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세계의 주요 종교에 속하는 유대교의 경전(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 부르는 것)과 기독교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으며, 두 종교의 생명줄과 같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다.

성경 없이는 서구 사회의 기초, 형성 전승, 성격,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은 서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나라들이 성경에서 비롯된 기본 원리들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성경에 관한 올바른 지식 없이는 세계의 가장 위대한 미술과 음악과 문학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성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은밀하고 영웅적인 행동과 희생적인 섬김의 삶이 유래한 근원이자 영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성경 본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행동과 야만적이고 편협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기독교 교회가 급성장하는 세계의 여러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성경을 새롭고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발견하고 해석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만큼 친숙한 성경의 한 가지 특징은 그 안에 매우 다양한 유형의 글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안에는 법률 규범, 역사적 서사, 운문, 시편과 잠언, 예언 신탁, 묵시적 환상, 복음서, 서신이 있다.

이 모든 장르들은 그 각각의 부요함을 설명하기 위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며, 66권의 문서들 모두?외경과 위경은 물론이고?에 대한 무수한 주석과 특별한 연구가 이어져 왔다.

성경이 참으로 중요한 책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는 성경이 인류 역사상 출간된 그 어떠한 단권 서적이나 전집류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차 문헌들이 생겨나게 했다는 점이다.

성경 연구는 새로운 발견들과 접근 방법들을 매개로, 그리고 아주 상세한 차원에서든 아니면 전체적 그림의 차원에서든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옛 가정들에 대한 신선한 평가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통찰들을 매개로 신속한 변화가 이뤄지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편지 첫머리에서 갈라디아 교회 수신인들의 행동에 크게 놀랐다고 밝힌다(1:6). 얄궂게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후 이 편지 자체가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당혹스럽게 했다.

편지의 격앙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고심하는 어머니로 자처하고(4:19) 자신이 방문했을 때 보여 준 그들의 따뜻한 관심을 회상한다(4:15).

갈라디아서의 중심 단락(3장과 4장)은 이방인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어디에 있었든, 이들이 이방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는 걸로 충분하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디에 거주했든, 바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엄청난 상황 변화가 있었다.

편의상 ‘교사들’(편견이 담긴 ‘적대자’나 오해를 부르는 ‘유대주의자’보다 바람직한 용어다; Martyn 1997a: 117)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 집단이 바울 뒤에 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연히 다른 복음 해석을 제시했다. 이 교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온전할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이 자격을 얻기 위해 이방인 남성은 할례를 받고 모든 이방인 회심자는 모세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이를 복음의 수정이나 보완이 아니라 복음의 왜곡이라고 받아들인 바울은 신랄한 비난으로 응수한다.

바울은 교사들에게 맞서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진술,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 성경 해석을 내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악한 세대"(1:4)에 뚫고 들어와 "새[롭게] 창조"(6:15, 새번역)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상기시킨다.

모세 율법은 옛 시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은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결코 모세 율법을 지켜서도 안 된다. 유대 율법을 따르는 것은 열등한 충성,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충성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곧 다른 사람이 부여한 어떤 사명을 수행하도록 공식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 규정한다(또한 롬 1:1; 고전 1:1; 고후 1:1을 보라). 바울은 이중 부정(인간적 수단이나 인간적 출처에서 유래하지 않았다)과 이중 긍정(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다)으로 이 사명의 기원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소극적 변명이 아니라 적극적 진술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일성을 철저히 확증하는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중요한 신학적 주장이 이 편지 첫머리에서 두드러진다. 먼저,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하나님의 뜻이 복음을 형성했고, 그분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

둘째, 예수님은 인류의 해방을 가져오려고 인류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대리인이시다.

셋째, 하나님과 예수님의 행위는 종말론적 행위다. 성경을 비롯한 다른 유대 저자들은, 창조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분투하는 악을 하나님이 끝장내실 미래의 때를 예견했다

바울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은 다른 서신들의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 인사말에서 감사(예. 살전 1:2-10을 보라)가 아니라 책망으로 즉시 넘어간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탈선을 노골적으로 신랄한 언어로 꾸짖는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르신 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1:6). 그렇지만 바울은 사실상 복음을 전복시키려고 의도하는 교사들을 향한 가장 거친 표현을 남겨 둔다(7절)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두 차례나 선언한다(8-9절).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면 그런 동기는 대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14-15장에서 그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 집단 사이에 관용을 촉구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위기 상황에 놓인 쟁점이 너무 심각해서 그런 관대함을 고려할 수 없다고 믿는다.

