신에게 보내는 당부였으니, 툭하면 죽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사랑도 성공도 이름도 다 부질없는 걸 누가 모르랴. 사람이라 그 거품 같은 것들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이고 그래서 슬픈 것이지.
그러니 차라리 "네 잘못이야" 하고 말해다오. 길들일 수 없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네 잘못이라고, 콕 집어 말해다오. 내 부질없는 슬픔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 한 자 한 자 옮겨 적고 보니 웃을 수가 없네요. 사랑받고 있음을 몰랐던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습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망연자실. 도대체 내 사랑은 어찌 된 걸까요.
물론 부모도 할 말은 없지. 부모도 부모의 살을 먹고 자랐고, 무엇보다 내 살이 토실토실해지는 걸 보며 살 힘을 얻었거든. 그러니까 우리 모두 서로서로 기생한 거고, 그러니까 우리 모두 서로에게 빚은 없다고 해도 돼. 그런데 왜 나는 자꾸 미안한 걸까.
솔직한 게 좋다면서 고작 남에게 가시 돋친 말이나 하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진실을 말하면 입을 막거나 귀를 닫는다. 이런 세상을 보며 어떤 이는 분개하고 어떤 이는 비웃지만, 표현은 달라도 결론은 똑같다. 진실을 감당하기에 인간은―나만 빼고―너무 한심하다는 것.
평생 고향집을 떠나지 않고 세상이 모르게 2천여 편의 시를 썼던 에밀리 디킨슨은 다르게 말한다. "너무 밝은 진실은 엄청난 놀라움"이니 단번에 드러내지 말고 넌지시 보여 줘야 한다고. 눈부신 태양을 똑바로 볼 수 없듯이 진실도 에둘러서 일깨워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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