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함의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역 안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데(3:27), 이는 세례 받는 사람에게 새 옷을 입혀 주던 초기 기독교의 관행을 상기시키는 진술이다(롬 13:14; 엡 4:22-24; 골 3:9-10을 보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다른 모든 관계와 가치는 퇴색한다(롬 6:3-5을 보라).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은 신자들이(2:19-21과 마찬가지로) 다른 정체성을 갖지 않고, 다른 영역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이 이전의 세례 문구를 채택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인류를 나누는 이런 근원적 분열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그의 주장은 바울 서신서에 있는 다른 본문과 상충되는 것 같다

아브라함에 관한 논의의 마지막 단계가 3:29에 나온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이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자녀다. 여기서 바울은 단수 용어 "자손"을, 앞서 16절에서 거부했던 집합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분명한 함의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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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자신이 이미 율법과 무관하게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지식에 호소한 뒤, 바울은 이제 성경을 근거로 복잡한 논증을 전개하는데, 이는 갈라디아서에 두 차례 나오는 그러한 논증 가운데 첫 번째다(4:21-5:1도 보라).

이방계 그리스도인, 아마 이스라엘의 선조나 이스라엘의 성경에 별로 친숙하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 인물에 호소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울의 논증은 아브라함의 신실함에 대해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이 연결되는 본문인 창세기 15:6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바울의 논증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도, 창세기 15:6은 할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3:7에서 자신이 제시할 핵심으로 곧바로 이동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율법과 무관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주장이다.

12:3을 약간 수정하여 아주 심오한 의미를 이끌어 낸다. 바울은 창세기 12:3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기록된 곳을 "민족" 혹은 "이방인"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로 대체한다.

갈라디아서 3:8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성경의 의인화(성경이 "미리 알고", "전하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3:22; 4:30을 보라). 이런 의인화는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유대교 저작에서 이미 볼 수 있다(욥 28장; 잠 1, 8, 9장; 집회서 24장; 솔로몬의 지혜 7:7-9:18)

바울의 사고에서, 성경은 독자들이 원리와 명령을 검색하는 수동적 저장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을 해석하는 능동적 파트너다(참고. 롬 15:4). 이 경우에, 성경은 하나님이 언제나 복음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을 주시려고 의도하셨음을 입증한다.

3:8의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라는 표현은 모호하다[마찬가지로, 14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를 보라]. 이 표현은 복음에 대한 이방인들의 믿음의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신실하심도 다시 언급한다. 최초의 중요한 행동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예수님의 신실한 순종이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예고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에 관한 복을 보장하는 아브라함의 신실함과 대조적으로, 율법은 저주만 보장한다(3:10-14). 여기서 바울은 서로 다른 몇몇 본문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백성에 들어가기 위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교사들의 가르침에 담긴 심각한 오류를 입증한다

3:11-12은 다른 논점을 제시한다. 쟁점은 사람이 율법을 전부 순종할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율법과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배타성이다.

먼저, 3:11에서 인용한 하박국 2:4b은 믿음이 의에 기여한다는 주장에 일조한다(참고. 롬 1:17). 그 뒤에 인용한 레위기 18:5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렇다면 그 함의상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믿음과 율법을 분리한다.

바울은 이 본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방식이 그분을 저주받은 사람이 되게 했고, 그로써 그분이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실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바울은 율법의 저주에 관한 이런 진술을 유대교의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갈라디아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와도 연관된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수치를 묻어 두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을 드러낸다.

3:14은 이방인들에 관한, 그리고 그들과 아브라함의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넘어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 이제 성취되었고,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활동은 이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는 증거다.

3:15-18은 율법 준수를 반박하는 논증을 강화하면서,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후에야 주어졌고, 이 약속은 한 명의 자손,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관행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논증을 시작한다(15절). 17절에서 바울은 유언뿐 아니라 언약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여 논증을 펼친다

유언이나 언약은 한 번 작성하면 변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 년 뒤에 모세에게 주신 율법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파기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율법도 인정하듯이, 모세 율법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우선권이 있다.

바울은 약속의 우선권을 확립한 뒤에 이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 명사는 집합 명사(문자적으로 ‘씨’)이지만, 바울은 전통적 주해 관행을 따라서 이것이 단수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즉 ‘여러 씨’가 아니라 한 ‘씨’만 존재하고, 그 한 씨는 그리스도시다

물론 바울은 이 대목에서 명확한 논리적 결론을 제시하지 않지만(3:29을 보라), 그 함의는 분명하다

갈라디아인들에게 강요하는 교사들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

이 논증은 하나님이 항상 이방인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율법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란 인물에서 시작한다.