1:6-10은 바울이 교사들과 그들의 입장에 관용을 베풀 수 없다고 여기고 있음을 보여 주면서, 또한 그런 이유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의 견지에서는 하나의 복음만 존재한다

교사들이 내세우던 주장과 달리, 그들은 단지 바울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더 이상 복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했다

갈라디아서 첫머리에서 두드러진 인간의 작용과 하나님의 작용 사이의 대조가 10절에서 다시 등장한다(11-12절도 주목하라).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NRSV의 각주를 보라; 또한 롬 1:1; 빌 1:1을 보라), 그런 만큼 그의 유일한 책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또한 살전 2:4을 보라).

1:11-12에서 바울은, 인사말에서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과 관련해서 주장한 내용을 확장하여, 1:11부터 2:21까지 이어지는 회고 기사를 시작한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는 비슷한 내용이 전혀 없는 이 자전적 진술을 넣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변호일 것이다

바울은 교사들이 훼손한 자신의 권위를 되찾아야만 했다.

아마 더 중요한 이유는, 이 회고적 진술이 권면의 기능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진술은 교훈을 준다. 바울이 나중에 신자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주장할 때(3:28)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이 특이한 실존에 있음을 신뢰하라고 촉구할 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삶을 언급하며 그런 논점의 기초를 놓는다.

자신의 복음이 배운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은, 자신이 받은 전승을 전해 주었다고 구체적으로 단언하는 고린도전서 11:2이나 15:1-3과 모종의 긴장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 본문에서는 바울이 주의 만찬과 부활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다른 기독교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쓴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Judaism) 전력을 증거로 대면서 회고적 진술을 시작하는데(1:13), "유대교"는 이 시대에 드문 단어였다. 마카베오서에서 이 단어는 안티오코스 4세의 핍박 기간에 유대교의 율법과 관습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온다(마카베오2서 2:21; 8:1; 14:38; 마카베오4서 4:26). 바울의 충성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입증되었다(고전 15:9; 빌 3:6; 참고. 행 8:1-3; 9:1-2; 22:3-5; 26:9-11). 바울은 열심에 있어서 다른 동료들보다 두드러졌다(『요세푸스의 생애』 7-11장의 비슷한 설명을 보라).

1:15-17은 긴 문장 하나로 구성되는데, 바울은 전통에 열심이었던 이전 삶에서 새로운 복음 선포자의 소명으로 움직여 간 과정을 설명한다(참고. 롬 10:2). 이 구절의 언어는 이사야 49:1("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과 예레미야 1: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의 언어를 닮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처럼,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도로 봉사한다.

1:15-17은 12절에서 이미 단언한 내용을 내러티브 양식으로 설명한다. 즉 인간 대리인들이 바울에게 사도의 임무를 가르치지 않았다.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받을 수 없었다.

1:17에서 다마스쿠스를 언뜻 언급하는 것은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울의 회심 이야기와 접촉점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언급 자체가 질문을 야기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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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를 읽으며, 나는 늘 고여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금씩 흘러왔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지금의 절망도 바다에 몸 풀 날 있겠지.
아무리 느려도 흐르기만 한다면.

다음번에 마음이 지옥이 되면 그땐 꺼내 보겠어. 작은 새장인지 커다란 울산 바위인지 꺼내 보면 알겠지. 어쩌면 이쑤시개보다 작을지도 몰라. 고 작은 게 쿡쿡 쑤시는 걸 못 참고서 난 죽는다고 울었는지도 몰라.

몸만 아픈 게 아니야. 삽질이란 게 참 이상해. 하다 보면 마음이 막 아파.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나,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근데 또 그래서 막 삽질을 하게 돼. 그러다 보면 산만 한 흙더미가 다 옮겨지고 커다란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지. 잠깐은 뿌듯해. 하지만 오래가진 않아. 왜 이 짓을 했는지 여전히 모르겠거든. 왜 사는지 모르겠는 것처럼 영 모르겠거든.

세상은 빛나는 졸업장 앞에 예의를 지키지만 나는 생의 어둠 속에서 만난 "작은 빛들"에게, 그 빛을 밝혀 준 이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어요.

내가 넘어지지 않고 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들 덕분이니까요.

마음이 굳어 버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봐야 괜한 노여움이나 살 줄 알기에 다들 입을 닫는다. 몸이 굳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섭다. 내 마음이 굳는 것, 굳은 내 귀가 두려워 사람들의 입이 굳는 것.

