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기능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애정 어린 말로 들렸다.

이 책은 내가 어떻게 목사로 빚어졌는지, 목사라는 소명이 어떻게 나를 빚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은 목사가아닌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기 오래 전부터 나는 이미 목사였다. 다만 그 당시의 나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그 이름이 붙여지고 나자 온갖 것들이, 별로 상관없어 보였던 경험과 기억들이, 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과 일치하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내 손에 꼭 맞는 장갑을 찾은 것과 같았다. 목사는 내게부르심이었고, 내 인생의 모든 조각의 합, 곧 소명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나는, 술과 마약과 온갖 방탕한 생활로부터 극적으로 회심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 이야기들이 가장흥미로웠다. 나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에 필적하는 이야기들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서 들려주는 교회 문화에서 자랐다

드니즈 레버토브(Denise Levertov)가 쓴 시를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도착이다." 자신이 시인으로 성장해 간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그 표현을 보고 나 자신이 목사로 빚어져 온 과정도 그와 같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로 만들어지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내딛는 나의 걸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어, 일관된 삶과 소명이라는 나의 도착점에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통합되었던 것이다.

과거의 목사들과 오늘날의 목사들 사이의 연속성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롭게 등장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 처음부터 다시 제시하고 키워 가야 하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는 세대다.

미국의 문화와 가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무분별한 소비주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비인격적인 역할과 명분과 통계로 만들어 버리는 탈인격적 방법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심지어는 적으로 간주하는 정신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속한 이 문화에서는 매서운 경계심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예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하고 해로운 문화적 오염 물질로부터 내 소명을 지키려면 말이다. 나는 내 개인적인 삶이나 내가 하는 일 모두가 하나님과 성경과 기도로 형성되기를 원했다.

목사들이 교회를 떠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도자란 ‘일을 해결하는 사람’ 그리고 ‘일을 이루어내는 사람’이라는 가정이 문화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목사가 그러한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2천 년에 이르는 우리의 목회 전통에 따르면 목사는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사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공동체 안에 세워진 사람이다

목사가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현장을 중심으로 하고, 언제나 인격적이며, ‘쉬지 않는’ 기도의 일이다.

동시에 목사가 되는 방법을 정리한 청사진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목사가 되면서 나는 목사의 삶은 매우 현장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사의 감정과 가정 생활, 신앙의 경험과 적성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실제 회중에 그대로 작용한다.

목사란 아마도. 목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교회적 합의를 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하는 일을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아마도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목사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 그리고 영혼과 관계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신비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특정 조건 하에서 수행한다. 언제 어디서나 눈으로 보고 측정할 수 있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서 한다. 그 조건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을 깊이 의식하고 싶다. 내가 거룩한 신비를 의식하는 것만큼이나 그 조건을 깊이 의식하고 싶다.

"여호와께서 과연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여기를 알아야 한다.

격자로 정리된 달력으로 혹은 숫자가 새겨진 시계로 추상화된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kairos)다. 잉태의 시간, 궁극적 현존이신 그분 앞에 현존하는 시간이다.

지금, 구원이 창조의 자궁 안으로 발길질하며 들어오고 있다. 주의하라. 준비하고 있으라. "때(카이로스)가 찼으니…." 회개하라. 믿으라.

중세 기독교의 몇몇 전설에 보면 신성한 장소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성배가 보관되어 있거나 언약궤가 묻혀 있는 장소는 지금도 거룩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거룩한 땅,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계발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신성함에 물든 땅. 그러한 전설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청소년기에 나는 그와 비슷한 일이 이 오두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전설은 그렇다 치고,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하나는 지금까지 65년 동안 이곳이 보호받는 장소와 시간이 되어 현재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기도와 묵상, 숙고와 깨달음, 대화와 독서의 중심지로서 나를 더 깊어지게 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나는 지난 경험과 만남을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했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정리되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 자신이 되어 갔다. 그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목사가 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성한 공간은 복잡하지 않고 조용하다.신성한 덮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거대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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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믿음이 율법에 순종함이 아니라 복음으로 들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경험한 일이었다(갈 3:1-5). - P404

더 중요한 점은 성령과 믿음이 오직 이 길로만 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몰아낸 것은 이방인 문제와 바울의 구원론이 천명하는 유일주의이지, 율법에 관한 바울의 오해나 바울의 배경이 결정지은 견해가 아니었다. - P404

인간의 진정한 곤경은 사람들이 다른 주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 P409

아무리 열심히 참회해도, 참회가 주를 바꿔놓지 못한다. - P409

인간은 자신이 지은 범죄들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를 해결할 길은 하나님이 그 범죄들을 보아 넘기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 범죄들을 속하고자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문제를 이루지는 않는다. - P409

인간의 문제는 그리스도라는 주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 P409

바울 사상의 핵심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고 1차 변화를 겪으며 이 변화는 결국 부활과 궁극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요, 이런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영인 사람이라는 것이며, 인간이 그리스도와 이룬 연합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연합을 형성하여 그가 참여를 통해 이룬 연합을 깨뜨리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하여 방금 말한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P422