아마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특히 할례를 바라신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순종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가르쳤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언급한 언급은 창 26:5; 집회서 44:20-21; 마카베오1서 2:52을 보라; 참고. 약 2:23).

갈라디아인들에게 강요하는 교사들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

율법을 통해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대체 율법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가?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동일한 질문을 다루는데, 거기서 바울은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주장한다(7:12).

갈라디아서 저변의 정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지지는 허용되지 않고, 율법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놀랄 만큼 부정적이다.

3:19b은 율법의 목적에 관한 질문에 바울이 내놓을 대답을 소개한다. 율법은 인류를 죄에서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임시 수단이었다

3:21은 율법의 지위 문제로 돌아가서, 율법의 목적에 관한 질문에 부정적 대답을 제시한다. 즉 율법이 의를 낳도록 의도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면에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한다. 가두어 두는 "성경"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킬 것이고, 그래서 이 구절은 로마서 11:32과 아주 유사하다

율법의 임시 역할을 보여 주는 색다르면서도 훨씬 생생한 표현이 3:23-25에 나온다. 여기서 바울은 주어를 일인칭 복수로 전환하여, 특별히 이스라엘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율법은 "우리"의 초등교사, 헬라어로는 ‘파이다고고스’(paidag?gos) 혹은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학교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 책임을 맡은 종이다. 그런 인물은 제한된 기간에만 필요했고, 어린 학생이 성년이 된 뒤에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이 유비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이스라엘이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믿음이 오기 전"(3:23)과 "믿음이 온 후"를 대조한다.

헬라어로 ‘믿음’에는 정관사가 들어 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신실하게 성취되었다는 의미에서 "그 믿음"(the fait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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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다는 게 뭐냐면, 심리 발달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중 하나의 틀이 ‘자아 중심성egocentrism‘에서 ‘자아의 탈중심성 egodecentrism’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 P48

무조건 나를 중심으로 보다가 다른 사람도보게 되는 거죠. 어릴수록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나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쟤가 저러는데 그럼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면서 이타적인 면이 점점 나타나는 게 심리발달에 있어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P48

아마 선생님들이 많이 생각하시는 어리다는 판단은, 집단 속의 나라든지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 내가 얻고 싶은 것에 대한 즉각적 만족만을 바라고 있는 면과 연관이있겠죠. - P48

실제로 요즘 아이들을 보면 그런 면들이 분명히 있죠.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이 왜 생겼을까를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성과 관련된 부분들이에요.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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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7

공부를 하면 언어를 배우게 된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늘어나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다. - P7

예를 들면 ‘구조‘라는 말을 알 때와 그러지 못할 때 세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 - P7

공부는 사실 이렇듯이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 P7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난다. 세상과 삶이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 P7

세상의 그 어떤 언어도 삶을 그 자체로 풍부하게 재현할수 없다. - P8

모든 재현은 불가피하게 삶을 추상화하고 규격화한다. 이 규격화의 과정에서 자칫하면 삶이 도식적인 것으로 분해되고 내가 겪었던 경험은 형해화된다. - P8

대신 그 자리를 개념들이 차지하면서 나의 경험은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 P8

구체적 삶은 왜소해지고 대신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개념들이 그 구체적 삶의 자리를 분해한다. - P8

나의 삶은 그 개념들의 지식 권력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 P8

다시 강조한다면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 P9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 P9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말이다. - P9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 P9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 P9

지금의 공부 중독현상이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즉 교육학의 차원에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차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개개인의 멘탈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요. 사회 변화에 따른 변화된 삶 속에서 어떻게 커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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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 Uncontact - 더 많은 연결을 위한 새로운 시대 진화 코드
김용섭 지음 / 퍼블리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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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기 싫지만, 연결되고픈]

코로나19로 촉발된 비대면사회.
이미 예견되었지만 더욱 가속화된.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빨리 경험하게 된.

저자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바라본다.

저자는 비대면 사회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욕망을 들추어낸다.
다름아닌 불안과 편리.
어떻게 양극단의 욕망이 언컨택트의 욕망이 되었는가?
이러한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출되었나?

저자는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미래를 조망해본다.
더하여 방향성 모색에 그치지 않고, 비대면 사회가 주는 도전과 기회, 문제를 모두 아우른다.

현 시점에서 던져볼 수 있는 귀한 통찰을 준다.
또한 앞으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언컨택트
#김용섭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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