세상에서 제일 지키기 힘든 법, 그러나 안 지키면 너도 나도 다 죄수가 되고 마는法(법): 사랑법.

어디 시만 그런가. 잘하려고 기를 써도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한 것이 뜻밖의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보기 싫은 사람만 자꾸 마주치듯이. 그래서 괴롭지만 그래서 살맛이 나기도 하는 것처럼.

요즘은 맛난 것만 골라 먹든 고소한 생선 알을 통째로 집어 먹든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때는 안 하던 배앓이를 툭하면 하는지. 왜 식구들의 왕성한 식욕이 걱정스럽던 그때의 가난한 밥상이 이리도 그리운지.

그래, 앞으론 나도 눈치 보지 않겠어. 이렇게 써도 되나 저렇게 살아야 하나, 이리 힐금 저리 흘금 하지 않겠어.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탈세, 뇌물, 야합……. 뭐 이런 나쁜 짓만 아니라면 어때,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보는 거야.

그런다고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 큰일이 나지도 않을 거고, 군소리를 좀 듣거나 지금보다 조금 더 외로워질지는 모르지만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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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로 시작하는 이상은의 노래가 떠오른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젊음을 몰랐던 시절의 어리석음에 가슴이 얼얼해지곤 했는데, 황혼이 되어서도 황혼인 줄 모르는 게 인생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시 가슴이 얼얼하다.

나로 말하면, 늘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기를 바랐으나 실제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 모든 것이 아리송해지고 말았지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잔인한 말로 두 번 세 번 거듭 죽이는 세상을 겪다 보면 그의 절망이 이해가 된다. 정말이지 착한 사람은 다 죽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인가 회의가 생긴다.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지만 보는 사람은 재미있다. 그러니 남들의 웃음거리가 됐다고 화내지 말자. 웃을 일 없는 세상을 웃긴 내가 얼마나 대견한가!

요새는 아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외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다간 신경 쇠약에 걸린다고 큰소리를 친다. 뻔뻔하게.

산에 꽃이 피었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저 혼자서,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어엿이.
그래서 예쁘고 그래서 삼삼하다.
나도 저 꽃처럼 살고 싶다. 혼자서 피어나, 오는 새 막지 않고 가는 새 잡지 않고 "갈 봄 여름 없이" 무심히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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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인간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비즈니스는 대면을 통한 관계가 주축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 P86

비대면은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이것을 바꾸는 건 단지 두 가지를 물리적으로 뒤집는 게 아니라, 비대면을 통해서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 비즈니스를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 P86

타인과의 대면과 접촉을 피할 수 있고 줄일 수 있다면, 피하고 줄이는 게 언컨택트다. - P86

무조건적인 단절이 아니라, 피하고 줄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언컨택트 기술이자 서비스의 방향이다. - P86

기술적 진화의 목적은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과도 연관이 있다. - P87

기술이 위험으로부터 우릴 보호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유를 더 확대시켜준다. - P87

결국 언컨택트는 우리가 가진 활동성을 더 확장시켜주고, 우리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한 진화 화두다. - P87

비대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욕망의 문제다. - P87

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것도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이 바뀌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대로 변화하는 것이다. - P87

언컨택트는 욕망의 진화인 셈이다. - P87

물론 투명성, 효율성은 누구나 바라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그걸 거부하는 세력도 있다. - P92

하지만 기술적 진화와 사회적 진화는 그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찾아줄 수 있다. - P92

언컨택트는 결국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자, 우리가 가진 라이프스타일에서의 기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 P92

과거엔 하지못했다면, 이젠 할 수 있어서다. 당연하던 컨택트를 대신해 당연하지 않았던 언컨택트에 대해 우리가 자꾸 관심을 가지고 방법을 모색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화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 P92

전염병은 과거에 비해 늘고 있고, 그 중 동물에서 인간에게로 병원체가 옮겨져 발생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의 비중이 높다. - P97

미국 <수의학 저널Veterinary Science>(2019. 6)에 따르면, 지난 80년간 유행한 전염병들은 거의인수공통감염병이고, 그 중 70% 정도가 야생동물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 P97

인수공통감염병의 대부분이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인류가 했던 생태계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 도시화, 세계화로 점점많은 개발이 이뤄지며 생태계가 파괴되자, 서식지가 줄어든 동물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 세계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97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 가뭄, 수몰 등 이상기후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인간과 접촉이 가능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 P97

