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었나요? 책을 읽기만 할뿐 남는게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서평. 잘 적진 못해도 읽은 것은 무조건 적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티스토리에서 시작해서 네이버 블로그까지 이어졌습니다.


요즘엔 서평을 다 적지는 못합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은데, 읽어야 하는 책에 치일 때도 있습니다.

주로 기독교서적이나 신간 위주로 서평을 작성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마음이 공허하거나 두통이 심할 땐,

에세이나 소설 혹은 신학 이외의 장르를 봅니다.

서평은 어렵고, 감상평 정도 짧게 남긴 것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로 인스타나 알라딘서재에 남깁니다.


암튼, 이리저리 서평이 흩어져있다보니 필요에 의해 한번 시간내어 모아보았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서평을 적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새벽3시나 4시의 짧은 독서 시간이 참 좋습니다. 


서평은 에너지와 시간이 매우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 독서에 집중하고 싶다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독서하다보면 내용이 휘발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다시 감상평이라도 적어보게 됩니다. 무한 반복. 


아무튼,  클릭하시면 서평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뉴스 기사나 출판사 공식 블로그에 소개된 서평만 모아봤습니다.


https://blog.naver.com/mojung01/22210828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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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생활 로봇이 자율적으로 이동하며 음식뿐 아니라 가사일도 도울 수 있는 미래가 이미 가까이 다가왔다. - P198

집에서 가사일 도와주던 사람의 역할이 줄어들면 소위 ‘주방이모‘들의 일자리도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 P198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던 택배 배송 기사, 음식 배달원, 서빙하는 접객원, 가사도우미 등의 일자리 위기는 가혹하지만, 기업들의 방향은 이미 그렇게 가고 있다. 언컨택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셈이다. - P198

집단주의적 문화가 퇴조하고 개인주의적 문화가 부상했다. 이런 시대 우리가 느슨한 연대를 얘기하는 것은 변화된 욕망 때문이다. - P240

혼자 사는 시대라서 오히려 새로운 연대가 필요해진 것이다. - P240

고롭되고 외롭고 싶은 게 아니라, 혼자 사는 것을 기본으로 두고 필요시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고 싶은 것이다. - P240

혼자와 함께의 중간지점, 즉 혼자지만 가끔 함께가 되는, 서로 연결되긴 했지만 끈끈하진 않은 느슨한 연대인 것이다. - P240

그동안의 역사가 오프라인에서의 연결과 교류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인류를 진화시켜왔다면, 이젠 온라인에서의 연결과 교류를 오프라인과 병행시키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 - P263

언컨택트는 단절이 아니라 컨택트 시대의 진화인 것이다. - P263

우리가 더 안전하고,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연결과 교류가 되는 언컨택트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263

결국 언컨택트 사회가 되어도 우리의 공동체는 유효하다.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란 것도 유효하다. - P263

다만 사회적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연결되는 방식에서 비대면 비접촉이 늘어나고, 사람 대신 로봇이나 IT 기술이 사람의 자리를 일부 채울 수 있다. - P263

우린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다만 공동체의 연결과 교류 방식에서 폐해를 걷어내는 과정이 나타날 것이다. - P263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집단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그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탐욕 때문에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이 생기는 게 싫을 뿐이다. - P263

이것이 싫다고 집단을 거부하고 고립화를 자처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언컨택트 사회가 투명성을 높이면 이 문제도 해소될 여지가 생긴다. - P263

자신이 하는 부당함을 남이 알지 못할 수 있고, 권력의 힘을 맘껏 휘둘러도 견제가 제한적이던 시대에서 저질렀던 문제가, 투명성과 수평화가 강화되는 시대에서도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263

언컨택트 사회는 예고된 미래였지만, 코로나19의 갑작스런 등장으로전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 P299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언컨택트 환경을 도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언컨택트가 가진 문제를 급격히 노출시키는 계기도 되고 있다. - P299

인간 소외와 새로운 갈등, 새로운 차별과 새로운 위험성, 결국 코로나 19가 종식되면 우리 사회는 언컨택트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 P299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그시기가 당겨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까.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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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 사회는 비대면이지만 오히려 더 촘촘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 - P184