바울은 이 두 점-즉 하나님의 정의는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지만, 범죄에 따른 형벌과 순종에 따른 보상이 그의 구원론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행위도 "안에" 계속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에서 우리가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P427

바울이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말했고, 말한 바를 의미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한 영이다. 현세의 외형은 실제로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이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옮겨가고 있다. 마지막은 실제로 올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실제로 변화될 것이다. - P429

바울이 한 말이 바로 바울이 실제로 생각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세우신 주이시요, 믿는 자는 다 주께 속하며 그와 하나이며, 믿는 자들은 주와 한 몸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주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하는 말이요 하려 했던 말이다. - P431

바울이 구사하는 의 용어(righteousnes terminology)도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의 용어와 관련이 있다. 바울의 글에서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처럼 의로움(인간/인간)과 경건함(인간/하나님)을 구분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여러 미덕 중 하나이지도 않다. - P435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큰 변화가 있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토라에 순종하고 범죄를 참회함을 뜻하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롭다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 P435

요컨대, 유대교에서는 의가 택함 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그룹 가운데서 지위를 유지함(maintenance of statris)을 암시하는 용어이지만, 바울의 글에서는 의가 옮겨감을 나타내는 용어(transfer term)다. - P435

즉 유대교는 언약에 헌신함을 "안에" 자리 잡게(들어가게) 해주는 것으로 보고, 순종(의)을 뒤이어 사람이 안에 계속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본다. - P435

반면, 바울의 용법을 보면, "의롭게 되다(bemade righteous" ("의롭다하심을 받다(be justified")는 구원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몸 안에 들어감(getting in)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그 몸 안에 머(stayingin)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 P435

따라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P435

유대교는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이 그렇게 율법에 순종함으로 언약 안에 머문다는 뜻이다. 결국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느냐 아니면 행위로 말미암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의롭다"는 단어 그룹을 서로 달리 사용한 데서 생겨난 결과임이 드러난다. - P435

바울이 논박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대교가 합당히 여기는 올바른 경건에 이르는 수단("율법의 행위로")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유대교의 근본 기초들이다: - P448

선택, 언약과 율법, 그리고 이것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른 의"에 합당한 수단(토라에 순종함과 참회)도 잘못이라 주장하거나, 이 수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유대교에서 발견한 문제다: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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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언제나 새 피조물임(고후 5:17)을 말하기 전에, 성령을 소유함이 곧 보증이라고 언급했다(5:5). 따라서 우리는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종말론적 기대를 담은 간명한 구원론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이나 영에 참여함이라는 현재의 실재와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둘은 함께 간다. - P37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주요 구주로 임명하셨다. 그를 믿는 이는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가졌으며, 현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영인 이로 간주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그들이 속한 주로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 P378

바울의 강조점을 틀림없이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뒤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죄를 대속함으로 나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쪽으로 나아간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목적이라고 말한다. - P382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생각할 때 과거의 범죄를 속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주[主]인 이가 바뀜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며, 이렇게 주가 바뀜이 미래에 임할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 P382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이와 같이 전개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고자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율법도 함께 주셨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고자 주어진 분이라면, 율법은 구원의 길일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는가? 아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에 건네줌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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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이해할 때는, 그 종교 자신이 제시하는 내용이 명백히 무단 삭제되거나 정정되지 않은 한, 바로 그런 내용에 기초하여 이해해야지, 외부에서 그 종교를 논박하고 공격한 내용에 기초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 P352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우리는 기원후 70년 이전의 유대교가 은혜와 행위를 올바른 시각으로 파악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고, 특히 위선이라는 특징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P352

결국 우리는 이 연구를 토대로 역사 속 여러 당파 및 분파의 관계, 바리새주의가 다른 당파 혹은 분파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 등에 관하여 결론을 끌어내지는 못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전에 유대교가 가졌던 특성에 관한 한, 몇 가지 결론을 타당하게 끌어낼 수 있다. 설령 우리가 언약적 율법주의가 표명했던 서로 다른 주제들과 모티프들을, 이후에 랍비 문헌이 이해한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약적 율법주의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널리 퍼져 있었던 일반적 종교 유형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 P354

바울의 사상은 인간의 비참한 곤경에서 그 해결책으로 진행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해결책에서 인간의 곤경 쪽으로 진행하는 것 같다. - P364

그는 인간의 죄와 범과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 기회에서 시작했다(죄는 사람이 이런 구원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은 인간을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을 설교했다. - P365

사실, 바울은 그의 복음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설명해야 할 일이 화급하다보니, "인간론"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제시하는 데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보다 더 치중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단지 그의 신학과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의 결과에 불과하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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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후 2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언약적 율법주의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 P351

때문에 우리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기원후 70년 이전의 팔레스타인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 P351

따라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예수가 아셨고 어쩌면 바울도 알았을 기본 종교 유형이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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