20세기 동안 인류가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해왔고, 20세기 후반부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왔음에도 모두가 기후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 P98

이는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불편을 겪을 일은 앞으로 더 잦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 P99

그리고 이는 노령, 장애, 빈곤을 가진 사회적 약자에겐 더취약한 상황이 된다. - P99

위생을 신경 쓰고 면역력을 키우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대면과 접촉을 줄여서도 사회와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건 정부와 기업의 몫이다. - P99

분명한 것은, 언컨택트 사회를 지향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것이다. - P99

이런 과정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나서야 하는 것도, 정부와 기업에 이런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일상에서 탄소배출 절감을 위해 행동하는 것도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 P99

당연하던 모든 것이 당연해지지 않기 전에, 당연했던 것 중에서 문제 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는 것을 우린 받아들여야 한다. - P99

컨택트 사회만 고집하다간 위기 상황 앞에서 일상이 멈춰버린다. 언컨택트 사회를 받아들이면서 우린 계속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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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 위로와 충고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려니 번번이 허방을 짚고 만다.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위로,
조용히 몸으로 보여 주는 충고,
달리 무엇이 있는가?

반성은 나중에, 청춘이 다 지난 뒤에 해도 된다. 그때 짐짓 깨달은 얼굴로, 화무십일홍이니 젊음을 낭비하지 마, 하고 잘난 척해도 된다.

‘노’No에 익숙해지고 실패에 이골이 났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만날 꼴등을 한다 해서 꼴등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데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줄 안다.

실패에 적응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모욕을 준다.

지고도 창피한 줄 모른다고 모욕한다. 바보들!

깨지고 모욕당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실패했다고 모욕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진짜 굴욕스러운 건 실패할까 두려워 싸움을 피하는 것.

겁나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

제가 못 먹는 포도는 신 포도라고 박박 우기던 여우처럼, 패배를 부인한 채 비겁하게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옷깃에 얹힌 "쓸쓸"을 알게 된 지금, 부끄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나만 쓸쓸한 게 아니라서 반갑고, 우리가 함께 쓸쓸해서 다행이다 싶다.

나중에 알았다. 어떤 사람이 충고를 듣고 잘됐다면 그건 내 덕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듣고 행한 그의 덕임을. 그가 충고를 구한 게 나만이 아니란 것을. 더구나 내 말대로 해서 잘못된 경우는 내가 싹 잊어버린단 것도.

요즘은 충고를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몸에 밴 습習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서 매번 나 자신에게 충고한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정약용은 철학, 의학, 역사학, 언어학, 법학 등 다방면의 학문은 물론이요, 시 짓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내 길을 가려면 이런 자신감이 필요하다. 물론 실력이 있다는 전제 아래서. 실력은 없이 자신감만 있으면, 어휴…….

죽은 사람을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는 그림이 그려지며,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이 되어 가문 땅을 적시기도 하고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늙은 죽음이 곧 젊은 생이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나중에 만나자고, 남은 이를 위로하는 따스한 유언.

‘인생이 뭐야?’라고 누가 물으면 딱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모르는 일이 아는 일이 되어 흘러갈 때까지 떨고 있는 일이야.

그나저나 나는 좀 더 오래 이 물속에서 떨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아직도 죄다 모르는 일뿐, 도대체 아는 일이 없으니…….

왜 남의 집 불빛들은 그리도 다정해 보이는지, 왜 사무치게 외로울 땐 다들 그리도 부산한 것인지…….
나만 혼자 하염없이 강물을 벗 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구나. 저 강이 저리 붉은 것은 노을 때문이 아니구나. 아무 데도 갈 데 없는 외로운 설움들이, 내 설움 네 설움 한데 어울려 타오르는 까닭이었구나.

밥벌이의 고단함을 겪지 않았으면 끝내 몰랐을 비유들. 몰랐어도 좋았겠지만 기왕 겪은 시간, 그래도 배운 게 있어서 다행이다.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아니 일흔이 되어도 여전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라는 시구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삶은 그런 시간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을 "페이지를 넘긴다"라고 표현하다니. 게다가 ‘달 귀퉁이가 접혀 있다’라고!

아름다운 말은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 시는 참 힘이 세다.

요즘 애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는 줄 알았다. 한때는 나도 ‘요즘 애’였다는 걸 잠시 잊었더랬다.