사람이 사람을 통제하는 시대는 끝났다. 사람이 사람을 통제한다는 발상도 유효하지 않은 시대다. - P184

통제가 아닌 관리와 보호를 위해서 사람이 아닌 기술의 힘을 빌릴 방법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대인 건 분명하다. 언컨택트 사회의 딜레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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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갑자기 자신의 복음 경험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직접적 공격과 그들의 경험을 선명하게 상기시키는 내용으로 넘어간다. 3:1의 강렬한 표현은 청중의 관심을 끌려는 수사적 목적에 부합한다. 또한 여기에는 상황에 대한 바울의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바울이 보기에, 주술 따위의 외부 힘이 꾀어낸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 백성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교인들이 그렇게 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3:1b은 바울이 가르친 내용과 형식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전한다(고전 1:18, 23; 2:2도 보라)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눈앞에 밝히 보인다"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인 중에 누가 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의 선포가 그 사건을 생생하고 강력하게 그들 앞에 제시했다는 뜻이다.

3:2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자신의 성령 경험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한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을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인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용어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성령은 이미 그들에게 논박할 수 없는 경험의 일부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5절),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표현된다(5:13-26).

바울은 여기서 성령에 관해 가르치지는 않는다. 긴급한 질문은, 성령이 누구고 어떤 일을 하시느냐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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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술은 자전적 내력을 세세하게 회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가진 회담을 전하는 1:18-24에서도 동일한 관점이 유지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다고 인정하지만, 이런 양보마저 게바와 야고보 두 사도만 거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된다.

바울의 사도직의 기원에 대한 회고적 진술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다는 언급과 함께 끝난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전에 박해자였고 이제는 사도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한 유대 지역 교회의 증언을 언급한다(1:23).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24절)은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적 출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직접 온다는 바울의 주장을 확인하는 데 일조한다.

어떤 계산법이든 이 예루살렘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여행이 빈번했기 때문이거나 바울이 권위자들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바울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도적 임무를 예루살렘 권위자들이 확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행 자체가 계시의 결과로 이루어졌다(2:2).

바울은 예루살렘의 합법적 지도자들을 "거짓 형제들"과 구별하지만, 이 만남에 대한 그의 보고 방식은 그가 두 집단 모두와 독자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거짓 형제들"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가 인정한 지도자들도 그의 복음 이해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율법을 철저히 따르던 이들이 이방인들과의 식사를 곤란하게 여긴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가 본질적으로 반대할 일이어서가 아니라, 차려진 음식이 음식법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이든, 바울이 판단하기에 이런 행동은 복음 자체에 대한 공격과 다름없었다. 게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식탁 교제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하는 식사가 계속되려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음식법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울은 이런 반대 때문에 예루살렘 지도자나 친밀한 동맹자들과 맞서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저항한다. 그는 자신의 타협 거부를 갈라디아인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은근히 제시한다.

2:7에서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전한 복음을 구별한 것은 내용상의 구별이 아닌 청중의 구별이다.

바울의 사도직에 부여된 유일한 요구는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인데(2:10), 이는 예루살렘의 궁핍한 신자들을 가리킨다(롬 15:26을 보라; 참고. 행 11:27-30; 요세푸스 『고대사』 20.51-53, 101).

이 요구와 바울이 이 요구를 열심히 수행했다는 보고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유대 전통은 공동체 안의 약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보살핌은 서로 친숙한 관계로 결속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여 준다.

수사학적 측면에서, 이 회고 단락은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 권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유래했다는 바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승인을 구했다고 인정할 때조차, 여전히 그들의 지위가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고(2:6), 그들이 자신의 사역을 전적으로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예루살렘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는 동시에 그들과 거리를 둔다.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상호 배타적 영역으로 이해한다.

율법과 그리스도가 칭의에 상호 보완적이라고 이해하는 교사들에게 맞서,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가 상반되고 그리스도에게만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단언한다.

전통에 대한 열심을 포함하여 바울이 이전에 소중하게 여긴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죽었고(참고. 빌 3:2-11), 그의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동으로만 배타적으로 정의된다.

갈라디아서의 나머지 내용은, 바울이 이 급진적 가치 재평가를 순전히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개개인 신자를 넘어서는 복음 자체의 필수 요소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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