나치 독일에서 브레히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고백했다면, 네팔의 가난한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는 ‘살아남은 자의 운명’을 노래했다.
그의 말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짜깁기하는 데도 지쳤을 때, 안간힘으로 버티던 두 팔을 탁 놓아 버리고 싶을 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어질 때.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보다 위대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그래,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의리로,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서로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 높은 벼슬을 주며 불러도 응하지 않은 학자들을 훌륭하다고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럽다.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보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가 훨씬 더 어려우니까.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는 집 안에 틀어박혀 시를 쓰기보다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기를 바랐다.

두고두고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의 절창은 모두 세상의 비극에 눈감지 않았던 이 뜨거운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이 아무리 뜨겁고 그 뜻이 아무리 높다 해도 어린 자식이 굶어 죽는 참담한 슬픔과 거듭된 세상의 냉대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으니, 깊은 밤 홀로 깨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뜻을 되새겨야 할 만큼 그의 생애는 외로웠다.

이 시를 쓴 이성선 시인은 평생 설악을 벗하며 가슴 시릴 만큼 맑은 시를 써서 읽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김사인 시인은 아예 이 시구를 그대로 옮겨 적어 시 한 편을 썼으니, "(……)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라고 고백했을 정도다.

나이 먹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고 당신의 불행은 돌고 돌아 내 불행이 된다는 것.

물론 가끔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저놈의 인간이 불행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러나 복수가 복수를 낳아 세상이 눈물 속에 잠기는 끝을 상상하면 결국 기도하게 된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으니 너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너도 부디 무사히 살라.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그날까지.

첫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가 바보 온달이라도 좋고, 달동네 산비탈 셋방에 살아도 좋고, 가끔 전기가 나가도…… 나가면 더 좋다는 것.

둘째, 마냥 좋은 그 시간이 썩 오래가진 않는다는 것. 뭐든 유통 기한이 있기 마련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 풍경도 없는 깜깜절벽 속을 밀감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달리는 그이들에게 이 시를 읽어 주고 싶다.
날마다 어둠에 길을 내는 당신이 있어 오가는 내 걸음이 편안했으니, 고맙습니다.

어떤 아홉수든 아무튼 아홉수는 외롭기 십상이다.
애인도 직장도 없던 스물아홉에도,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던 열아홉에도, 심지어 입이 찢어져 죽었다는 이승복 어린이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던 아홉 살 그때도.

죽음 앞에서 생은 투명해지느니, 시인의 마흔아홉 생을 거듭 살아도 나는 삶의 무상에서 희망을 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얼마나 공평한가!

도서관을 나섰을 때, 이미 해가 저물어 있더군. 어둔 하늘에 상여 꽃처럼 목련이 희게 떠 있는 저녁 캠퍼스를 젖은 눈으로 걸어오며 결심했지. 나는 이 시를 살겠다, 이 역사를 살겠다. 내 스물은 그날 시작되었지. 내 서른이 어땠느냐고, 마흔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내 삶은 그때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렇다. 내가 좋아한다고 나를 좋아하란 법은 없다.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이루어지란 법은 없다.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으니.

그때마다 맘이 쓰리다. 필 때는 질 때를 걱정하고 질 때는 필 때를 놓친 것을 서러워하는 누군가가 떠올라 쉬 버리지도 못하고 안쓰러워한다.

지금의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사소한 일로 핏대 올리기 전에 생각해야지. 혹시 나비를 잡겠다고 총을 들고 설치는 건 아닌지.

빈대 잡으려다 간신히 마련한 초가삼간 태우면 나만 손해.

그래, 웃자. 그냥 웃자. 웃으면 복이 온다니까, 복이 오나 안 오나 한번 웃어 보지, 뭐.

슬픔은 슬픔이 알고 슬픔은 슬픔에 힘이 됩니다. 지극한 슬픔은 지극한 힘입니다.

그녀를 보고 알았어. 남들에게 받은 친절과 칭찬은 금세 잊어버리고 남들이 서운하게 한 것만 두고두고 저금하는 내 기억력, 아주 나쁘구나. 그런 못된 기억력으로는 절대 멋쟁이 할머니는 될 수 없겠지.

벌레가 갉아 먹어 나뭇잎에 구멍이 났는데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것, 한두 번 본 풍경이 아니다. 한데 이 흔한 풍경에서 시인은 벌레 먹힌 "잎들의 신음"을 듣고 "금싸라기" 햇빛에 세상이 환해지는 것을 본다. 똑같이 눈 두 개 귀 두 개가 있어도 나는 못 보고 못 듣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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